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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2/22 10:21:55
Name   골든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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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자격지심이 생겨났다가 해소되어가는 과정



안녕하세요.
문득 제 인생을 돌이켜보았다가, 요즘 청년들이 많이 겪고 있는 (실은 어느 시대나 청년들이 겪는 문제지만) 자격지심 문제를 쓰기에 좋은 타이밍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완전히 극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극복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극복 전후의 마음가짐을 전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소위 명문대 출신이고, 그 소위 명문대 출신의 학생만 받아주는 사립 장학재단의 장학생입니다.
점점 빈곤층에서 학업을 잘 해낸 학생들의 수가 줄고 있다지만, 저희 장학재단을 통해서는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실업계 출신의 학생, 결손가정 출신의 학생, 아버지의 도산이나 집안 구성원의 투병 등 다양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누구도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젊은 나이에 해외여행을 가 보라" 고 강권하거나, 모인 자리에서도 단 한 번도 경제적 어려움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말했다고 해서 장학생들이 서로 눈을 흘겼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장학생들끼리도 이에 대해 말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모이면 평범한 명문대 학생들처럼 놀기 위해 노력했을 따름입니다.

저는 자격지심이 이 '말할 수 없음' 혹은 '말하지 않음' 에서 비롯된다고 많이 생각합니다.
"나는 '가난해서' '이 점이' '힘들어'." 라는 말이 드라마 대사로는 쓰기 좋을지 몰라도, 실제 장본인이 되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도 부정하고 싶어서기도 하고,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부정하기도 하고, 세상의 언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인스타 스토리를 쓴단 건 상상하기 힘들지요.- 언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화답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 용기 내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처럼 말하기가 매우 겁이 납니다.

제 실업계 출신 친구는 학문에 대한 꿈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자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녀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자퇴한다'라는 표현을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몸을 가둘 수 없는 눈물, 슬픔, 어깨의 통증, 주변부적인 말들, 갑작스러운 회계사 시험 시도 등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집안을 책임지고 있는 그 친구는 어느 날부터 책상에 앉으려면 숨이 안 쉬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전형적인 심리학적 증상 신체화(스트레스가 신체의 고통으로 드러남. 꾀병이 아니라 진실로 그러는 것.)입니다만, 이를 이해해주기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가난으로 인해 자신이 그만큼 아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녀는 지금도 자주 위경련이 일어나는 상태로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또한, 요즘 더더욱 저희 장학재단 후배들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가 멘토링이나 책 출간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데요. 실은 저도 대학을 다니며 느낀 재밌는 의사소통의 실수랄지,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1. 물론 대놓고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로 들어, 명문대 CC를 한 제 친구들은 '우리 아들 아침 1교시니 잠 좀 깨워서 보내라' 라든지, '너는 아파트 어디 사니?' 같은 말을 육성으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속물적인 어머니 유형이죠. 그들 딴에는 모성 본능이겠지만요...

2. 애초에 돈이 있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끼리 노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굳이 접근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제 경우, 부자지만 떳떳한 부자가 아니라 열등감이 있는 사람, 부자지만 자신의 외모 등에 컴플렉스가 있어 조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사주며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 (그런데 그래놓고 역시 가난한 사람은 얻어먹기만 한다.. 라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견이 강화!), 가난한데 결혼 한 방으로 신세 역전 후 알 수 없는 미련에 가난한 고학생들 도와준답시고 모아놓고 허세만 부리는 사모님 등.

저는 이들에게 '우리 아버지 공장만 봐도 가난한 사람들이 공공텃밭 야채를 다 뜯어간다. 가난한 사람들은 수준이 낮다.' 라든지, '그 굴뚝 잡고 시위하는 사람 봤니? 가난한 사람들 벌레 같이 (사모님)' '저기 길 가는 사람들 봐라. 얼굴이며 수준이며. 너는 얼굴도 낫고 능력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사모님)' 이런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은 '난 아버지 공장 외에 가진 게 없어서 부끄러워(콤플렉스)' '나는 결혼만으로 신세를 역전했어. 그럼 내가 저 가난한 사람들과 다른 게 뭘까(콤플렉스)' 이런 마음들이 밑바닥에 깔려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신병을 일으키는 사람은 정신과에 안 가고, 당한 사람들이 정신과에 간다고. 이런 사람들은 말을 뱉고 시원해지고, 당한 사람들은 자격지심이나 상처를 겪게 되는 거죠.

3. 강력한 손절문화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의 콤플렉스나 상처도 보이면 안 되게 하고 있습니다. 가령 제가 대학 영어 수업 중 '나는 토론이 지겨워' 라는 외고 출신 아이의 외고에 대한 말을 듣고 외고의 타이틀보다 커리큘럼 자체가 부러워서 부러워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외고 출신의 다른 아이에게 손절을 당해서 인연이 끊겼었습니다. ^^; 아마 열등감이 있는, 정신이 건강치 않은 사람으로 보인 것이겠죠. 저는 농담 아니고 시간이 남는 고등학교 때 논문을 쓰는 게 부러웠습니다. 지금은 웃어 넘기지만 동아리 내의 서로 겹치는 인맥이 많은 사람이라 충격이었습니다. 또, 그 친구가 부유한 편이었거든요.

