-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06/25 00:22:11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브렉시트 단상
1. 이민

일단 이민 (immigration)과 난민 (refugee)은 전혀 다른 개념이에요. EU 회원국 전원을 골치아프게 했던 난민 문제는 모두 시리아 등지에서 오는 거라 지금 사안과 큰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EU탈퇴시 난민유입이 더 늘어날 거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에요. 지금 영국이 EU탈퇴와 이민자 문제를 결부짓는 건 주로 동유럽인들 때문이에요. 한 통계에 따르면 폴란드의 EU가입 이후 영국으로만 100만명 이상의 폴리시가 와서 터잡고 살게 되었대요.

하지만 이 이민문제와 이슬람 공포증이 전혀 관련이 없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에요. 폴리시가 오는 것도 짜증나는데 터키가 EU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탈퇴진영에 굉장한 자극을 주었어요. 영국독립당(UKIP) 당수 나이젤 패러지가 제작한 광고판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어요. "터키가 온다"라고 크게 써 놓고 영악하게도 그 밑에 "7천6백만명의 인구"라는 문구를 넣었지요. 이런 감각을 보면 우파 포퓰리스트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봐요.



잔류진영에선 이걸 포퓰리즘이라며 맹공격을 했어요. 실제 EU가입조건이 스물 몇 개인가가 있는데 터키는 그 중 하나를 만족 시킬까 말까한 상황이라 가입이 어려운 상황이고 게다가 심지어 28개 회원국 모두 신규회원국 가입 여부에 대한 반대권 (veto)이 있기 때문에 영국이 반대하는 한 터키는 결코 가입할 수 없는 상황이라구요. 탈퇴 진영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야 못 믿겠어. 자 그럼 수상에게 물어보자. 터키가 가입한다고 신청서 내면 반대권 행사 할거야? 터키개객기 해봐!" 라고 수상에게 질문했는데 아니 그런 외교문제를, 심지어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문제를, 누가 공개적으로 대답합니까.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거기서 "터키 가입은 절대 안됨"이라고 말 해선 안되지요. 터키랑 영원히 척질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캐머런은 칼 같은 대답을 주지 않았고 그걸 두고 "봐, 저거 반드시 죽어도 거부권 행사하겠다고 말 안하잖아. EU 탈퇴 안하면 7천6백만 터키인이 다 영국으로 몰려들 거라니까" 하면서 꽹가리를 쳤지요.

또 이민자의 숫자를 어떤 수준으로 통제해야 적정한가를 두고 토론할 때에 노동당 당수이자 이상주의자인 제레미 코빈은 "상한선 (cap) 같은 걸 왜 정해야하지? 그런 건 필요 없음" 이라고 민의를 못 읽는 (?) 발언을 투표 전날 했고 이게 탈퇴론자들을 각성시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어요.


2. 소득/교육수준


반이민 정서는 소득/교육수준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요. 짐작하시겠지만 교육수준이 높을 수록 고숙련/전문직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대체로 자기 일자리를 경쟁자로부터 지켜낼 방어력이 좋은 반면 반대의 경우는 저렴한 임금을 무기로 밀고 오는 동유럽 출신 노동자에게 직장을 내줄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래서 소득과 교육수준이 낮을 수록 반이민 성향을 더 강하게 보였어요.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이런 투표를 한거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에요. 제 기억이 맞으면 영국의 실업률은 5% 수준으로 완전고용에 가까워요. 남유럽 제국諸國의 10~20%에 이르는 실업률과는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지요. 또 이민자들이 영국에 와서 일하는 만큼 영국인들도 EU시민 자격으로 이민 나가서 일하고 있으니 (수에서 차이가 날지언정) 일자리 문제가 당장 매우 심각한 상태라고 하기 어려워요.

진짜 문제가 됐던 건 [공포]에요.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는 이민자가 더 많이 들어올 거고 그러면 걔들이 우리 일자리를 차지할 거고 근미래에 우린 해고될 거고 거지가 될 거라는 공포.


3. 연령

젊은 층은 이상적이지요. 그들은 대개 리버럴하며, 세계시민주의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어요. 모두가 증오를 버리고 사랑으로 같이 살며 폭력적인 수단 없이도 우리는 평화와 공존과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며 다양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지요. 노년층은 대개 이런 이상에 회의적이에요. 그들은 세계시민주의 같은 건 모르겠고 영국 문화의 우수성(?) 같은 걸 자부할 뿐이에요. 이런 국뽕성향은 보혁을 막론하고 노년층 전체에서 강하게 드러나요. 이게 이른바 [정체성 논쟁]으로 번졌는데, 영국의 영국됨(Britishness)을 이민자들이 희석시킨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 주장이 꽤 먹혔어요 -_-;

여기서 영/미 간의 주요한 차이점을 볼 수 있어요. 미국은 이민자국가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존재 (identifier)가 전통/문화/관습/인종 같은 거에 있지 않고 이념에 있어요. 그래서 자기들 헌법을 그렇게 물고 빨고 하지요. 헌법이 규정한 이념에 동의하면 "우리"인 거고 아니면 "남"이 되어요 (일단 표면적으론 그래요! 깊이 들어가면 거기도 종교/인종이 문제가 되지요...)

영국은 미국 헌법 같은 게 없어요. 영국을 영국다이 만들어주는 건, 그래서, 이념이라기보단 매일매일 말하고 행동하는 특정한 양식이요, 그런 말과 그런 행동을 수행(perform)하는 300년 된 건물들이요, 인용표시(" ") 없이 인용해도 서로 잘 알아먹는 셰익스피어의 구절들이요, 왜 멋있는지 모르겠지만 멋있다니까 멋있는가보다 하는 영국 왕실이요, 분명 맛없는데 맛있다고 우기니까 그런갑다 하는 피쉬앤칩스에요.

