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3/01/04 12:55:50
Name   메존일각
File #1   hansan.jpg (133.3 KB), Download : 6
Subject   내가 영화 한산에 비판적인 이유


* 탐라에 썼던 글을 살짝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 많지는 않지만 글 후반부에 영화 내용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동안 영화 한산에 비판적인 얘기를 많이 써왔습니다. 감독의 고민이야 왜 없었겠습니까만, 전 그 고민의 결과가 대단한 실패였다고 생각합니다. 전후 맥락을 잘 그려내지 못해 관객들은 황당한 이야기만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봐요. 조선 해전사를 연구하시는 모 권위있는 학자께서 공상과학영화라 평하셨는데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두서없이 쓰는 거라 글의 전개는 엉망일 테지만 이에 대해 보다 상세히 얘기해볼까 합니다.

이순신의 무패신화를 언급하며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싸움은 조선 수군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말하는 학자들도 일부 보입니다. 전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조선 수군이 처음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부터 얘기해야 하는데요.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날짜는 모두 음력) 발발했고, 조선 수군이 처음 이긴 옥포해전은 5월 7일이었습니다. 개전 후 3주 조금 더 지난 시점이었죠.

첫 승리. 양쪽 모두에게 수전은 처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임란 당시 섬나라인 일본의 수군이 강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강한 건 육군이었습니다. 왜의 수군은 병력이든 군량이든 싣는 수송선의 의미가 강했고 수전을 치를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수전 전술도 등선육박전술이라 하는 상대 배에 달라붙어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뭐야? 수전 경험이 없었으면 별 거 아니었네? 생각할 수 있겠으나, 조선 수군 역시 실전은 처음이었고 긴장되는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전투가 무서워 달아난 병사의 목을 벤 것은 이러한 긴장감을 반영합니다. 왜군의 기세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여러 지표가 조선 수군에 불리했습니다. 조선 수군 군선이 가장 많이 몰려있던 경상도는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직접적으로 해당되던  경상 좌수영은 물론이고, 불똥이 튀던 원균의 경상 우수영도 제대로 대응할 시간이 없었죠.

이순신은 원균의 구원요청을 받고 (관할 구역이 다르기 때문에)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고민의 시간을 거쳤고, 다급한 상황 속에서 전라우수영은 합류하지 못한 채 전라좌수군만 출전합니다. 수적으로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작선(=어선)도 잔뜩 끌고 갑니다. 이순신의 크나큰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첨언하면, 경상 좌수영이나 경상 우수영의 한 수영의 군선 수는 전라 좌우수영을 합친 것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많았습니다. 각 수사들의 계급은 같았지만 비중은 경상좌우수사가 더 컸던 것입니다. 조선의 전체 수군 군선의 비중을 놓고 볼 때 (정상적인 편제하에서) 전라좌수군만 출전해야 된다는 상황은 이순신에게 큰 모험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전투 결과만 보면 압승이었습니다. 척후대가 왜선을 먼저 발견하였고 왜군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전 난타하였으니까요. 사상자도 고작 부상 1명이니 전투 결과만 놓고 보면 싱겁게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운이 거들어 천만다행으로 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사천해전은 6월 5일이었고, 학익진으로 유명한 한산해전은 7월 8일이었습니다. 한산대첩의 임팩트가 너무 크기 때문에 쉽게 간과할 수 있습니다만, 모두 개전한지 3달 이내에 벌어졌습니다. 그때까지 조선과 왜 모두 체계가 잘 잡혀있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을 확실히 이해해야 합니다.

여전히 조선은 불리했습니다. 그동안 평양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임금은 의주까지 파천했습니다. 선조는 요동으로 넘어가냐 마냐로 신하들과 싸우고 있었고, 명이 조선을 도와줄지도 불확실했습니다. 당장 이순신 입장에선 무엇보다 자신의 관할구역이었던 전라도가 계속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늘 본진을 비워두고 출전한다는 불안감을 안고 싸웠습니다. 이순신은 싸움에서 결코 져서는 안 됐던 것입니다. 물론 연전연패한 왜군도 이후로는 왜성 등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방어전략을 구사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침략군이었고 조선 수군은 방어군이었습니다. 조선 수군에게 늘 배수의 진을 치는 듯한 심리적인 압박감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순신이 3차 출전하여 치른 한산해전과 안골포해전 이후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철수한 것도 왜군이 전라도로 쳐들어올 시그널이 보인다는 이유가 컸습니다. (한산도에서 굶어죽어가던 왜군 400명을 놓아준 것은 원균이었고...)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은 왜군이 '성'이라고 표현할 만큼 덩치가 컸습니다. 더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은 수전에서 분명 유리했지만, 판옥선의 움직임이 날래지는 못했기 때문에 접근을 허용해 포위당하면 저글링에 둘러싸인 드라군마냥 일방적으로 당할 수 있었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이는 잘 증명됩니다...) 판옥선 1척당 승선인원은 130명 전후였지만 그중 노를 젓는 격군이 70~80명이어서 실제 전투인원은 40~50명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세키부네는 규모가 비교적 작았고 첨저선이라 선회는 좀 어려웠지만, 날래게 이동할 수 있어 기동력에서 우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 알려지다시피 조선 수군은 왜선을 최대한 달라붙지 못하게 하며 싸웠습니다.

덩치가 큰 판옥선을 에워싸지 못하도록 화포를 사용해 적선을 깨뜨려 움직일 수 없게 했고, 거북선이 적진을 파고들며 교란시켰습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 공격은 활이었습니다. 적에게 화살을 쏘아 떨어뜨리고, 적선에 불화살을 쏘아 분멸시켰습니다. 쉽게 이긴 것처럼 말하지만, 활과 화포의 유효사거리인 50~100미터 정도를 꾸준히 유지하며 싸우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 한산을 크게 비난하는 이유는 이런 겁니다.

