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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4/03 16:11:11
Name   하마소
Subject   우리는 아이를 욕망할 수 있을까
팔꿈치가 아파온 지 2주 정도가 지났다. 마침 업무로 괴로운 주간 끝에 잠깐의 휴식일이 주어져 이 참에 병원을 향한다. 테니스 엘보. 평생 테니스 라켓 따위 손에 쥐어본 일도 없는, 심지어 왼팔로는 더더욱 기회가 없을 내가 이와 마주할 이유는 별로 떠오르는 바가 없다. 최근 들어 자기 주장이 강해진 아이를 안아올려 용변을 처리할 때마다 유독 왼팔에 체중을 실어 버둥대던 모습이라든가, 유아식을 준비하며 한층 더 잦아진 웤 냄비손질로 걸리는 부하 정도 이외에는. 쉽게 말해 직업병이다. 부모라는 직업병. 좋은 아빠라 아프신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너스레에 약간은 멋쩍은 소리없는 웃음으로 화답하고 물리치료실에서 모자란 수면을 취한다. 따끔거리는 팔꿈치에 숙면도 쉽진 않다. 잠이 안들어서 일까, 아까 잠깐 들었던 좋은 아빠라는 단어가 유독 귓가를 긁어대듯 굴러다니며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솜이가 태어난 지 14개월을 향하고 있다. 이전의 삶에선 감히 떠올릴 수 없을 변화들도 이 정도면 몸에 익을 시간인 듯 싶다. 정확한 근태라는 압박감이 덜한 편이라 이따금 정신 못차리고 행하던 늦잠도, 몇 달에 한 번 뿐이지만 할 일이 생각나지 않을 때 몇 시간이고 앉아 늘어지게 감상하던 드라마 시리즈 따위도 그리움을 떠나 별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예전의 행위들이 되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침과 저녁의 함께 하는 대부분의 시간이 제법 긴장으로 가득하기 때문일까. 그래도 저녁은 조금 낫다. 아이를 재운 후에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까. 지각에 무게를 덜 둔다지만 그래도 빈번한 건 어떤 측면에서도 좋을 리가 없다. 어린이집 등원 준비를 조금씩 삐끗하며 지각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히 아침의 긴장감은 조금 더 당기면 끊어져버릴 팽팽함이 된다. 심지어 아이를 비롯한 모두가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을 움직인다는 걸 알고 있기에, 조금 더 부지런하지 못한 누군가를 향한 마음 속 채근은 항상 내게 도착해 있다. 오늘도 부모의 자격을 가까스로 손 끝에서 건져올린 듯 싶은 아슬아슬한 하루가 지나간다.

여러모로 엄살은 좋을 게 없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와, 이를 넘어 우리 모두를 여전히 보살펴주시려 하는 장모님과 장인어른께서 계시고, 정기적으로 혹은 위급할 때 언제나 기꺼이 달려오실 의사를 밝힌 어머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신다. 제법 이른 시기부터 어린이집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솜이의 대견함은 부덕한 애비 입장에선 감사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감히 없을 요소 아닌가. 이러한 생활반경 덕에 우리는, 특히 나는 양육의 많은 영역을 나의 바깥에 뉘이며 기대어 지내고 있다. 업태의 사정 상 신청할 수 없는 휴직계 대신 제공된 주 1회의 재택근무도 환영할 일이다. 그 하루동안 나는 기꺼이 달려오기로 하셨던 어머니의 손길을 요청하여, 어머니께서 솜이를 돌보시는 동안 옆 방에서 업무를 진행한다. 여러 측면을 보더라도 엄살을 부리기엔 너무도 윤택한, 아이를 키우기 위한 많은 요소들이 큰 부족함 없이 채워진 현장이다.

