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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10/12 23:45:47수정됨
Name   meson
Link #1   https://cafe.naver.com/bloodbird/75572
Subject   『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2016년의 맨부커 국제상 이후, 『채식주의자』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일컬어졌습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식의 주장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고,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었으며, 한강은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에 이르렀죠. 이제는 이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되어버렸습니다만 그 상황은 꽤 기이했습니다. 물론 『채식주의자』는 좋은 소설이지만, 한국문학을 대표한다기에는 정작 한강 자신의 작품군 내에서도 최고작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었고, 나라가 왜 이렇게 사대주의적이냐며 번역 논란을 건드리던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높아진 관심도를 기회로 삼아 작품을 더 연구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인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는 [ ‘사실 『채식주의자』는 한국문학을 대표할 만한 명작이 맞았던 게 아닐까’ ] 따위의 생각을 하곤 했더랬지요. 하지만 이제 노벨 위원회의 교시를 보게 되면 그렇지는 또 않은 것 같고, 한강의 최고작은 『소년이 온다』가 분명한 것 같으며, 어쨌거나 기쁘기 한량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와서 누가 한국 문단에 각성을 촉구할 수 있겠으며, 한강에게 번역 논란을 다시 들이댈 수 있겠습니까. 본인이 심은 씨앗을 본인이 수확했으니 공을 나누자고 할 작가도 없을 것입니다. 맨부커 국제상 이후의 이력을 보면 노벨상 역시 아주 갑작스럽기는 해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쓸데없이 말을 얹는 것은 이쯤에서 멈추고, 많은 분들의 관심이 집중될 『소년이 온다』나, 혹은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면 이 글은 매우 시의적절한 내용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글은 『채식주의자』에 대한 것입니다. [ 언젠가 써야지 하다가 마침 더없이 좋은 시기가 찾아와서 그런 것 ] 이라기보다는, 그냥 제가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를 소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예의 작품들을 구하고자 해도 여의치 않으리라는 것은 뻔한 노릇이니, 여기서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앞으로는 노벨상 후보의 작품들을 상시 구비해야 시류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인생의 교훈을 곱씹으며 곁다리로라도 세태에 편승하려 노력할 뿐인 것입니다.

부회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vegan

『채식주의자』는 연작 소설로, 「채식주의자」로 시작해서 「몽고반점」으로 이어지며 「나무 불꽃」에서 끝납니다. 이중 일찍이 유명했던 것은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몽고반점」이었으나, 단행본으로 묶이면서 제목이 『채식주의자』가 되었죠. 이 책의 영역본이 맨부커 국제상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왠지 「채식주의자」가 본체인 것만 같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사실 [ 이 연작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정말로 「채식주의자」입니다. ] 「몽고반점」은 시퀄로 보자면 그럴 수도 있지만 혼자서 이상문학상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립성도 강하고, 「나무 불꽃」은 다시 중심을 돌려놓으면서 일관된 주제를 건져내는 역할을 맡게 된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 주제를 나름대로 해명해 보자면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폭력의 트라우마

「채식주의자」는,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영혜라는 여자가 꿈을 꾼 뒤로 채식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입니다. 다만 영혜가 아니라 영혜의 남편을 화자로 삼고 있는데, 이런 구도를 통해 정상성에 가려지는 가부장제의 폭력을 비판하는 식의 이야기는 물론 이 작품이 나오기 전부터 여럿 있었습니다. 사실 한강 본인도 「내 여자의 열매」(1997)에서 이미 이런 수법을 한 번 사용했었고,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1]에서 출발해 나온 것이 「채식주의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죠.

그래서 흔히 생각하기로는, 영혜가 꿈을 꾸고 채식을 선언하는 이유 역시 가부장제에서 기인합니다. 영혜에게는 원래 아버지의 압제로 인한 트라우마가 잠복해 있었는데, 남편의 압제로 인해 이 트라우마가 일깨워졌다는 것이지요.[2] 이 관점은 영혜의 아버지가 과거에 아동학대를 일삼았다거나, 개를 잔인하게 죽였다거나, 장성한 딸에게도 구타를 서슴치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강화되며[3] 특히 개를 죽여 잡아먹었던 기억은 영혜의 트라우마에서 근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이야기됩니다.[4] 여기서 더 나아가면 영혜의 아버지가 월남전 참전용사라는 점에 주목하거나, 고기에서 남성권력의 상징성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고요.