그래서 젊은 브렉시터들과 늙은 브렉시터들은 서로 약간 다른 이유로 탈퇴를 지지했다고 할 수 있어요.


4. 주권 논쟁

자기들은 영국인이니까 영국인이 영국에서 만든 법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대요. 그래서 EU법을 따르기 싫대요. 그래서 이번 투표로 주권을 되찾았으며 그래서 오늘이 독립기념일이래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멍멍이 소리지요. 그럼 UN은 왜 탈퇴 안하고 붙어있나 몰라요. 그런데 이게 또 유권자들에게 먹혔어요 (아니 왜...)


나라를 되찾자는 나이젤 패러지



5. 개인적인 이야기

영국 대학들에는 그 어느 섹터보다도 유럽인이 많을 거에요. EU회원국이라는 지위 덕분에 내국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고, 그래서 학비도 졸라 싸게 냈거든요. 교수/연구자도 유럽인이 많았어요. 파운드화가 강하다보니 영국에와서 봉급을 받고 그걸 본국에가서 환전해서 쓰면 넉넉하게 살 수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유럽인과 결혼한 미국인이라든지 하는 양반들도 EU시민권자의 배우자로서 영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영국 대학들에서 연구하고 가르쳐왔어요. 그래서 제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독일인/프랑스인/스페인인/포르투갈인/네덜란드인 투성이에요.

이들 모두 이번 투표 결과로 격심한 충격을 받았어요. 교수/연구자들의 경우 당장 좇겨난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일단 파운드화의 폭락으로 봉급이 10% 깎인 셈이에요. 학생의 경우는 EU탈퇴가 현실화되는 순간 자신들의 지위가 "외국인"으로 격하되면서 학비가 지금의 2~3배로 올라갈 거구요. 하지만 이들 모두를 진정 괴롭게 한 건 배척당했다는 [기분]이에요. 소위 [영국]인들이 영국뽕에 취해있는 동안 그 뽕판에서 소외된 이들은 배제된 소수자의 공포를 느끼는 거지요. 저의 네덜란드인 지도교수는 "난 환영받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그게 참 견디기 힘들어. (I feel I'm not welcomed here, and I'm sick of that)" 래요. 그리곤 독일 대학쪽으로 옮기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하네요. (사실 속마음으론 '그래도 당신은 중산층 백인남성이잖아요. 난.......;ㅅ;' 라고 말할 뻔 했지만 잘 참았어요.)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런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아무도 모를 거에요. 오늘 부총장이 학생 전원에게 이메일을 돌렸어요. 학교 전체가 잔류를 위해 싸웠는데 이런 결과가 나와서 아쉽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 말고 하던 일을 계속 하쟤요. 왜냐하면, 지난 수세기간 우리 대학은 이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들]도 이겨냈기 때문이래요. 어쨌는지 저쨌는지 전 잘 모르겠고 일단 박사논문이나 최대한 빨리 써내야겠어요. 오늘따라 이메일 회신이 늦는 지도교수가 도망가기 전에 ㅠㅠ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7-01 08:23)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9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31 일상/생각가끔은 말이죠 1 성의준 17/05/14 4510 9
    398 창작옆집에는 목련이며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5 틸트 17/03/27 6019 9
    303 역사러일전쟁 - 그대여 죽지 말아라 4 눈시 16/11/17 5834 9
    222 일상/생각브렉시트 단상 27 기아트윈스 16/06/25 6702 9
    194 역사시빌 워 - 미국 남북전쟁 (끝) 16 눈시 16/04/27 6427 9
    188 일상/생각종합 정치정보 커뮤니티, 홍차넷 37 Leeka 16/04/20 7215 9
    186 음악홍차넷 지상파 입성 기념 뮤직비디오 241 Toby 16/04/20 13760 9
    183 의료/건강게보린 3형제 이야기 26 모모스 16/04/12 6909 9
    177 기타[空知] 녹차넷을 엽니다. 78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04/01 8170 9
    241 과학도핑테스트와 질량분석기 10 모모스 16/07/30 9326 9
    112 역사사도세자의 아들 - 홍씨와 김씨 (1) 7 눈시 15/11/08 6164 9
    91 과학쓰레기 유전자 ( Noncoding DNA ) 와 유전자 감식 23 모모스 15/10/20 7282 9
    67 IT/컴퓨터[약혐?]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의 꿈을 꾼다 10 Azurespace 15/09/07 11238 9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516 8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 24/03/06 1796 8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1948 8
    1346 기타스몰웨딩 하고싶은 티백들에게-2 4 흑마법사 23/12/16 2028 8
    1340 경제주식양도소득세 정리(2022. 12. 31. 법률 제19196호로 일부개정된 소득세법 기준) 7 김비버 23/11/22 2663 8
    1331 꿀팁/강좌귀농하려는 청년들에게 (시설하우스 기준) 18 바이엘 23/09/27 2784 8
    1165 정치/사회한국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의 역설 - 행복해졌는데 자살, 자해가 증가? 7 카르스 22/02/03 4100 8
    1156 기타중세 판타지의 인종다양성, 시간의 수레바퀴(Wheel of time) 13 코리몬테아스 21/12/30 4695 8
    1139 정치/사회검단신도시 장릉아파트에 대한 법개정을 추적해 봤습니다. 15 Picard 21/10/28 5078 8
    1089 여행[사진多]5월의 가파도 산책 8 나단 21/05/12 3617 8
    1051 정치/사회미국의 저소득층 보조, 복지 프로그램 칼웍스 5 풀잎 21/01/13 4770 8
    986 일상/생각Kimchi Warrior의 탄생 7 이그나티우스 20/07/19 4472 8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