그런 현장 속에서도 아쉬울 일을 꼽다보면 손가락이 모자라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문간 너머 들려오는 솜이의 옹알이와 우렁찬 울음은 즐겁고 제법 재미있는 소리지만 그게 근무시간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다. 집중이 필요한 순간 들려오는 여러 음성들이 그저 유쾌할 수는 없다. 윤택함과 압박감은 별개의 문제라, 잠깐의 소동으로 솜이와 보내고 온 시간과 집중력은 일순간에 압박의 주요한 기제로 돌변하니까. 집안일 같은 것들도 그렇다. 일상의 유지를 위해 다음으로 넘기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일들이 쌓여가며 한정된 시간을 짓누르는 동안 터져나오는 게 짜증인 건 내 부덕함의 표상일 뿐이지만, 그런 부덕함이 단지 모자람의 문제인지 혹은 안고 살아야 할 인격의 문제인지는 한번쯤 더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이를테면 그래. 며칠 전의 일처럼 유아식용 고기를 볶으려 웤을 들어올리다 발생한 통증에 신음을 토하고, 이 때문에 잠들었던 솜이가 깨어나 우는 바람에 순간 발생한 짜증섞인 단말마가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래서 괜찮냐고 묻는다면, 뭐 더 할 말이 있을까.

몹시 괜찮습니다. 이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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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크게 걱정을 했던 때가 있다. 가족계획을 위해 새벽녘부터 사모님과 함께 난임병원을 다니며 고단한 기간을 보내다 드디어 들려온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출산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혹시 내가 우리의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종종 나를 크게 짓누르는 문제였으니. 다행히 솜이의 첫 모습과 마주하자 마자 크게 터져나온 울음과 함께 이 걱정은 없던 게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가끔은 그 순간의 걱정을 비록 먼 발치에서지만 바라보곤 한다. 혹시, 우리의 아이가 내게 있어 그만큼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 존재가 아니었다면 나는 얼마만큼의 무게감을 발등에 실어 움직일 수 있을지. 때때로 양육과 함께 하는 일상이 제법 무겁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이 타인의 걱정일지 모를 무언가를 끄집어 올리곤 한다. 혹여 조금 더 준비가 미흡한, 정돈되지 못한 삶 속에서 맞닥뜨린 이 놀라운 존재 또한 지금과 같은 그대로였을지.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은 정돈이라는 관념과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며, 이는 행복과 별개의 문제이다. 문명과 기술의 발달이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만, 이는 현재로선 주어지는 것보단 획득하는 것에 더 가까운 듯 싶다. 효율과 효용을 위해 시간을 분 단위까지 통제하여 활용하는 행위가 내면화되면 동일한 시간을 더 빠른 템포로 감각하게 되니까. 육아는 정확히 이의 대척점에 존재한다. 내가 아닌 타인을 돌본다는 행위가 으레 그러하지만, 그 대상이 자기 제어가 어려운 아이라는 건 통제엔 더없이 치명적 요소일테니. 쉬이 말해 아이와 함께하는 동안의 나의 시간은 반사적인 수행 정도가 전부일 뿐인 가장 느린 템포의 시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를 미지의 상황과 마주할 수 있으니까. 앞서 언급한 가장 큰 걱정의 요인은 이 지점에 있었다. 여러 요소 - 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능력 - 로 형성된 물리적 또는 정신적 부채로 인해 전력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살아있던 내게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내 시간이 늘어난다는 건 아마도 공포와 비슷하기도 했으니.

단순히 휘발적 유희 따위로 표상되는 다른 즐거움이 많아서, 로 넘기기엔 양육이란 행위에 투영되는 거부감 중 공포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흘려넘기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로 여기는 점들이 윤택함을 전승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관이겠지만, 당장 내게 닥칠 위해 - 로 여겨지는 것들 - 또한 그 공포의 대상이 되긴 어렵지 않다. 어느 사회든 그러하겠지만, 우리 사회 또한 같은 자리에서 '더' 나은 존재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더'를 위한 의지를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할 수 있는 이상향. 그런 '더'를 위해 중시되는 건 여러 요소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이 자기통제성의 영역으로 귀결된다. 내 모든 시간과 자원이 근면을 향해 열려있음을 덕목으로 하는 사회상. 단순히 노동시간을 최대화하는 게 아닌, 내 남겨진 모든 시간이 나를 상승하게 만들며 강한 관성으로 나를 붙들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게 덕목인 세상. 이러한 세계관에서 양육을 비단 삶의 연속된 과정으로만 여김이 아닌 올곧아야 할 선로에서의 이탈로 여기는 이들이 발생하는 걸 비난할 수 있을까. 통제력을 향한 그 어떤 부침도, 또는 시간의 공백도 결손으로 평가될 수 있을 냉엄함이 여전히 - 혹은 더욱 - 통용되는 이 시대에.