아마 부유한 사람들은 부유한 대로, 빈곤한 사람들은 빈곤한 대로 자신들의 도식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수없이 털어내고 있을 겁니다. 조금의 스트레스와 피로도 피하고 싶어하는 요즘 관계문화에, 더하여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이 신뢰망에 들어왔을 때 입을 수 있는 타격이 큰 현대사회의 문제가 있으니까요. 즉 약간 소시오패스 의심을 받는 셈이죠(??)

이외에도 제가 집에서 제대로 의상 지원을 받지 못한 점으로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한다든지, 싱크대 청소법이 달라서 사람 취급을 당하지 못한다든지 (어릴수록 아이들은 자기 집안과 다른 매너 자체를 너무 놀라워하므로) 하는 경험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사실 대학에 와서는 대놓고 무시당하는 경험은 줄어든 편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집단 속에 혼자 있게 된 거죠.

이런 것 때문에 저 포함 많은 장학생들이나 고학생들이 밖에서는 밖의 평균을 맞춰, 즉 '가난하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문화에 시달리게 되며 여기서 또 선택적 함묵증이 시작됩니다. 일단 방학 전후 스몰톡의 기본은 "해외여행 갔다왔냐" 인데 손절 컬쳐를 한번 겪어보면 이런 것들을 맞춰주고 싶어집니다. (실제로 서로 많이들 이런 점이 맞은 사람들끼리 친해지고, 정보 교류도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저는 학교 다니는 내내 늘 정보가 없었어요...)

4. 또, 이건 저에 한정되는 것일 수 있지만, 가난하면서 열심히 살 때는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비슷하게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많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을 만나라? 시도해보니 안 되더군요. (...)

5. 그리고 돈과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들도 자신의 마음의 문제가 있어서 자랑하는 것이겠지만, 그 결과 상처를 느끼는 건 주위 사람들이지요. 돈에서 안전함을 느끼거나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각별히 사랑하는지 느끼는 사람들은 특히 더 자랑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명품을 쓰고, 상대가 어떤 화장품 브랜드를 쓰는지 따지고, 이런 것들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지만 남의 자격지심을 강화하지요. 이것들이 몇 년간 쌓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근본적으로 이런 행동들의 기저 심리에는 '돈이 없을수록 가치가 없고, 돈이 있을수록 가치가 있다'가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예민해요.


6. 결국 중요한 것은 9N년대생들이 어릴 때 가난하면 공부로 극복하란 말을 들었지만, 정작 공부를 해서 들어간 학교에서 그들은 (심적) 아웃사이더, 외톨이가 되기 쉬웠단 겁니다. 물론 잘 지낸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친구들을 정말 많이 알아요. 그들은 털어놓고 지내는 좋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힘들어하는 친구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치 공부만 하면 가능해 보였던 진로와 주거, 갖가지 경로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게 충격을 주는 것 같아요. 저는 가끔 차라리 대놓고 계급을 안내장에 붙여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제 대학 친구들은 지방 병원장, 대학병원 의사 딸, 교수 딸, 사업가 딸 등이었고 로스쿨에 진학하게 된 뒤로는 소위 말하는 '뼈대 있는' 집안 출신들이 늘어났습니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일반고 출신은 따로 놀면서 '일반고 출신은 정서가 다르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이런 점을 도외시하고 인간을 완전한 중립적 미립자처럼 보는 기계적인 교육정책보다는, 사람들의 정서적 편안감과 아비투스의 조화를 고려하는 정책이 필요해 보여요.

7. 그리고 이 모든 자격지심은 제 좋은 인맥들과 (주로 70세 전후의 자수성가한 분들 하하. 가난한데 혼자 고생해본 분들이 말이 통했어요.) 서로 몇 년을 알고 지내다보니 천천히 조금씩 서로의 사정에 대해 이해하게 된 대학, 로스쿨 친구들과, 홍차넷 분들 등과 '대화'함으로써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개인사 면에서는 제가 노력해서 로스쿨 졸업장을 따고, 돈을 벌며 나아졌고요. 그러니 '줄탁동시' 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이 제 뻔한 생각입니다.

실은 각 사람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리얼하게 전해지거나 아님 그것을 생생히 보면, 아님 차라리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서로 적어도 존중은 할 줄 알겠지요. 어쩌면 이 모든 자격지심과 혐오의 문제도 도식화된 현대사회에서 가벼운 만남을 하며 서로를 손절하는 것의 문제일 수도 있고요. 그래도 확실한 건 앞으로 교육이나 인식 면이 변했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적장학금을 폐지하고 소득장학금을 만드는 것 등을 좋게 생각합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3-0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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