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3/06/01 12:59:03
Name   아파
Subject   서울에 아직도 이런데가 있네?
딜하는사제가 내 자취방 건물 초입에서 혼잣말을 했다.
누가 들으라고 한 얘기도 아니었지만, 작은 목소리도 아니어서 나머지 세명 모두가
허허. 그러네?
난 지방촌놈이라 몰라요. 여기 처음 놀러와 보네요.
아, 방 구하는데 괜찮은 방이 없더라구요. 학교 개구멍이랑 가까운 데가요.
라고 한 마디씩 보태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술에 취해 있었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입던할 땐 짬푸 해야죠, 짬푸)을 하면서 반지하 건물 계단을
점프하며 내려갔다. 크르르는 오바이트를 하러 화장실로 직행했고, 조따아파는 생수를 꺼내서 홍해전사에게
물을 따라줬다. 딜하는사제도 한잔 달라고 하여, 남은 컵 하나로 한잔 줬다. 조따아파도 목이 말랐지만, 컵은
두 개 밖이고, 오프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생수 통 채로 입대고 마시기도 싫고, 컵이 두개밖에 없다고
들고 마시는 컵을 다시 달라기도 하기 싫었다. 생수 통을 냉장고에 넣으면서
아 술을 많이 마셔서 목이 안마르네.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자연스러웠어 라고 생각했다. 이미 3차까지 진탕 마시고 왔지만, 집에서 뭐
시켜서 마지막으로 마시자고 딜하는사제가 제안했다. 조따아파는 집돌이였지만, 누가 나오라고 하면 꼭
자기가 먹을 거 계산할 돈과,  혹시나 모르니 회식 자리 비용 한 번 정도 낼 금액은 들고 다녔다. 그런데 오늘
벙개모임에서 이 좁은 방에 네 명이나 자게 되는 엔딩이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자신이 오늘 오프의 호스트가
된 거 같다는 생각에,
네네. 24시간 하는 음식점 몇개 알아요. 난 아무데나 상관 없는데, 홍해씨는 괜찮아요? 배 안불러요?
선택권을 홍해에게 토스했다. 지갑에 남은 돈은 일, 이만원 밖이었고, 유일한 체크 카드도 잔고가 바닥인 게
만취 상태의 조따아파 머리에 찌릿하게 기억이 났다. 홍해는 해맑게 미소 지으면서 여까지 걸어오면서 배 다 꺼졌어요~
잔치음식 함더 깔죠~ 생선통구이 없나요? 크크
하며 웃어 재꼈다.
크르르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자빠졌다. 반지하인데, 원룸 안 화장실은 큰 계단 2개 위에 있어서,
술취하면 나오면서 넘어지는 손님들이 많다. 크르르는 머리부터 바닥에 박았는데, 조금 아팠는지
존나아프네 아야.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러자 홍해전사가
여기 조따아파님 있는데, 조따아프다고 해야죠 욕을 하면 어떻게 해요?
하니, 전부다 크게 웃는다. 조따아파는 뭘시켜야하나, 계산은 어떻게 해야 하나 속이 타느라 웃긴 했지만, 웃음소리가
크게 나오진 않았다.
24시간 중국집있는데, 거기 시킬까요? 몇 번 먹어봤는데, 괜찮더라구요.
딜하는사제에게 물어본다. 몇 달 동안 게임 안에선 몰랐는데, 딜하는사제만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형님이었고,
나머지 셋은 동갑이었다. 자연스레 연장자인 딜하는사제에게 의견을 물어보게 되었다. 딜하는사제는
아, 좋죠. 고량주도 하나 시켜줘요. 나 현금 없는데, 카드되나 물어 봐줘요.
대충대충 대답했다. 조따아파는 크르르랑 8년지기 친구니, 이놈 지갑 좀 빌려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문을 했다.
우리 아파님 컴퓨터에 뭐가 있나 좀 볼까요?
홍해전사가 조따아파 컴퓨터를 켰다.
