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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4/29 00:54:17
Name   눈시
Subject   유게에 올라온 유재흥 글에 대해
https://kongcha.net/?b=13&n=11113


댓글에서 자세히 쓸까 생각은 했었는데요 ( ..);; 질문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a

구체적인 전쟁 자료는 지금 당장 구할 수 없으니 예전에 쓴 글들 토대로 쓰겠습니다. 전에는 육군에서 인터넷에 참 많은 정보를 풀었었는데 왜 막은 건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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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글의 목적
- 가장 큰 왜곡이 저 전투로 국군의 작전권을 뺏겼다는 겁니다. 아니에요. UN군 투입되자마자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직접 줍니다. 작전권 통일이야 어느 전쟁이든 필수고 국군이 약하니 주는 게 나았고, 준만큼 저들이 쉽게 발을 뺄 수 없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구요. 전쟁 끝나면 돌려받기로 했지만 휴전이 됐죠. 이후 작전권은 계속 UN군 사령관(당연히 미군이었지만)에게 있었고, 70년대 말 박정희는 이걸 현재의 한미연합사로 바꾸는 걸 시도합니다. 이게 돼서 지금의 작전권은 한미연합사에 있고, 한미사령관이 1:1 수준으로 권리를 행사합니다. 이후 작전권을 국군이 온전히 가지려고 했고 김영삼 때 평시 작전권은 돌아온 상태였죠. 이후 전시 작전권도 받자...고 했는데 전 정권과 현 정권은 북한의 도발로 미루고 있구요.
노무현 때 전작권 환수가 또 떠올랐고, 이 때 전직 장성들이 반대했습니다. 노무현이라서 한 건 아니고 이전에도 쭉 반대해 왔었습니다. 그 유명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가 이 때 나왔고, 전직 장성의 비리 등으로 니들이 반대할 자격이 있냐는 얘기도 나왔구요. 저 괴담도 이 때 나왔습니다. 유재흥 때문에 전작권을 뺏긴 것이다, 유재흥이 무슨 자격으로 반대하냐는 거였죠. 인과를 바꿔버린 것이죠.

국군과 중공군
- 중공군이 그냥 인해전술로 밀어붙인 게 아니라는 건 맞습니다. 중공군은 이 때 산악지대를 도보로 빠르고 은밀하게 이동했고, 사방에서 꽹가리를 치는 등 심리전으로 아군을 위축시켰으며, 약한 곳을 집중적으로 노립니다. 소련군의 교리인 제파식 전술과 연결됩니다. 한 지점에 차례대로 병력을 투입해 방어 쪽에서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뚫으면 대군을 밀어붙여서 돌파구를 확대, 후방 깊숙이 진격하면서 포위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잘못돼서 한번에 너무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 혼잡해져서 실패하거나 성공해도 피해가 너무 커지고, 병력을 너무 띄엄띄엄 보내면 피해도 못 주고 병력만 다 날리는, 축차투입->각개격파가 됩니다. 중공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와 국공내전으로 이에 대한 훈련이 잘 돼 있었습니다. 북한군 중에서도 국공내전의 경험이 있던 정예군은 강한 공격력과 상상도 못한 기동력을 보여주었었죠. 인해전술이라 합니다만 실제론 이랬고, 대중에 알려진 것과 달리 국군 내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 아 물론 수가 적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작전이긴 합니다. 소련이나 중국이나 물량으로는 최강이었으니까요. 다만 이 때 중공군이 수적으로 UN군을 압도했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대다수가 약한 국군이긴 했지만 수는 그리 차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국군 쪽 등 목표에 물량을 최대한 쏟아낸 거구요. 이후 휴전협정이 진행되면서 두 배를 넘는 병력을 투입하지만 그건 나중의 얘기죠.