1.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부산포의 거대한 성채

한산해전이 벌어질 무렵은 1594년이나 1595년쯤 되는 때가 아닙니다. 개전한지 3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는데 언제 그런 위용있는 성채가 지어졌을까요? 정작 이순신이 다음의 4차 출전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제대로 된 진지가 구축되지 않았던 상황적 배경이 있었는데 말이죠.

2. 미흡한 심리전 묘사

전투를 앞두고 전후 상황에 대한 묘사나 전투를 둘러싼 여러 치열한 심리전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이순신을 그냥 고민만 하는 사람으로 그려놨습니다. 있지도 않은 천수각에 잠입한 스파이를 그리면서 시간을 잡아먹고 말이죠.

옥포해전 당시 내린 勿令妄動 靜重如山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침착하게 산처럼 움직여라)이란 말처럼, 이순신은 신중했지만 침착하고 확실하게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3. 억지스런 거북선 연출

영화 한산에서 거북선의 위력이 과장되어 묘사되지만(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문제는 드라마틱하게 꾸민답시고 거북선이 짠 하고 등장하는 것처럼 그려놨다는 점입니다. 이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너무 억지스러운 연출이었습니다.

애당초 거북선은 돌격선이었습니다. 전술을 세워놓고 그대로 움직이는 말이지, 갑자기 짠 등장하여 왜선을 놀래키는 군선이 아닙니다.

거북선은 전략적인 사용 용도가 제한적인 군선이었습니다. 왜군이 거북선을 두려워했음은 분명한데(데몬스트레이션으로써 효과는 확실히 있었지만) 성능 또한 그렇게 좋았다면 임란 전기간을 통틀어 5척만 건조했을 리 없었겠죠.

4. 분명한 팩트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음

예전에 탐라에 썼던 적이 있는데요. A일지 B일지 알 수 없는 기록을 극중 흐름에 맞춰 취사선택하는 것도, 아예 알 수 없는 사실을 있음직하게 묘사하는 것도 아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시대적 배경만을 조선으로 한 퓨전사극물도 아니고, 극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나름 충분히 명분있게 변경한 것도 아닌 것이어서 아주 크게 비난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비난할 지점은 너무 많은데 영화를 본지 오래돼서 기억도 잘 안 나고 다시 찾아볼 이유조차 찾지 못하겠어서 이 정도로만 씁니다.

학익진에 대해서도 생각할 지점이 많은데 요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대용의 거북선에 대해서도 좀 더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학익진의 형태가 우리가 아는 그런 모습이 전혀 아니었을 가능성, 나대용이 거북선 건조에 기여한 지분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부분들입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1-16 20:4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6
  • 영화보다 흥미진진!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66 의료/건강엄밀한 용어의 어려움에 대한 소고 37 Mariage Frères 23/01/12 3996 29
1265 일상/생각같이 게임했던 누나 이야기.. 3 어제내린비 23/01/12 3549 18
1264 역사내가 영화 한산에 비판적인 이유 17 메존일각 23/01/04 3536 16
1263 경제때늦은 2022년의 경제학 (+인접분야) 논문읽기 결산 9 카르스 23/01/04 2949 15
1262 기타2022 걸그룹 6/6 10 헬리제의우울 23/01/03 3146 12
1261 체육/스포츠10의 의지는 이어지리 다시갑시다 22/12/31 2611 6
1260 요리/음식차의 향미를 어떤 체계로 바라볼 수 있을까? 6 나루 22/12/20 2927 13
1259 일상/생각4가지 각도에서 보는 낫적혈구병 4 열한시육분 22/12/18 2751 10
1258 IT/컴퓨터(장문주의) 전공자로서 보는 ChatGPT에서의 몇 가지 인상깊은 문답들 및 분석 9 듣보잡 22/12/17 4125 19
1257 여행너, 히스패닉의 친구가 돼라 5 아침커피 22/12/17 2987 15
1256 기타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세계관 최강자가 68 문학소녀 22/12/09 4912 74
1255 체육/스포츠미식축구와 축구. 미국이 축구에 진심펀치를 사용하면 최강이 될까? 19 joel 22/12/05 4103 18
1254 여행세상이 굴러가게 하는 비용 5.5 달러 16 아침커피 22/11/26 4069 25
1253 요리/음식주관적인 도쿄권 체인점 이미지 10 向日葵 22/11/20 3826 14
1252 일상/생각박사생 대상 워크숍 진행한 썰 19 소요 22/11/19 3998 26
1251 일상/생각농촌생활) 7.8.9.10.11월 23 천하대장군 22/11/15 3032 34
1250 일상/생각7년동안 끊은 술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32 비사금 22/11/10 4629 44
1249 정치/사회슬픔과 가치 하마소 22/11/02 3154 15
1248 꿀팁/강좌간혹 들어오는 학점은행제 알바들은 뭐 하는 사람들일까? 5 Profit 22/10/30 4551 14
1247 정치/사회이태원 압사사고를 바라보는 20가지 시선 7 카르스 22/10/30 5361 29
1246 과학이번 카카오 사태에 가려진 찐 흑막.jpg 코멘터리 18 그저그런 22/10/25 5059 24
1245 일상/생각"교수님, 제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24 골든햄스 22/10/20 4685 53
1243 과학"수업이 너무 어려워서 해고당한" 뉴욕대 화학 교수에 관하여 64 Velma Kelly 22/10/06 6092 27
1242 IT/컴퓨터망사용료 이슈에 대한 드라이한 이야기 20 Leeka 22/09/30 4089 9
1241 기타대군사 사마의 감상. 나관중에 대한 도전. 10 joel 22/09/30 3746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