솜이의 탄생과 맞물려 들어온 환담들 가운데 마음을 어지럽히던 몇 마디들이, 이를테면 남편된 내 입장에선 육아에 대한 물심 양면의 할애를 대폭 줄이고 생업에 매진해야하며 이게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자세 - 를 부연하기 위해 심지어 신생아 시기에 남편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는 첨언까지 들어가며 - 일 거란 이야기였다. 2020년대에 조차 이러한 언사를 덕담의 형식을 빌려 건넬 수 있다는 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마도 사회인된 자격인 자기통제력의 유지를 촉구함이 발화의 숨은 의미임을 생각해본다면 양육이란 행위가 사회적으로 내면화된 형태 또한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세상에 아이를 키워내는 것만큼 가치있는 일은 없으리라는 명제엔 - 드디어 부모의 입장이 되고 난 이후라 하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 동의하는 바이지만, 개인의 존엄을 가치의 총합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나의 삶이 어느 한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닌 것처럼. 하물며, 우리 사회의 준엄한 이성이 아이를 그토록 가치있는 존재로 여겨오긴 했을까.

충동적이며 자기통제력이 없는, 그래서 - 발화자 자신이 행사해야 할 필요가 있는 - 외압에 의한 외부적 통제가 필요한 우리 바깥의 타자, 정도가 아이라는 존재를 향한 단면으로 여겨지는 언사는 어디서든 목격할 수 있다. 비단 혐멸의 물결과 함께 하는 2020년대만이 아닌 이번 세기 전반을 위시한 언어에서. 어리석은 어린 존재들을 향한 희화화는 필시 지난 세기 말부터 횡행했으며, 초글링, 개린이 따위로 드러나던 집단적 타자화의 결과물 또한 제법 오랜 시간 형성되어온 작품들인 점을 떠올려본다면. 최근의 심각한 출생 실태로 인해 아이를 소중히 하자는 언사들이 표어마냥 역설되고 있긴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이 모범적 현대인의 습속과 맞닿아 있는 지는 지금도 의문스럽다. 여전히 아이와 그의 주양육자를 위시한 이미지를 진상, 촉법, 도로 교통의 무법자 등으로 연결지어 소비하는 사례에는 의도 없는 한두번의 클릭미스만으로 충분히 도달할 수 있으니.

심지어 개인의 내적 완결성을 유지 혹은 확보하기 위해 문제시 되는 가족 구성원 - 특히 양육과 관련된 무게감의 주체들 - 을 이른바 '손절'함이 위기의 개인을 향한 해결책으로 버젓이 제시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양육이란 행위와 아이라는 개체는 중심 담론의 주체로부터 철저히 타자화 되어있음을 뼛 속 깊이 되새기게 만든다. 그러니, 지난 수 년에 걸쳐 반복되어온 저출산과 출생 인구 감소를 향한 사뭇 냉철하고 논리적인 의견 교환 또한 그저 준엄한 언사로 타인을 꾸짖는 현상 바깥의 심판관이 전유함에 불과한 것 아닐까. 물론 당사자들에게 있어 그런 참혹한 발언은 고작 현실 사이에 오르내리지도 못할 한 줌의 사어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따금 그런 언사의 주체들이 나와 우리 가족, 또는 우리 아이를 향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 꽤 지근거리의 존재가 아닐 지에 대한 우려를 갖는다. 최소한 그런 준엄함의 표상들은 체제 바깥의 삶을 표명하지 않은, 누구보다도 정상인인 자신을 과시하려 드는 이들로부터 등장한 흔적들이었으니.