- 중공군이 국군을 주로 노린 것도 맞습니다. 약한 데를 찔러야죠. 당시 국군은 위부터 아래까지 다 엉망이었습니다. 전의야 높은 편이었지만 그것도 큰 피해를 입어가며 훈련 안 된 병력들이 다수 참가하게 되었으니... 강한 군대도 포위되면 사기가 떨어지는데요. 중공군의 작전은 신생국의 약한 군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해방 후 한국에서 군사적인 지식이 있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조선인에 대한 징병은 전쟁 극후반에나 있었죠. 장교진은 조선 내에서 그나마 금수저라서 일본 육사로 간 극소수, 나머지는 조선인도 받아들인 만주국에서야 가능했죠. 전자 중에 홍사익이 중장까지 올랐지만 포로수용소나 맡았고 전범으로 사형당하죠. (이에 대해선 말이 길어지니 패스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대령까지만 올랐고 맹장으로 유명한 김석원 말고는 (역시 할 얘기 많지만 패스) 다 전투부대를 지휘하지 못 합니다. 많아야 대대 정도의 병력만 이끌었구요. 후자는 대위까지였습니다. 독립군 쪽의 상황은 더 열악했습니다. 이범석, 지청천 등이 실전경험이 있었지만 독립군의 수는 너무 적었으니까요. 그나마 김홍일(이봉창, 윤봉길이 던진 폭탄이 바로 그가 만든 거였습니다)이 중국군 내에서 사단지휘 경험이 있었습니다.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컸습니다. 미국이 일본에서 자위대 만들 때도 경찰 출신으로 받았다가 도저히 안 돼서 다시 구일본군 출신을 불러야 될 정도였죠. 한국에서도 구일본군 출신을 부릅니다. 하지만 자기들도 싫었던 일본식 대신에 미국식을 심으려고 했죠. 그래서 전자는 배제하고 군인이었지만 일본군 물은 덜 든 후자를 최대한 등용합니다. 독립군 출신은 좌익계열은 애초에 북한에 있거나 우익에게 탄압받고 몰락하거나 북한으로 갔습니다. 우익계열은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참여를 하지 않다가 나중에야 참여합니다. 중국이 적화된 영향도 있고 김구가 김일성과 협상하려고 한 영향도 있었죠. 이들이 수도 훨씬 적고 참가도 늦게 해서 (특히 대다수고 서로 이끌어주던 만주군 출신에게) 계급에서 이리저리 밀렸구요. 인정하긴 기분 나쁘겠지만 경험과 능력 문제도 있었습니다. 능력 있고 경험도 많은 자들은 정치인이 됐구요. 이범석, 지청천 같은.

전쟁 초반에 밀린 건 군의 상황이 이랬던 점도 있습니다. 몇천명에서 만명을 지휘해야 할 자들이 백이백명 지휘한 경험도 없다시피했으니까요. 때문에 서울을 잃은 후 위의 [노장]들이 참전했고, 그나마 상황이 좀 안정됐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역시 미군이 그들을 싫어해서 (역시 대다수고 미군에게 이쁨받은 만주군 출신들에게 밀린 것도 있고) 다시 밀려났죠. 여기까지 얘기하면 알 수 있듯 친일파 논란과 빠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과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라도 등용했기에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끝난 거거든요. 이범석, 김홍일 등도 이런 한계를 애초에 알았고 친일파 출신들 등용하는 것에 앞장섰구요. 이 때 국군의 활약을 깊게 다룰수록 여기에 옹호적이 되구요. (저도 뭐 그렇죠) 김홍일과 장철부 말고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활약한 사람을 찾기 어려우니까요. 반면 친일파 청산을 강조할수록 6.25 때의 활약을 무시하게 됩니다. 뭐 그거야 어쩔 수 없다 생각하는데 심해지면 위와 같은 왜곡이 나오죠. 아예 남조선 괴뢰군이라 하는 사람도 있더만요.