조따아파는 남자 끼리만 있으니 크게 부끄러울 건 없지만, 기타 폴더는 안 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2인용
상을 폈다. 홍해전사는 컴퓨터를 켜자마자 와우 접속하면서 부캐를 키웠다. 요그사론 첫 킬기념 즉흥오프였고,
1,2,3차 내내 와우 얘기를 했는데도, 남의 컴퓨터를 켜서, 와우부터 하는 와창이다. 홍해는 부캐를 키우면서
이케릭이 미미론하드에 좋을 거 같아요.
와우얘기를 하자, 막혀있던 봇물 터진거처럼 다시 와우 이야기가 네명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밤 4시가 넘었고,
아침부터 12시간 넘게 레이드를 하고, 밤새 술을 마셨지만, 4명의 게이머들은 피곤함이 없었다. 끝없는 와우이야기를
하다가 배달이 와서 흐름이 끊겼다.
홍혜? 오 내 전사이름이랑 똑같네요? 이런 우연이 크크
홍해가 쇠젓가락 포장지에 붙은 이름을 보고 킥킥거린다. 조따아파는 크르르에게 눈짓으로 니가 내라. 내 돈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부랄친구 크르르는 당황한 눈빛이 돌더니,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면서
어, 카드 됩니꺼? 현금이 다 떨어지뿟네.
쭈뼛거리며 배달원에게 다가갔다. 배달원이 살짝 짜증 내면서
전화 할 때 미리 말했어야죠. 라고 하자, 전화를 걸며 안 물어본 조따아파가
식은땀을 흘리며 2만원밖에 없는 자기 지갑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딜하는사제가
아 현금 저 있어요. 잔돈이 없어가지고...
지갑을 열며 10만원짜리 수표를 건넸다. 언뜻 보기에 지갑엔 흰색 수표가 십 수장에 빳빳한 만원짜리 몇 장이 보였다.
다행히 배달원은 잔돈이 있었고, 4만원을 거슬러줬다. 크르르는 내가 해 볼거라며 홍해의 기사를
키우고 있었고, 나와 홍해는 세팅을 시작했다.
요즘엔 방에서 담배펴도 되요? 입구까지 멀던데, 담배피면 반지하라 환기 안되지 않나?
나 자취한지가 오래되서 궁금하네요.
딜하는사제가 물어봤다. 아마 술자리에서 홍해랑 크르르가 담배태우러 나갈때 나도 따라나가서
담배태우는 줄 알았나보다.
아.... 환기 아마 될껄요? 저는 담배안펴서요.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니,
아파님 담배태우는줄 알았네. 그럼 홍해님이랑 크르르님 담배태우고 와요. 술자리 나랑 아파님이 차려 놓을테니까.
나가는 길에 술잔이랑 안주거리도 좀 사오시고.
흡연자 두 명에게 심부름을 보내고 조따아파와 딜하는사제는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조따아파는 속으로 손님들
대접을 자기 돈으로 못해서 미안한 마음과, 딜하는사제가 시키는 이것저것이 약간 불편해졌다. 술자리는 해 뜰때까지
이어졌고, 6시가 넘어서야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조따아파는 11시 수업을 들어야 해서 10분전에 일어나서
이도 안닦고, 옷도 그대로 학교로 향했다. 크르르가 뒤척이면서 일어나는 눈치였는데, 아침해장도 조따아파가
차려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크르르를 슬쩍 깨우면서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선 출석체크만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들 일어나서 세수하면서 컴퓨터 한대로 와우를 하고 있었다. 어제의 흥분은 4명 모두에게
몇 년 동안 가장 큰 그것이었다. 만 하루가 지나도 네 명이서 뭔가를 하려 했다. 일단 해장을 하려고 흑석동
해장집을 검색했다. 몇 군데 있길래 일단 반지하 집을 나섰다. 조따아파는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거 같았다.
이동하면서 메뉴통일이 돼질 않아서, 20분 넘게 토론하다가, 닭도리탕으로 정했다. 아점해장을 하면서도 해장엔
뭐가 더 좋은 지에 대한 의견이 좁혀지진 않았지만, 식후에 피시방을 가는 건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요그사론을 잡은 4인의 용사들은 25인 공격대를 짜볼까, 10인 공격대를 하나 더 짤까를 고민하면서
피시방에서 와우를 저녁까지 즐기다가 파했다.
