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월드컵이 끝난지도 1년 여가 넘은 지금, 본디는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 시절에 벤투가 잘 했건 못 했건 이제는 다 부질 없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도 벤투의 축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남아, 한국 축구의 앞날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벤투호를 뒤돌아 보는 것은 늦었으되 늦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벤투가 감독을 하는 4년 내내 가장 많이 들렸던 단어가 '빌드업 축구'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벤투의 축구를 두고 숏패스로 공격을 전개하는 축구라고 생각했지요. 벤투를 비판할 때에도 이를 공리로 삼아서 빌드업 축구=바르셀로나 흉내내는 축구=한국 수준에는 탁상공론인 축구라고 하거나 더 나아가서 '바르셀로나 축구는 두 줄 수비의 등장 이후 힘을 잃은 철지난 축구인데 왜 그걸 이제서야 따라하냐' 라는 주장마저 있었지요. 물론 저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벤투가 잘 하는 거 같긴 한데 이거 월드컵 본선 가서 써먹을 수 있나? 우리가 쟁쟁한 강팀들하고 어떻게 중원 대결을 하느냐?' 라는 불안함이 축구팬들에게 짙게 드리워져 있었지요.
그렇다면 한국의 월드컵 경기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줬다고 하는 우루과이전의 빌드업은 어떠했을지,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미드필더들의 기량을 보완할 벤투의 해법은 무엇이었을지 검증해봅시다.
1. 짜여진 롱패스는 운에 기댄 뻥축이 아니다.
4. 이 세상에 '빌드업 축구'는 없다.
“저는 티키타카가 싫어요. 항상 그럴 거예요. 제가 더 이상 티키타카와 연관되지 않으면 좋겠어요. 티키타카는 쓰레기고, 만들어진 표현이죠. 그건 패스를 위한 패스를 한다는 뜻인데, 목표도 없고 공격성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요. 저는 제 훌륭한 선수들이 그런 쓰레기 짓을 하는 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펩 과르디올라.
빌드업이란 쉽게 말해 안정적으로, 공격하기 좋은 상황을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결코 숏패스 위주의 공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 축구에서 빌드업이 주로 '숏패스의 형태로 구현' 되는 것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확률 높은 방법이라서 그렇습니다. 10m 앞에 있는 자유로운 상태의 동료에게 패스하는 것이 50m 밖에서 수비수와 경합하고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성공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거든요. 그러니 안정적으로 성공만 한다면 롱패스건 드리블이건 훌륭한 빌드업입니다.
그 누구도 '축구형 축구선수' '발로 공을 차는 것이 특징인 축구선수'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축구 안 하는 축구 선수나 손으로 드리블하는 축구 선수들이 존재하지 않는 한, 저런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빌드업 축구 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빌드업이 없는 축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축구는 딱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손흥민의 번리전 득점처럼 에이스가 공을 잡고 골대에서 골대까지 상대를 모조리 제치고 득점하는 것을 주요 전술로 삼는 축구지요. 이건 게임에만 존재합니다. 다른 하나는 최소한의 약속된 움직임이나 간격 유지도 없이 무조건 공을 뻥뻥 차면서 요행히 동료가 잡아주기를 바라는 축구입니다. 이런 건 조기축구에서도 안 합니다.
흔히 펩 시절 바르셀로나의 축구를 숏패스 축구라고 하면서, 두 줄 수비와 압박의 발전으로 쇠퇴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수비수와 골키퍼에게 요구되는 패스 능력치는 높아지고 있고, 하위권 팀들조차 상대의 압박을 패스로 풀어내려는 노력을 합니다. 압박은 다름 아닌 펩 바르샤의 전매특허였지요. 촘촘하게 간격을 유지하면서 공을 빼앗겨도 다시 빼앗아 오고, 공에 관여할 수 있는 선수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강함의 비결이었지요.
축구 전술의 발전은 언제나 한정된 인원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펩 바르샤도 시메오네의 AT도, 내놓은 방법이 다를 뿐 똑같은 고민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벤투의 빌드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월드컵 예선에서는 한국이 강팀의 입장이었고, 상대는 내려앉아 수비를 우선했지요. 이런 환경에서는 상대적으로 한국이 롱볼을 전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어떻게 내려 앉은 상대를 공략할 것인가, 이란 같은 강팀이 압박을 걸어올 때 어떻게 이를 풀어나갈 것인가가 주요 화두였고 그 답이 주로 숏패스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실 롱패스를 활용한 좌우 전환은 아시아 예선에서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월드컵 본선이 되어 약팀의 입장에 서자 상대적으로 롱볼이 대두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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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이 글에서 나타난 것들이 벤투의 특징인가?' 하면 사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필요한 때, 필요한 공간에 필요한 만큼의 선수가 있어야 한다는 현대 축구의 당연한 공리를 풀어낸 결과물입니다. 다시 말해 현대 축구의 기본인 조직적인 전술, 약속된 움직임, 공간의 활용 등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썼을 뿐입니다. 이건 벤투 축구가 아니라 평범한 현대 축구입니다.
헌데, 최근까지도 '빌드업 축구' 라는 이름 하에 위에서 언급했던 현대 축구의 기본적 공리들이 '벤투식 축구' 라는 이름으로 싸잡혀 '안 지켜도 상관 없는 선택지'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일본은 패스 축구, 한국은 피지컬 축구' 라는 말과 함께 일본은 피지컬 롱볼로 잡아야 한다. 일본 흉내내면 안 된다' 라는 말까지 있는데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 말은 한국에게 영원히 세계 축구의 주류에서 멀어지라는 말과 다름 없습니다.
벤투식 축구가 무엇이건 간에, 그 어떤 축구를 하건 간에, 축구는 전술이 있어야 하고 그 전술은 안정적인 수단의 연속을 통해 득점 확률을 높이는 형태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한 전술이 부재한 축구, 개개인의 역량에 의존하다 못해 개인의 기량조차 깎아 먹는 축구를 가리켜 '자유 축구' 라고 부르는 것은 '무법천지'를 '자유의 땅' 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중요한 건 단순히 벤투가 잘 했냐 못 했냐가 아니라, 벤투가 남긴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 가지, 개인의 기량에 의존하거나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는 수동적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강팀과도 충분히 맞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벤투는 입증해 보였습니다. 저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벤투와 함께 한 4년이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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