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02/24 12:03:42
Name   이젠늙었어
Subject   (혐, 자랑, 뱀꼬리 주의) 담배 <3>
제 아내는 저만의 치어리더입니다. 뭐든 제가 하려는 일을 응원해 줍니다. 이런식이죠.

'오늘 회사 가기 싫어.'
'그럼 오늘 뭐하고 놀까?'

'나 회사 관두고 싶어.'
'그래야지, 그럼. 같이 쉬자.'

'나 사업할까?'
'재밌겠다. 나랑 같이 하자.'

'이젠 머리쓰며 사는게 싫다. 장사하고 싶어.'
'오! 같이하는 거지?'

'이민갈까?'
'와~ 어디로 갈껀데? 근데 난 미국은 좀 싫타~'

'더 늦기 전에 세계일주 한 번 하고 죽어버릴까?'
'와~ 나는 인도에 먼저 가고싶어!'

이처럼 아내는 제 말을 거부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전생에 지구를 구했나봐요. 아내는 20여년간 제 아내이자, 착한 며느리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자, 그리고 특별하게도 항상 제가 하는 일에 찬성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어 넣어주는 이쁘고 발랄한 치어리더입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아내가 제게 원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단 하나를 빼고요.

결혼 이후, 근 10여년간 아내가 제게 가끔, 그러나 끊임 없이 요구한 것은 금연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리하게 요구한게 아니고 항상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할 뿐이었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건 되도록 말하지 않을라고 했는데, 정말 미안해, 내가 도저히 못견디겠어. 제발 방에서는 담배 안피면 안돼?' (딤배 <1> 중에서)

아내가 처음 요구한 사항이 이런식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 글을 쫓아 오신 분들이라면 예상하시듯 저는 착한 사람이 못됩니다. 아내의 요구는 항상 묵살되었고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시작된 금연 시도도 제 욕심에 의해 시작된 것일 뿐이죠.

이제 제 저열한 성격이 드러나는 시점입니다. 전 제 욕심에 의해 금연을 시도하면서 어여쁜 아내의 칭찬과 격려를 기대한 겁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요. 평소에도 아내는 제게 항상 애정이 가득한 표정과 시선과 대화를 선사합니다만 이제 금연을 시작했으니 아내로부터의 보상은 더더욱 크나클 예정이었습니다. 아내는 저를 사랑하고 있으니 제게 일어난 변화를 즉시 알아챌 것이 틀림 없었습니다.

그 즈음, 아내는 제가 그날의 마지막 담배를 피운 후 잠자리에 파고들때마다 '아휴~ 담배냄세~' 했었는데요, 저는 금연 첫날을 제정신이 아닌채 보내다가 아내의 놀람과 애정이 서린 표정을 고대하며 옆에 누웠습니다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제가 하루종일 담배를 멀리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말이죠.

처음엔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뭐, 그럴수도 있지 하며 저는 그 다음날을 고대했습니다. 아내의 놀람과 기쁨, 그리고 저에 대한 배가된 애정이 담뿍 담긴 표정이 보고싶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아내의 칭찬 없는 괴로운 나날이 삼일, 칠일, 이주 등등이 넘어갔습니다. 이 여자는 혹시 제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걸까요?

결국 전 내부적인 자아 분열을 일으키는 지경이 되어 제 자신을 괴롭히고 괴로움을 당하며 스스로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아내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요즘 나 변한거 없어?'
'??? 뭐가???'
'넌 사실 나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는거지? 다 필요 없어~'

결혼 이후 처음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불안한 표정은 며칠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곤 폭발했죠.

'도대체 무슨일이야? 말을 해야 알 것 아냐?'
'흥~ 담배안핀지 삼주가 다되가는데 알지도 못하고. 나를 사랑한다는건 다 거짓말이지?'

아~ 아아~ 아아아~

지금도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순간 5 초 정도 아내의 표정이 버라이어티 하게 변했습니다. 분노, 의아, 놀람, 당혹, 기쁨? 제가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말 그대로 아내의 표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모르겠어~' 였죠. 제 아내는 굉장한 미인인데요, 미인의 얼굴에 이처럼 다양한 표정을 단시간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겐 정말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표정은 미안함과 당혹함 약간에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아내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미녀였습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또 한 번 사랑에 빠진듯 했죠.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담배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문다면 마치 그때 아내의 다양한 표정을 보며 느꼈던 희열이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제 욕심에 의해 시작한 금연 시도였는데 아내의 사랑이 저를 담배로부터 해방시켜준 셈이죠.

이상으로 담배 3부를 마칩니다. <4부에 계속... 될지 어떨지 미정>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3-06 16:00)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4
  • 드디어 오리지날 3편
  • 아재 라노벨 쓰시넹
  • 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06 일상/생각메론 한 통 2 Raute 17/09/04 5767 13
113 정치/사회11.14 후기입니다 5 nickyo 15/11/14 5771 23
244 정치/사회성별과 투표참여, 그리고 정치지식과 선거관심도 9 난커피가더좋아 16/08/04 5773 11
326 일상/생각. 14 우웩 16/12/19 5774 21
407 일상/생각김치즈 연대기: 내 반려냥이를 소개합니다 52 lagom 17/04/06 5781 33
224 일상/생각서로 다른 생각이지만 훈훈하게 29 Toby 16/06/28 5789 6
160 일상/생각(혐, 자랑, 뱀꼬리 주의) 담배 <3> 7 이젠늙었어 16/02/24 5792 4
595 일상/생각따듯한 난제 10 Homo_Skeptic 18/02/23 5794 35
865 여행몽골 여행기 - 1부 : 여행 개요와 풍경, 별, 노을 (다소스압 + 데이터) 8 Noup 19/09/26 5799 11
950 일상/생각자아를 형성해준 말들 30 ebling mis 20/04/21 5802 32
1014 기타30개월 아들 이야기 25 쉬군 20/10/05 5804 47
456 일상/생각내가 만난 스승들 #1 - 1994년의 예언가. 22 SCV 17/06/20 5808 18
797 역사현대에도 신분제도는 남아있을까? 10 메존일각 19/04/21 5808 11
787 의료/건강어떻게 의사는 사고하는가 - 2. 진단=사후확률Up & 진단의 두 축 3 세란마구리 19/04/03 5809 10
302 기타서원철폐 21 피아니시모 16/11/16 5810 4
350 정치/사회미군 기지촌 위안부 사건이 법원에서 일부 인용되었습니다 18 다람쥐 17/01/21 5810 11
504 일상/생각10년전 4개월 간의 한국 유랑기 #완 16 호라타래 17/09/02 5818 18
870 기타아이는 왜 유펜을 싫어하게 되었나. 27 o happy dagger 19/10/02 5827 49
1287 정치/사회미국 이민가도 지속되는 동아시아인의 저출산 패턴 30 카르스 23/03/28 5827 16
929 기타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운명 12 이그나티우스 20/03/01 5829 9
1124 일상/생각그동안 홍차넷에서 그린것들 80 흑마법사 21/09/08 5833 29
1022 체육/스포츠로마첸코-로페즈 : 초속과 변칙 5 Fate(Profit) 20/10/18 5834 9
1085 기타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키즈카페 추천 2 쉬군 21/05/04 5836 35
1235 과학마름모는 왜 마름모일까? 30 몸맘 22/09/05 5836 28
275 일상/생각[펌] 시대로부터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46 기아트윈스 16/10/06 5839 1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