꼭 이런 관점을 전면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채식주의자」는 에코페미니즘의 렌즈로 보기에 좋은 작품입니다. 또한 영혜가 채식의 이유를 상세히 언어화하는 대신 “꿈을 꿨어.”[5]라고만 표현하는 것은 분명 트라우마의 특징적 증상과 부합하며,[6] 그 트라우마의 원인이 가부장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분석도 타당합니다. 다만 중요한 점은 「채식주의자」의 논점이 그보다 더 포괄적이라는 것이고, 그 단서는 다름 아닌 영혜 자신의 목소리에서 발견된다는 것이죠.

피와 고기로 점철된 꿈에 대한 이탤릭체의 독백 말입니다.


2. 들큼한 피, 무서운 꿈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자신이 꿈을 꾸게 된 계기로 지목한 사건은, 남편의 재촉 때문에 고기 썰기를 서두르다 손가락을 벤 일입니다. 그 상황에서 영혜는 어째서인지 피가 나는 손가락을 입에 넣는데,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 들큼한 맛이 나를 진정시키는 것 같았”[7]다고 회고하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피 맛이 영혜의 욕망을 충족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8] 헌데도 그 다음날 새벽에 “헛간 속의 피웅덩이”[9]가 나오는 문제의 꿈을 처음으로 꾸었다면, 이 꿈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가장 미묘하며 난해한 대목일 것입니다. 그리고 미묘한 만큼 구분지어 말하자면, 꿈 속에서 영혜는 고기 구이에서 “맛있는 냄새”를 맡았으며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고 “붉은 피를 발랐”습니다.[10] 이 부분은 과연 영혜의 욕망 충족과 같은 맥락으로 읽히며, 낮에 경험한 들큼한 피 맛이 꿈속에서 재연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11] 하지만 이처럼 꿈이 욕망을 반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혜는 “무서웠”고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으며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받았으니,[12] 이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 이 꿈은 영혜의 내면에 서로 상충되는 의지가 병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왜 흡혈이 만족감과 동시에 공포를 불러일으켰을까요? 이 지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역시 영혜가 아홉 살 때 개를 잡아먹었던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영혜는 개에 대한 폭력에 가담한 입장으로 일종의 가해자이며, 이 가해자성에 대한 자각은 그녀의 트라우마에서 근본 원인에 해당합니다.[13] 물론 영혜는 피해자성이 강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폭력의 징후로 다시 바라보며 가해자성까지 인정할 줄 아는 인물인 것이죠.[14] 이렇게 자신의 안에서 가해자를 발견한 시점이 곧 피 맛을 들큼하게 느낀 순간이었던 것이라면, 여기에 경종을 울리는 트라우마가 때마침 발현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됩니다.

꿈 속에서 영혜가 육식을 즐긴 자신의 얼굴을 “처음 보는 얼굴 같”[15]다고 느끼며 두려워하고 부정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3. 채식은 동물의 의지

그리하여 영혜는 하루아침에 채식주의를 선언하고 고기와 계란, 우유, 가죽 제품 등 살육과 관련된 품목들을 모두 폐기하기에 이릅니다. 남편은 여기에 대해 “스님들이야 살생을 않겠다는 대의가 있겠지만”[16] 영혜의 채식은 그런 이유가 아니리라고 폄하하나, 앞에서 논의한 것이 맞다면 영혜의 돌변은 정확히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돌변 자체보다는, 영혜가 그렇게 “철두철미하게”[17] 변했음에도 예의 무서운 꿈이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트라우마가 그 원인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꿈으로 반복된다고 본다면, 육식을 그만두었음에도 꿈이 계속된다는 것은 아직 영혜가 꿈의 진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8] 그리고 그 진의란 앞에서 살펴보았듯 자신 안에 있는 가해자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라는 것이 되겠지요. 이 견지에서 채식은 사실 가해자이기를 그만둔 것이 아닙니다. 식물을 먹든 동물을 먹든, 다른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생을 유지한다는 점은 똑같기 때문이죠.[19] 채식 이후 영혜가 꾸는 꿈에서 “수없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20]이고,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눈”[21]이 떠오르는 것은 육식이 아니라 섭생이 문제임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요구는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인 이상 존속 자체로 다른 생명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라면, 폭력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존속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 난관 앞에서 영혜는 트라우마의 진의와 대면하기를 무의식적으로 주저하고, 꿈을 통한 회상은 이 자기검열로 인해 불분명한 이미지만을 보여줍니다.[22] 「채식주의자」의 끝에서 영혜가 동박새를 물어뜯은 사실은 이 동물성의 속박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해결책이 정말로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똑같이 생명이지만, 식물은 식물도 먹지 않으니까요.