이러한 우려의 여지들과 대면하면서도, 약동하는 생명체를 바라보는 마음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정돈을 되찾을 즈음 둘째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하는 희망을 사모님과 함께 품어보며 앞으로의 나날을 마음 속으로 구상해본다. 구상의 경과는 난항이고, 결론은 우려스럽다. 언제나 마음을 가장 무겁게 만드는 요소는 가족의 계획이 가족 내에서 완결성을 지닐 수 없다는 점이니까. 우선 떠오르는 각자의, 우리의 부모님들. 다시 비슷한 행위와 시간을 - 그리고 이를 좀 더 무거운 형태로 - 반복해야 한다면 이는 그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될까.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행복하고, 그래서 언제나 조금 더 안아보려 하고 그 시간을 더 길게 하길 원하는 당신들임을 알지만 그 뒤에 온전히 드러난 고단함과 통증을 모를 수는 없다. 그런 그분들께 양육의 부담을 되풀이하는 건 안온하길 바라는 당신의 황혼기를 얼마나, 그리고 어떤 형태로 잠식하게 될지. 또한 그로 인해 등장하는 부채감을 우리가 얼마나 떳떳히, 혹은 부끄럽게 짊어질 수 있을지. 이를 짐작하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다.

잠깐이지만 집안 외부의 손길을 빌렸던 기억을 솔직히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건, 당시 내내 느꼈던 감정은 위태로움이었기에. 애초에 '내 아이라 생각하고'라는 수사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는 잘 알고 있기에 개인으로서의 타인에게 이를 기대하지도, 부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와 별개로 가장 연약한 존재를 심리적으로 먼 존재와 마주하게 할 때 생겨나는 의구심이 걷힐 방도가 없다면, 그게 그 전역을 위해섞인 감각으로 아우를 것은 자명할 터.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위기감과 마주하게끔 만드는 표현과 언사들을 마치 꼭 들어줬으면 한다는 듯 풀어내는 건 그저 빨리 그만두고 싶던 입장의 대변이었을까, 아니면 실제로 불안한 신상과 정서를 드러내는 방식이었을까. 어떤 연유인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지만, 그 기억들이 전하는 바는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랬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을 우리와 입장이 흡사하지 않은 온전한 타인 한 둘의 - 물론 금전적 보상이 따르지 않을 리 없지만 - 선의에 오롯이 기대는 방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향할 수 없는 선택지임을.

물론 가까운 답 또한 존재하리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있는 이른바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를 향해 온전히 헌신하는 것. 다만 어떤 측면에서 이는 나와 너라는 개인, 나아가 우리의 생존의 근간을 오롯이 타율에 일임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삶의 근간이 내 손을 떠난다는 건 영원이란 단어를 약속하는 다짐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되는 현대사회에 있어 더욱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기에 이미 이를 착안한 이들에게 이따금 떠오르는 공포감마저 소거시킴을 명하는 건 어려운 일일터. 더욱이 요즘처럼 믿음을 구축하려는 언어보단 영원따위는 사치스러운 위선에 불과하다는 언어들만이 즐비한 세상이라면 더 큰 어려움이 뒤따르겠지. 물론 이를 스스로의 입장에서 선택한다는 건 나름의 커다란 결심을 이행함이며, 내딛은 한발짝에 보낼 응원 또한 지속되길 바라지만 그게 우리 자신에겐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어떻게든 지금의 관성을 이탈하고 싶진 않다는 마음은 우리 서로, 모두에게 커보인다.