+) 경찰 내의 친일파 잡으려다 이승만에게 당한 반민특위도 군에서 북과의 대치를 이유로 거부하자 받아들였었습니다

유재흥은 후자의 대표입니다. 만주군 출신은 아니고, 아버지 유승렬이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올랐고, 그도 일본 육사에 입학, 대위까지 오른 이였죠. 일본에서 태어나 어릴 때 조선에 왔지만 해방 후까지도 한국말에 약했습니다. 미군은 전쟁경험 있고 일본군 물은 덜 든 젊은 장교들 중 그를 최고로 쳤습니다. 그가 2군단장이 되고 후에 3군단장이 된 이유는 그겁니다. 많이 등판했으니 얻어맞기도 많이 얻어맞은 거죠. 능력이 없진 않았겠지만, 당시 국군의 상황을 감당할 정도의 능력은 없었던 거죠. 그 때 그런 능력이 있는 장군이야 백선엽 정도였구요.

참고로 유승렬도 후에 국군에 입대하는데 아들보다 계급이 낮았습니다. 아들에게 하급자로서 깍듯하게 했다고 하네요. 미군의 방침이 어땠는지를 볼 수 있고, 그가 참 뼛속까지 군인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 일본물 얘기 계속 했는데, 그렇다고 일본물이 잘 빠졌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긴 합니다. ㅡ .ㅡa 반면에 그나마 이정도라고 생각해볼수도 있긴 하겠습니다. 참고로 미군은 중국식(그러니까 광복군 쪽)도 좋게 안 봤습니다.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많이 배워가기도 했고, 미군이 본 중국군은 부패하고 오합지졸인 국민당군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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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글에선 안 나왔지만 유재흥의 패배 역사의 시작인 전쟁 초 의정부 전투, 여기선 북한군의 주공이었던 두세배의 적군과 맞서야 했습니다. 한 개 사단에 휘하 세 개 연대 중 하나는 후방에 있었을 때 말이죠. 이걸 돕기로 한 이형근의 도움도 시원치 않았구요.

청천강 전투에서 유재흥이 휘하 사단의 전멸을 몰랐다는 식으로 서술돼 있는데, 전 그걸 확인 못 했습니다. (열심히 파보진 않았지만 예전에 공부했을 때도 저 괴담을 알고 반론하고 있었으니 저 부분을 안 보진 않았을텐데 말이죠) 당시 중공군은 2차 공세를 하면서 국군을 이중으로 포위했고, 7사단이 깨져가자 후퇴시키면서 예비대인 6사단 휘하 연대를 투입했지만 역시 포위, 패배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후퇴하면서 어떻게든 막아내긴 했지만 구멍은 커졌고, 다른 UN군도 큰 피해를 입었구요. 하지만 이 때의 전체적인 패배가 국군 잘못이고, 그의 잘못이라 하긴 무리가 있습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1차 공세를 당하면서도 별 거 아니라 생각했고, 크리스마스 때까지 미군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자면서 무작정 공세를 취했거든요 (그래서 이름이 크리스마스 공세입니다) 빨리 끝내려한만큼 빈틈이 많이 나올수밖에 없었고, 진격하다가 당한 것만큼 군단장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대표적인 전투가 그 유명한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인데 상부에서 빨리 밀어붙이라고 닥달하다가 전멸할 뻔했습니다. 사단장이 군단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속도를 최대한 늦춰서 (+ 해병대가 진짜 킹왕짱이고 추위는 중공군도 약하게 해서)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죠. 이런 가운데서 몇 배의 병력에 집중공격당한 국군이 패배의 결정적이다? 글쎄요.