4. 예술가와 솔깃한 환상

「채식주의자」에서 그랬듯이, 「몽고반점」에서도 영혜는 화자가 아닙니다. 대신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비디오 아티스트인 영혜의 형부인데요. 아내 덕분에 “평생 예술이나 하며 마음 편히”[23]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람은 페미니즘 비평의 표적이 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형부에 대한 평가는 꽤 팽팽하게 갈리는데, 이것은 논자들이 대개 예술계에 몸담은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이유도 일단은 존재합니다. 그가 영혜의 트라우마 해결에 기여했기 때문이죠.

형부는 가족 모임에서 처음 영혜를 소개받을 때부터 그녀에게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24]을 느낍니다. 또 영혜에게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 몽고반점에서 “푸른꽃”[25]의 이미지를 연상하고요. 비록 이러한 직감이 곧바로 성적/예술적 욕망으로 이어지며,[26] 이 역시 그를 매우 껄끄럽고 복합적인 인물로 만들고 있지만, 어쨌든 영혜에게서 식물성을 보는 관점은 꽤 중요합니다. 물과 햇빛만으로 살아가는 식물은 섭생하지 않고도 존속할 수 있으니 말이죠. 실제로, 몸에 꽃을 그리고 나니 “꿈을 꾸지 않”[27]는다는 영혜의 말은 식물이 되는 것만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임을 보여줍니다.[28]

물론 이 작품은 「내 여자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그 실현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서는 꽃 그림이 영혜를 동물성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할 뿐이며, 나무-되기를 희구하는 것은 현실감을 잃은 행보라는 분석도 가능하지요.[29] 반면에 「몽고반점」에서의 퍼포먼스로 트라우마가 치유되었다면 영혜의 정체성도 재구축되어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30] 바로 그 퍼포먼스로 인해 영혜가 꿈에 나오던 얼굴이 “내 뱃속 얼굴”[31]임을 깨달은 이상 섭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질지에 대해서는 긍정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어떤 엇갈림이 바로 「몽고반점」이 「나무 불꽃」으로 이어질 수 있는 동력이 되겠고요.


5. 아집, 혹은 생텍쥐페리

이렇게 해서 영혜는 채식주의를 지나쳐 나무-되기를 갈망합니다. 「나무 불꽃」 역시 영혜의 시점으로 쓰여지지 않았기에 상세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대사에 의하면 이제 무서운 꿈을 꾸지는 않는 듯한데도 그렇습니다. 대신에 영혜의 꿈은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손에서 뿌리가 돋”으며,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는 등의 내용을 보여주는데,[32] 이것은 영혜에게 있어서 일종의 계시처럼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내장이 다 퇴화됐다고” 믿고,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라고 말하며, “햇빛만 있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33] 그러니까, 언니에 의해 “축성 정신병원”[34]에 갇힌 채로 말입니다.