어쨌든, 어떤 선택을 하든 양육의 품을 일정부분 가정의 바깥에 이양하는 건 필연적이다. 행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부담까지도. 물론 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사용하지만 이를 일컫는 볼멘 소리와 위압적 기운을 막아세우는 것까지 권리가 보장되어 있진 않고, 이는 실제로 솜이와 함께한 첫 해를 꽤 짙게 아우르던 위태로움이었다. 공백에 대한 위기감을 극복하는 건 스스로가 짊어질 숙명일테지만, 그리 은밀하지도 않은 무형의 외압이 이 위기감에 한층 더 무게를 싣는 현장마저 숙명에 내재한 극복의 대상인지는 모르겠다. 일순간에 출산장려를 위한 캠페인이라도 공중의 뇌리에 새겨진건지, 언젠가부터 주변의 수많은 이들이 마치 약속한 듯 같은 이야기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제법 듣기 좋은 말이지만, 이따금 이 문장을 공유하는 몇몇 발화자들의 지향점을 보면 의아함 또한 자연스레 피어난다. 타인의 양육과 관련한 품이 결코 현재의 영역으로 새어나오지 않길 바라는 이를테면 통제에 기반한 발전 지향적 시선의 소유자들에게서 마을이란 단어를 들을 때의 그 의아함. 그 마을을 온전히 관찰의 영역이자 전시와 박제의 대상으로 명명하는 이들을 향해 때로는 그 마을의 주민이 누구들인지를 물어보고픈 충동에 빠진다. 최소한 그 마을이 구분없이 살아가는, 우리일 수 있는 집단을 의미하는 건 아닌 듯 보이기에.

이러한 현재를 보내는 우리는, 과연 떳떳이 아이를 욕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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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아지고 솜이의 행동력이 늘어나 외출 반경을 늘리려는 중이다. 주말만 되면 어디를 갈지 계획하는 것도 제법 즐거운 일이다. 머리는 조금 아프지만. 주로 수유실이 잘 갖춰진 대형 쇼핑몰을 이용하는 편인데, 그러다보면 갓 성년이 된 듯 보이는 젊은이들도 제법 볼 수 있다. 그리고 솜이와 마주한 그네들은 예상외로 눈맞춤과 가벼운 손인사를 기본으로 하는,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에 적잖이 놀라게 된다. 내가 저맘때는 어땠더라. 문득 20대 때의 나와 내 주변을 떠올리며 쓴 웃음이 났다. 혹시라도 방문하려던 가게에 아이들 여럿이 있는 모습을 보면 냉큼 발길을 돌리며, 통제가 필요한 공간에다 아이들을 방치하는 양육자의 무책임함을 성토하는 언사 또한 주변에선 흔한 음성이었으니. 아마 그 음성의 주인들 중 하나에 나도 있었으리라. 돌아보는 자신의 과거는 부끄럽지만, 이를 현실로 환원하면 크게 어쩔 수는 없을 일이다. 나로부터 유리된 영역을 향한 무심함은 이따금 개별자들의 특권이 될 수 있으니. 그래서 요즘의 기운은 사뭇 반갑다.

북적이는 식당에서 익숙하게 아기 의자를 가져와 가족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데, 여느 평범한 하루와 다를 바 없이 갑자기 솜이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이유는 있겠지만 솜이만 아는 비밀이겠지. 식당의 평정을 위해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얼른 안아들고 밖으로 탈출한다.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실례한다는 눈빛을 보내는데, 의외로 돌아오는 시선은 웃음기들 가득. 조금은 누그러진 당혹감으로 솜이를 토닥이며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며 이따금의 시선들은 우렁찬 울음소리 속에서도 거의가 따스하다. 솜이도 그걸 알아챘는지 그제서야 시끄럽던 아우성이 가라앉는다. 이런 별 것도 아닌 온기들이 사모님과 나, 양육자의 입장에선 세상과의 연결감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동하는 세상과 함께라는 그 감각을 향한. 그저 풍족한 보상과 정지된 시간선으로의 유리를 동시에 기획하려는 심도깊은 발화들에 담긴 음험한 의지 따위보다 훨씬 더 크게. 아직 한참 멀었지만, 직접 맞닿는 세상은 이제라도 조금씩 아이들의 눈높이가 어디즈음인지 살피기 시작하는 듯 싶다. 잔뜩 구겨 깊숙히 숨겨둔 욕망이긴 하지만, 아직 폐기할 필요까진 없을 것도 같다. 우리가 조금씩 더 강해지는 것만으로도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을, 이런 세상의 따스함과 마주할 때엔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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