+) 그리고 휘하 사단의 패배로 공황에 빠졌다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이 때 그 미군도 공황에 빠져서 평양을 버리고 도주합니다. 중공군은 더 강한 공세를 할 여유가 없었지만 UN군은 극심한 공포에 (중공군과 접촉하지 않는 것만이 아군을 살리는 길이다고까지 했습니다) 38선을 넘어 후퇴했고, 중공군이 남하하자 아예 서울까지 버립니다. 한반도에서 토끼의 목이라 할만한 평양-원산선에서 정신차리고 방어를 했다면 통일 내지 여기서 휴전선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IF도 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현리... 이 부분도 시작은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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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겨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선 화력이 미군이나 영국군에 비해 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싸움을 이어갈 만한 튼튼한 조직력과 결집력에서 이미 미국과 영국의 군대에 뒤져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이 걸어오는 싸움에서 국군은 여러 차례 약점을 보이면서 무너졌다. 내가 쓰라린 6·25전쟁을 회고하는 이 마당에서도 국군이 허무하게 패배했던 장면에 관한 묘사를 피할 수 없다. 그만큼 국군은 허약했고, 중공군의 타격에 쉽게 무너지는 일이 잦았다.

그것은 사람이 약해서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을 묶어줄 조직력의 부재가 더 큰 문제였다. 체계적인 훈련이 부족했던 것도 함께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강한 군대가 되기 위한 결정적인 몇 가지 조건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봄과 함께 시작된 중공군의 공세에 노출된 국군의 크나큰 약점이었다." - 백선엽


위에서 이중포위망 얘기했죠? 현리전투가 있었던 중공군의 6차(혹은 5차의 두번째) 공세에서는 삼중이었습니다. 첫 번째 포위망은 중공군 20군(3개 사단)이 국군 7사단을 공격, 이를 돌파해 오마치 고개로 가고 북한군 5군단(4개 사단)이 국군 3사단을 돌파해 오마치에서 중공군과 연결, 현리 일대의 3, 7, 9사단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포위망은 중공군 27군이 5, 7사단 사이를 돌파하고 북한군 2군단(2개 사단)이 국군 1, 3군단 사이를 돌파, 남으로 철수하는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포위망은 중공군 12군이 국군 5사단을 돌파, 동쪽에서는 북한군 2군단 1개 사단과 3군단 2개 사단이 2군단 주력의 뒤를 이어 남쪽으로 진격, 가장 큰 포위망을 만들어 남은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었죠.

4개 사단을 섬멸하기 위해 18개 사단이 동원된 것이었죠.

"육군본부에서 하달된 작전 명령상의 전투지경선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군단 예하 2개 사단의 주보급로가 하진부리-상남리-오마치-용포-현리로 이어진 단차선인데, 왼쪽에 인접한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은 오마치 동쪽으로 잘려 나가 그 군단 관할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부연하면 군단 보급소가 하진부리(일부는 강릉)에 있음을 고려할 때 주보급로의 상체와 하체는 우리 군단에 속하고 복부는 남의 군단에 속하는 기현상이었다." - 유재흥

시작부터 3군단은 미 10군단에 7사단을 뺏깁니다. 예하부대를 뺏기는 것 자체도 좋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는 3군단의 보급로가 미 10군단 쪽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군단사령부가 있던 하진부리에서 서쪽 7사단 지역으로 갔다가 현리로 들어가는 식이었거든요. 이 사이에는 고개가 다섯 개 있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오마치(오미재) 고개였습니다. 유재흥은 이 곳에 예비대인 29연대를 투입하지만, 미 10군단 에드워드 알몬드는 당장 병력을 빼라고 합니다. (맥아더의 측근으로 위에서 미 해병대를 몰아넣은 자도 알몬드였죠) 유재흥은 안 된다 했지만 결국 빼게 됩니다.

"오마치 고개에 신경을 쓰면서도 실기(失機)하고 말았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만 해도 적이 하룻밤 사이에 군 전선을 뚫고 30km나 되는 원거리를 주파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으며, 적의 유격 전술을 좀 이해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있다." - 유재흥

이런 가운데서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됐고, 7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합니다. 이렇게 구멍이 뚫리자 별 피해가 없었던 3군단의 9, 3사단도 후퇴했죠. 이들이 집결한 곳은 현리였습니다. 그리고 계획은 많이 어그러졌지만, 중공군은 이들의 후퇴하기에 중요한 곳인 오미재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시작은 1개 중대였지만 계속 병력들이 모여들었죠. 1개 중대에 1개 군단이 무너졌다는 왜곡의 모티브입니다.