「나무 불꽃」의 화자인 인혜에게 있어서 영혜의 이 같은 지향은 “죽고 싶”[35]은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독자의 눈에도 대개는 그러합니다. 동물이면서 식물이 되고자 한다면 이는 사실상 죽음충동(Thanatos)인 것이죠.[36] 의의를 찾는다면 인간을 비판하고 식물과 연대함으로써 대안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37] 이 경우 영혜는 현실의 모순에 극단적으로 천착하며 그 폭력성을 고발하는 수단적 인물로서 소비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38]

그러나 이러한 접근조차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적이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것은 『어린 왕자』의 결말부입니다. 거기서 어린 왕자가 정말로 고향별에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각자 의견이 있겠지만 구도만 놓고 보자면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쩌면 죽음이 삶의 끝이라는 것이 편견이며, 영혜에게는 죽음조차 식물이 되는 한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39] 혹은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므로 나무가 되기 위해 죽음을 자청했다고도 할 수 있죠.[40] 인혜가 “영혜는 바로 그것, 죽음을 원해온 것 아닐까”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심”을 제기하는 순간,[41] 그리고 영혜가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42]라고 묻는 순간 이 가능성은 부각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일단 영혜보다는 인혜에게 더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6. 남겨진 사람들

「채식주의자」의 화자인 ‘남편’이 거의 옹호받지 못하고 「몽고반점」의 화자인 ‘형부’도 조심스럽게만 긍정되는 반면에, 「나무 불꽃」의 화자인 인혜는 대부분의 경우 화자들 중 가장 큰 공감을 얻습니다. 앞의 둘이 어째서인지 일반명사로 지칭되는 와중에도 인혜만은 이름으로 호명된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죠. 인혜 역시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압박한 가족 구성원들 중 하나였고,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영혜의 퍼포먼스를 파국으로 끝낸 장본인이며, 「나무 불꽃」에서 영혜를 정신병원에 가둔 당사자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일견 어색해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혜는 『채식주의자』의 세 화자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가해자성을 성찰하고, 영혜의 심리를 이해하려 노력한 인물입니다. 이와는 달리 ‘남편’은 영혜와 비슷한 꿈을 꾸었음에도 자신의 가해자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43] ‘형부’는 영혜의 식물성을 꿰뚫어보고도[44] 그것을 자신의 욕망 충족에만 활용했죠.[45] 이것은 인혜가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이라고 고민하며 자신의 책임을 긍정하는 것[46]과는 대비됩니다. 게다가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편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47]라고 생각할 때 인혜는 영혜의 상태를 가장 가까이 통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혜의 숭고함은 그것을 알면서도, 또 본인의 고통 역시 견디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어이 자신의 책임을 찾아 버티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인혜가 오래전부터 성실하고 선한 사람으로 비추어져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48] 그럼에도 “당연한 태도로” 영혜와 이혼하며 “최대의 피해자는 나”라고 주장한 ‘남편’이나[49] 잠적한 뒤로 유일하게 연락했을 때 “영혜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묻지 않”[50]은 ‘형부’보다는 더 나은 태도라고 생각되지요. 인혜가 영혜와 희생자로서 연대하기에 이른다거나[51] 인혜야말로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에 해당한다고 보는[52]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러한 실낱같은 긍정적 가능성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긍정적 측면에 기대를 걸기에는, 『채식주의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지 해결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53]이 너무나 명백하지만 말이죠.


7. 인간문제

그리하여 「나무 불꽃」은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54]보는 인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어떤 갈등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끝나며 이것이 『채식주의자』의 결말입니다. 영혜가 겪었던 그 엄청난 인간의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고작 모성과 책임감에 의지해 현실에 붙들리는 인혜의 사례가 제시되었을 뿐이지요.[55] 이런 마무리는 꽤 공허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매우 혼란스럽고 슬프게 만들기 때문에, 만일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하지 않았더라면 대중적인 평가가 긍정적이지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질문을 잘 하는 것이 답변을 잘 하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고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채식주의자』는 그러한 파문을 이토록 충격적인 형태로 각인시킨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성취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일상의 이면을 들추고 폭력을 적나라하게 펼쳐놓음으로써 인간성에 경종을 울리는 것은 한강 문학의 일관된 기조이기도 하며, 이것이 역사의 무게감과 합쳐졌을 때 산출되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우리는 『소년이 온다』에서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꾸준히 걸어가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점에 와서는 이제 슬픔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셈이고요.