다음주에도 또 요그사론을 같이 잡자고 다짐하면서.


앞 타이어 1짝을 교체하려고 스피드메이트에 왔다. 한 시간 넘짓 걸린다길레, 백화점 스벅에 와서 돌체라떼를 마시며
하스스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타이어 뒤쪽도 너무 많이 갈라져서 교체하는게 좋겟다고 한번 보시고 판단하시라고
전화가 왔다. 차는 전혀 문외한이라 누구랑 같이 올껄 후회가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차를 잘
아는 사람은 종회형밖에 없었다. 몇달전에 청담동에서 거의 15년만에 우연히 만난 딜하는사제 형. 정비소에 도착해서
뒷타이어를 보니 금이 간거 같다. 잘 모르지만 아는 척 할 필요도 못느껴서 그냥 4개다 교환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 오래는 안 걸린다길레, 사무실 옆에서 앉아 기다린다니, 4구 전기난로를 켜주셨는데, 발끝이 뜨거울
정도로 따뜻하다. 하스스톤이나 더 할까하다가 와우인벤 들어가서 와클 소식이나 읽는다. 백화점 실외주차장
가까운 정비소라 춥긴한데, 바람은 안불고 난로도 따뜻하니, 인벤 보다가 잠이 들었다.

청담동에 아직 이런 촌놈이 있네? 아니, 이게 누구신가?
하며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날 부르는 딜하는사제는 50넘은 아저씨였다. 15년만에 우연히 만난 종회형은 매우 수척해져
있었다. 사촌누나 가게 들른다고 오랫만에 서울나들이 중이었는데,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어? 행님?
하니, 낄낄거리며 나를 놀렸다. 서울서 10년 넘게 살았어도 사투리는 티가 나나보다. 종회 형은 예전 그대로였다.
15년 전엔 자영업 하다가 말아 먹고 지금은 청담에서 건물 몇 개 물려받아서 임대업만 하고 있단다. 종회 형은 말투도
그대로였다. 세상은 그대론데, 내가 변했는가, 종회형이 말은 시니컬하고, 깔보는거처럼 해도, 실제론 엄청 배려심이
깊고 괜찮은 사람인 게 15년 더 나이 먹은 내 눈엔 보였다. 15년 전엔 내가 왜 몰랐을까. 종회형 만난 김에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씩 하면서 근황토크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23년지기 내친구 수종이 이야기, 우리 메인탱이었던 홍해 이야기.
짜식이 지 본명에 전사 붙여서 타우렌전사를 하냐. 촌스럽게. 크크. 근데 홍해는,

갑자기 잠이 깼다. 발끝이 너무 뜨거워서 깬 거 같았다. 4구난로에 위쪽 2개가 꺼져 있었다. 자다가 내가 너무
뜨거울 까봐 직원 분이 꺼주신 걸까. 아래쪽 2개는 붉그스름 하게 빛났지만 위쪽 2개 직사각형은 회색으로 꺼져 있다.
왜 이런 꿈을 꿨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왼쪽 아래 열구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 종회 형 생각나네... 다같이
두 번째 요그사론도 잡자고 했었는데, 종회형이 일이 생겨서 두세달 접속을 못하다가, 그 이후엔 내가 어학 연수를
간다고 와우를 못했었던 기억이 난다. 같이 리치왕까지 잡고 싶었는데...
눈앞이 뿌얘진다. 눈물이 갑자기 왈칵 치솟았는데, 이런 격정적인 감정이 낯설다. 처음엔 왜 우는 지조차 모르겠는데,
눈물이 너무 많이 나오니까 짜증이 났다. 새끼 손톱보다 더 큰 눈물 방울이 빰을 지나 패딩에 떨어졌는데,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커서 내가 놀랄 정도였다. 급하게 고개 숙여 손목으로 양눈을 막았다. 눈을 감고,
눈을 막으니 꿈에서 봤던 종회 형이 말하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젊은 날 우리 넷.
수종이는 토토에 빠졌다. 몇백, 수천씩 나와 주변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연락이 끊어졌다. 나쁜새끼...