+) 뭐 이들의 역할이 작았던 건 아닙니다. 어차피 시간대별 병력이야 제대로 알 수 없고, 1개 중대가 아니라 1개 분대라도 상황을 모르는 상황에서 후방이 차단되면 공포에 빠지는 게 당연하거든요

너무나도 단시간에 3개 사단이 모입니다. (7사단은 소수 패잔병이었지만요) 좁은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고, 이 때문에 서로 무전간섭도 일어나고 있었죠. 이런 가운데서 국군의 움직임이 제대로 없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서로 말이 달라서 알 수 없지만 변화된 상황에 적응을 제대로 못한 게 크겠죠. -_-a 유재흥도 답답해서 현리까지 비행기 타고 날아갑니다. 거기서 오마치 고개를 돌파한다는 작전을 짠 후 다시 비행기 타고 군단 사령부로 돌아가죠.

네. 이게 군단장이 비행기 타고 도망쳤다는 왜곡의 모티브입니다. 애초에 군단장은 후방에 있는데 전장에서 도망간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이건 공포에 빠진 사병들 사이의 지레짐작으로 봐야 됩니다. 혹은 얼마나 있었을지 모를 북한군의 심리전이거나요.

+) 이 때 미군도 상황 모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7사단이 패하는 가운데서 3군단에서 7사단의 상황을 물어보니 별 일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위에 보시면 조창호 소위가 포로로 잡혔다가 탈북 후 그를 면담하려고 했는데 끝내 거부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008211918321&code=910100
면담을 거부했다는 사람이 시위를 같이 했네요.

"간부들의 교육훈련 수준이 저조했고 전투지휘능력이 미숙했기 때문에 현리전투에서 참패했다. 즉 리더쉽 부족이다." - 30연대장 손희선

이런 가운데서 오마치 돌파 작전은 전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일단 최석이 사단장으로 있던 9사단 쪽으로 가는 것 같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는 국군의 수준이 너무 딸렸고, 포위되었다는 공포에 스스로 무너졌다고 봐야됩니다. 정말 어느순간 다 도망쳐 버렸거든요. 명장이 있었다면 이걸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때 3사단장이 초기 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을 3일 동안 막아내고 후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종오였습니다. 그도 이 때는 병사들과 함께 도망갈 뿐이었죠.

이 때 군단장은 도망가다 잡히고 대통령도 도망가고 미군도 한국을 버렸다면서, 무기를 수거하고 항복하자는 [연대장의 명령]을 듣고 무기를 모으다가 말도 안 돼서 다시 확인해보니 거짓이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적의 심리전이 계속되고 있었던 거죠.

군단에서는 이런 패잔병들을 모아서 수습하려고 했는데 중공군이 거기까지 오자 또 무너졌고, 다시 37% 정도의 병력을 수습해 군단 사령부가 있는 하진부리에서 적을 다시 막으려 했지만 거기서도 무너집니다. 이게 군단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이고, 그 유명한 일화는 이 때 나옵니다.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계속된 패전, 특히 군단 사령부에 가까이 왔는데도 제대로 수습을 못 했고 계속 패했다는 건 큰 실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군단장이 도망가고 수수방관하다가 잘린 건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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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재흥에 대한 얘기를 마무리하고 현리 전투의 남은 부분을 얘기하도록 하죠.