2024

그러나 이렇게 다 읽고도 이 인간문제의 거대함에 질리기 직전인 분들이 만일 존재한다면, 그때에 제가 덧붙일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아마도 며칠 전에는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할 예정이었던 어느 한국 소설과의 [ 상호텍스트성 ] 에 관한 이야기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상호텍스트성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매우 저어되지만, 「채식주의자」에 「내 여자의 열매」의 편린이 남았듯이 이 역시 어느 흔적기관처럼 보아 주신다면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흔적기관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들께서······, 우리를 이유 없이 살육하는 생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이유는 있지. 하지만 네가 말하는 것 같은 너절한 이유는 아니야.”
“그럼 어떤 이유입니까?”
“우리는 너희들을 먹어야 하는 존재로 만들었지.”
“먹는다고요?”
“그래. 먹는 것. 그게 너희야. 그게 생명이지. 모든 동물들이, 식물들이,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먹는다. 먹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지. 우리가 만든 것은 그런 것이다. 너희들이 벌이는 모든 짓거리의 경계엔 큰 글씨로 뚜렷하게 적혀 있지. ‘일단, 먹고 나서’.”
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그와 반대로 시우쇠의 목소리는 점점 차분해졌다.
“산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이지. 일단 먹어야 살아 있는 것이 저지르는 모든 웃기는 일이 가능해지지. 먹지 못하면 소용없어.”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이야기를······.”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야. 륜 페이. 먹는다는 것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외의 것을 파괴한다는 것이지. 그렇기에 바위를 뚫는 낙수는 바위를 먹는 것이 아니야. 바위가 낙수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아니니까. 나무를 찍는 도끼도 나무를 먹는 것이 아니야. 도끼의 유지에 나무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니까. 그것이 먹는 파괴와 보통의 파괴의 차이점이지. 하지만 둘 다 파괴야. 알겠냐? 우리는 너희들을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파괴하는 것으로 만들었어. 하지만 생명은 파괴를 일으켜서 자신을 유지하지. 그런 것을 가리켜 ‘먹는다’고 하는 거야. 무생물은 그렇지 못하지. 낙수가, 파도가, 태풍이 아무리 파괴를 일으켜도 그것은 자신의 유지에는 상관없어. 그것들은 먹는다고 하지 않아. 파괴한다고 할 뿐이지.”
“우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그래서 태우고 찌르고 들이받으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겁니까?”
시우쇠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륜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범죄 같은 것은 없다. 륜. 두억시니가 신을 잃은 것도 범죄와는 관련없어. 하지만 그 질질 흐르는 녀석은 화를 낼 거다. 그게 싫으면 네가 그걸 먹어야 해. 그걸 먹어서 네 누나의 모습을 유지시켜 주라고. 하지만 먹기 싫은 것, 먹으면 안 되는 것은 다른 사람 먹이는 방법도 있지. 그러니 입 다물고 안내나 해라. 그 피라미드엔 네 아스화리탈이 들어갈 수 없을 테니 내가 먹어주지. 네 말처럼 뭐든 삼키는 불인 내가. 가자.”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3』, 서울: 황금가지, 2003, 211-212쪽.)