홍해는 자살했다. 사업을 하다 동업자였던 여자친구한테 사기를 당했단다.
종회 형은 췌장암 4기란다. 병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건물이랑 집 정리하고 둘러보려 나왔다가 나를 만났단다.
눈을 뜨자 깜빡거리던 열구가 꺼져 있다. 이제 열기가 있는 열구가 하나밖에 없었다. 거짓말 같이 눈물이 멈췄다.
눈물을 너무 흘렸나보다. 볼 전체가 젖었다가 닦아서 피부가 너무 땡겼지만,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직원 분한테 볼일이 생겨서 두 시간 뒤에 차를 찾으러 오겠다고 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달렸다. 컴퓨터를 켜고
배틀넷 앱을 켜서 와우 클래식을 삭제했다. 요금제가 4달 남았다고 되어있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리치왕 잡아보고
싶었는데... 지금 와우를 지워야만 할 거 같았다. 흘려버린, 아니, 내뿜어 버린 내 눈물들은 평생 다시는 못 볼
전사와 사제와 술사 친구들을 위한 것이었고, 이제는 정말 지워야만 하는 내 젊음이었다.
평생 잠꼬대 외에 혼잣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집을 나서며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뭐, 컴터에 아직도 이런 게임이 있네.


R.I.P.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6-11 16:5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4
  •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는 동안은 그 빛이 남아 있겠지요.
  • 힘내십시요...
  • 그래도 빛났으니까
  • 여운
이 게시판에 등록된 아파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28 일상/생각'편 가르기'와 '편 들기' 17 소라게 17/05/12 6595 25
361 꿀팁/강좌사진찍으러 갈까요? 22 사슴도치 17/02/07 7941 25
210 기타아들이 말을 참 잘합니다. 37 Toby 16/05/30 6576 25
1352 역사정말 소동파가 만들었나? 동파육 이야기. 13 joel 24/01/01 2528 24
1332 일상/생각나의 은전, 한 장. 6 심해냉장고 23/09/30 2758 24
1305 창작서울에 아직도 이런데가 있네? 7 아파 23/06/01 4408 24
1246 과학이번 카카오 사태에 가려진 찐 흑막.jpg 코멘터리 18 그저그런 22/10/25 5140 24
1241 기타대군사 사마의 감상. 나관중에 대한 도전. 10 joel 22/09/30 3864 24
1152 일상/생각헌혈하는 것의 의미 9 샨르우르파 21/12/14 3947 24
1116 정치/사회동북아에서 급증하는 무자녀 현상 (부제: 초저출산이 비혼'만'의 문제인가?) 23 샨르우르파 21/08/13 6050 24
1101 역사왜 작은 어머니를 숙모라고 부를까. 24 마카오톡 21/06/30 5550 24
1098 기타한국 만화의 이름으로. 고우영 수호지. 15 joel 21/06/15 5597 24
1065 정치/사회수준이하 언론에 지친 분들을 위해 추천하는 대안언론들 20 샨르우르파 21/03/03 8209 24
1058 문학오늘부터 5월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는 20 순수한글닉 21/02/04 5027 24
1054 일상/생각내가 맥주를 마실 때 웬만하면 지키려고 노력하는 수칙 52 캡틴아메리카 21/01/21 6700 24
1013 일상/생각나는 순혈 오리지날 코리안인가? 50 사이시옷 20/10/05 6540 24
971 정치/사회그냥 이야기 12 Schweigen 20/06/16 4585 24
916 창작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5 작고 둥근 좋은 날 20/01/29 6527 24
827 과학블록체인의 미래 - 2018 기술영향평가 보고서 2 호라타래 19/07/03 7180 24
765 일상/생각돈이 없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 10 The xian 19/01/31 7494 24
717 철학/종교은탄환의 딜레마 15 메아리 18/10/16 7684 24
713 일상/생각햄 버터 샌드위치 30 풀잎 18/10/13 7572 24
623 일상/생각선배님의 참교육 12 하얀 18/04/29 7507 24
618 기타황구 출현 이틀차 소감 15 쉬군 18/04/19 7176 24
584 문화/예술프사 그려드립니다. 72 1일3똥 18/01/28 8699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