그의 대표적인 공이라 할 건 낙동강 전선에서의 영천 전투입니다. 다부동 전투와 함께 낙동강 전선이 뚫리는 걸 막은 대표적인 전투죠. 이런 걸 보면 그가 능력이 없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는 미국에서 생각한 국군의 에이스였고, 늘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잘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의 위치에서 그는 정말 잘 해야 했거든요. 적이 몇 배든간에 어떻게든 막아낸다든지, 현리 전투의 경우 아군을 어떻게든 수습해서 방어를 해야 했다든지 하는 부분이요. 이런 승리가 국군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어쨌든 그는 결정적인 순간의 패장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것의 원흉으로 꼽힐 건 아니죠.

그가 이렇게 패배하면서 국군은 미군과 이승만이 밀어줬던 삼대장이 확실히 잡게 됩니다.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이죠. 이 중 확실한 전쟁영웅은 백선엽, 나머지는 정치 군인에 가깝죠. 뭐 그렇다고 백선엽이 비정치적이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대다수인 만주군 출신들을 이끌고 파벌을 나눠 싸웠거든요. 5.16이 바로 이렇게 엉망인 군을 재정비한다는 정군운동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5.16 이후 유재흥은 박정희에 의해 국방부장관을 맡습니다. 역시 선조가 원균을 중용한 것과는 다릅니다. 쿠테타를 통해 내쫓은 장성들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들처럼 부패한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현재 유재흥은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4.3 사건에서 말이죠. 그 끔찍했던 토벌전에서 유재흥은 그래도 정상적인 군인이었습니다. 피난민들을 무장대와 분리해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게 했고, 덕분에 많은 제주도민들에게 가해졌던 탄압을 최대한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가 토벌군을 지휘하면서 산에 숨어있던 (적으로 몰려 죽을 운명이던) 많은 사람들이 하산했고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장대도 최대한 귀순시키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자의든 타의든 무장대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목숨도 살릴 수 있었구요.

친일파라서 비판하는 거야 당연한 거죠. 패장이라고 비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구요. 문제는 저렇게 다른 목적으로 있는 걸 왜곡하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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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 전투를 마무리해보자면... 한국사 3대 패전으로 불리니 국군의 부끄러운 모습이니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는 건 중공군의 의도대로 가는 거였다는 것. (위에서 썼듯 정확한 타임라인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공군이 강화돼 있었고, 국군이 그 자리에서 시간을 더 끌다가 공격했다면 포위망에 갇혀서 전멸했을 겁니다. 헌데 결과는? 나중에 수습해보니 무려 병력의 70%가 돌아왔죠. 중공군의 포위가 제대로 되기 전에 다 도망가버린 것이죠. 모래를 움켜쥐어도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요. 오히려 미군과 (3군단 외의) 국군이 반격에 나서서 큰 피해를 줬습니다. 이 때문인지 (위에서 알몬드의 이상한 모습을 근거로) 미군에서 국군을 희생양으로 삼아 중공군 대부대를 끌어들인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습니다.

포위망이 완성되었다면? 그 전의 4차 공세에서 횡성 전투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국군 8사단은 제대로 포위됐고, 사상자가 무려 60%나 됐습니다. 현리 전투에서 두 개 사단+a가 그런 꼴을 당할 수 있었던 것이고, 중공군의 계획이 완전히 성공했다면 국군 4개 사단이 모두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도망가서 오히려 잘 된 이상한 패전입니다. -_-;

다른 하나는, 이게 오히려 국군을 강하게 만들어줬다는 것이죠. 그 땐 전황이 계속 변해서 국군이나 미군이나 제대로 훈련도 안 시키고 투입하기에 바빴습니다. 횡성 전투와 이 전투를 통해 미군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물자를 더 지원하고 훈련장을 따로 만들고 하면서 국군을 훈련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 가면 국군은 중공군과도 전투력에서 그리 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죠. 현리의 패배로 군단은 없어지고 국군은 모두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됐지만, 이렇게 차츰 국군을 다시 강화시키면서 다시 군단을 늘렸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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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답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5-09 10:29)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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