기다란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1]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245쪽.
[2] 한귀은, 「외상의 (탈)역전이 서사 - 한강의 ≪채식주의자≫ 연작에 관하여 -」, 『배달말』 43, 2008, 292쪽.
[3] 이찬규, 이은지, 「한강의 작품 속에 나타난 에코페미니즘 연구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인문과학』 46, 2010, 49쪽.
[4] 조윤정,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인간의 섭생과 트라우마」, 『인문과학』 64, 2017, 12쪽.
[5]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8쪽.
[6] 한귀은, 「외상의 (탈)역전이 서사 - 한강의 ≪채식주의자≫ 연작에 관하여 -」, 『배달말』 43, 2008, 292쪽; 조윤정,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인간의 섭생과 트라우마」, 『인문과학』 64, 2017, 20쪽.
[7]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26쪽.
[8] 김명주,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피, 섹스, 나무 이미저리 다시 읽기」, 『인문학연구』 121, 2020, 31쪽.
[9]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27쪽.
[10]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9쪽.
[11] 김명주,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피, 섹스, 나무 이미저리 다시 읽기」, 『인문학연구』 121, 2020, 33쪽.
[12]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9쪽.
[13] 조윤정,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인간의 섭생과 트라우마」, 『인문과학』 64, 2017, 8쪽.
[14] 오은영, 「한강의 『채식주의자』: ‘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세계문학비교연구』 59, 2017, 13쪽.
[15]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9쪽.
[16]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21쪽.
[17]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23쪽.
[18] 조윤정,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인간의 섭생과 트라우마」, 『인문과학』 64, 2017, 22쪽.
[19] 한귀은, 「외상의 (탈)역전이 서사 - 한강의 ≪채식주의자≫ 연작에 관하여 -」, 『배달말』 43, 2008, 296쪽.
[20]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36쪽.
[21]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43쪽.
[22] 한귀은, 「외상의 (탈)역전이 서사 - 한강의 ≪채식주의자≫ 연작에 관하여 -」, 『배달말』 43, 2008, 293쪽.
[23]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44쪽.
[24]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78쪽.
[25]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74쪽.
[26] 오은영, 「한강의 『채식주의자』: ‘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세계문학비교연구』 59, 2017, 18쪽.
[27]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18쪽.
[28] 조윤정,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인간의 섭생과 트라우마」, 『인문과학』 64, 2017, 24쪽.
[29] 한금윤, 김용성, 「한강의 『채식주의자』: 인간의 분열과 신의 부재」, 『동서비교문학저널』 48, 2019, 288쪽.
[30] 한귀은, 「외상의 (탈)역전이 서사 - 한강의 ≪채식주의자≫ 연작에 관하여 -」, 『배달말』 43, 2008, 308쪽.
[31]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43쪽.
[32]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80쪽.
[33]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86쪽.
[34]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52쪽.
[35]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88쪽.
[36] 조윤정,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인간의 섭생과 트라우마」, 『인문과학』 64, 2017, 32쪽.
[37] 김선영,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와 까르멘 보우요사(Carmen Boullosa)의 『사라지는 게 더 나아Mejor desaparece』(1987)에 나타난 포스트휴먼변신 서사로서의 ‘식물-되기(becoming-plant)’」, 『이베로아메리카연구』 32(3), 2021, 97쪽.
[38] 오은영, 「한강의 『채식주의자』: ‘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세계문학비교연구』 59, 2017, 22쪽.
[39] 이찬규, 이은지, 「한강의 작품 속에 나타난 에코페미니즘 연구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인문과학』 46, 2010, 62쪽.
[40] 김명주,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피, 섹스, 나무 이미저리 다시 읽기」, 『인문학연구』 121, 2020, 47쪽.
[41]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89쪽.
[42]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91쪽.
[43] 오은영, 「한강의 『채식주의자』: ‘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세계문학비교연구』 59, 2017, 15쪽.
[44] 조윤정,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인간의 섭생과 트라우마」, 『인문과학』 64, 2017, 24쪽.
[45]  오은영, 「한강의 『채식주의자』: ‘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세계문학비교연구』 59, 2017, 18쪽.
[46]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92쪽.
[47]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203쪽.
[48] 한귀은, 「외상의 (탈)역전이 서사 - 한강의 ≪채식주의자≫ 연작에 관하여 -」, 『배달말』 43, 2008, 299쪽.
[49]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86쪽.
[50]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193-194쪽.
[51] 김선영,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와 까르멘 보우요사(Carmen Boullosa)의 『사라지는 게 더 나아Mejor desaparece』(1987)에 나타난 포스트휴먼변신 서사로서의 ‘식물-되기(becoming-plant)’」, 『이베로아메리카연구』 32(3), 2021, 96쪽.
[52] 오은영, 「한강의 『채식주의자』: ‘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세계문학비교연구』 59, 2017, 22쪽.
[53] 조윤정,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타나는 인간의 섭생과 트라우마」, 『인문과학』 64, 2017, 33쪽; 한금윤, 김용성, 「한강의 『채식주의자』: 인간의 분열과 신의 부재」, 『동서비교문학저널』 48, 2019, 295쪽.
[54] 한강, 『채식주의자』, 파주: 창비, 2007, 221쪽.
[55] 한금윤, 김용성, 「한강의 『채식주의자』: 인간의 분열과 신의 부재」, 『동서비교문학저널』 48, 2019,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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