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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2/04 07:51:21 |
Name | 뤼야 |
Subject | 인문학, 그리고 라캉 다시 읽기 |
먼젓번에 올렸다가 삭제한 제 글 [라캉과 들뢰즈를 읽어야할까] https://kongcha.net/?b=3&n=1638는 제 독서에 대한 감상적 글쓰기였습니다. 제 독서는 철저히 쾌락을 위한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어떤 세속적 가치관의 대입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독서는 철저히 제 개인적인 영역이니까요. 라캉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써먹는 논리는 인지과학의 발달로 라캉의 정신분석은 폐기되어야한다는 이야기들이죠. 그러나 이 논리는 영역구분에 실패한 헛소리이며 너무나 뭉툭해서 별로 끌리지 않습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누군가 이런 말로 세계를 입증하고야 말았다는 결론같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세계를 정의하고 자기가 만든 세상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글에 레이드님이 '철학이란 한없이 커지는 학문'이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은 정말 훌륭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글을 삭제하고 나니 아쉬워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마르코폴로님 글을 보고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댓글로 부연한 내용을 맥락에 맞겨 조금 고쳐 다시 올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어이없지만 그것이 그의 형이상학과 윤리학과 시학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개별 분과이니 무슨 상관이냐 물을 수도 있을텐데 그 모두를 하나의 체계 속에서 보았고 보아야한다고 생각했으며(그리고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골자이며) 이러한 분석-종합에 대한 추동을 서양 지성사에서 가장 먼저 보여줬던 게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었다는 점이-소위 철학사적 의의까지 감안할 때-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죠. 즉, 그의 과학관을 부정한다면 그의 형이상학관에 비추어, 그의 다른 부분도 부정하는 게 온당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요. 문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을 모두 끌어안는 이들은 없습니다만, 부정할 건 부정하고 변주할 건 변주하면서 잘 써먹고 있습니다. 개별 사상가에 있어서는 그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만큼 후대에 부정당하는 틈바구니 속에 있지요.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은 [1. 이들 감정의] 또는 [2.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카타르시스'를 봅시다. 후대 시학을 둘러싼 논쟁은 대부분이 이 카타르시스에 대한 해석 논쟁일 정도로 문학계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만, 정작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카타르시스에 관해 직/간접적으로 기술한 건 위 세 문장에 불과합니다. 이때 해석 논쟁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두 입장이 [1.정화이론]과 [2. 조정이론]인데요. 1에서 이들 감정이란 연민과 공포 각각을 지시합니다. 2에서 이러한 감정이란 연민과 공포를 넘어 적절히 순화되고 조정되지 않을 경우 유해할 수 있는 감정의 전반을 가리키죠. 그리고 이들 간의 논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방에서 전해진 이후부터 면면히 지속되어, 헤겔과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이어집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가 무엇인지 오늘날에 있어선 그리 중요할 거 같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아리스토텔레스 전문 연구가에게나 중요하겠고 그건 온전히 문학/시학/미학의 영역이라고 말하기 어렵겠죠. 그러나 한편 이러한 논쟁은 그만큼 유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추어) 타당한지만을 밝히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니, 목적과 그들의 의도가 그러했다고 한들 그 사이사이에서 주어진 부산물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요. 카타르시스에 대한 수많은 논쟁의 결과 우리는 극의 클라이막스가 감상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정서가 극 속에서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 보다 면밀한 탐구가 가능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시도한 이들도 있지요. 정화이론과 조정이론 양자 모두에 포섭되지 않는, 제 3의 해석 중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문제시되는 구절을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묘사를 통해서 [이러한 사건]의 명징화를 성취한다"로 읽어내는 겁니다. 아주 현대적인 문학관을 경유한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며, 그런 만큼 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였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아마 저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저런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데 그치기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마저 달리하기 이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서? 중세와 근대 초기라면 몰라도 현대라면 딱히 있을법한 이야기가 아니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도리어 전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가들과 그들이 상정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문학관에 대한 비판을 저러한 방식으로 수행했다는 게 맞겠지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의 학자여서, 그의 사상이 중세와 근대를 경유하며 특유한 위상을 누려서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의도적 오독'은 인문학계에 있어 꽤 흔하지요. 대표적으로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관계가 있겠네요. 사르트르의 현존재 개념은 분명히 하이데거에 빚진 것이며 사르트르 자신도 이를 시인합니다만, 사르트르의 현존재 개념은 하이데거의 입장에서는 "사르트르는 내 존재와 시간을 철저히 잘못 읽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끔 왜곡된 것입니다. 현존재가 함의하고 지시하는 특정한 양상 중 일부를 취합하여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그외는 배제한 거지요. 하지만 사르트르는 도리어 이러한 하이데거가 상정한 현존재 개념이 온당치 못하다고 반박합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현존재 개념을 처음으로 철학적 문제로 상정한 게 하이데거 자신인데 그 하이데거에게 대고 개념을 잘못 썼다고 반박하다니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자작자연自作自演을 보고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소리입니다. 보다 터무니없는 건 사르트르는 그렇게 [왜곡된 현존재] 개념 위에서 자신의 사상을 태연히 전개해나간다는 겁니다. "그럴 거면 그냥 아예 자기가 새로운 개념을 만들면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할 법합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며, 실제 사르트르에 대한 비판은 그 사상과 철학에 대한 내적 비판이 대부분이지, 하이데거를 잘 읽었네 잘못 읽었네와 같은 부분이 주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르트르 개인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의 개념을 오염시키든 말든 별 상관 안했다는 것이죠. 이건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하이데거 자신도 사르트르가 자신의 현존재를 오염시키고 말고에 크게 연연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자신의 현존재 개념을 운운했던 건 사르트르의 맥락에서 현존재를 읽어낼 때 예기될 이율배반을 이미 그 자신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대부라 불리면서도 그 자신은 실존주의자이길 거부했던 게 하이데거였으니까요.). 그리고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에게서 현존재의 표현을 차용했음에도 그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건, 저렇게 자기 꼴리는대로 사용한 건 하이데거에 대한 무시도, 그의 권위에 막연히 기대고자함도 아닙니다. 하이데거가 열어놓은 지평의 일정한 영역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이야기지요. 단지 사르트르가 유독 싸가지 없는 게 아닙니다. 인문학에서 굉장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헤겔이 칸트를, 맑스가 헤겔을, 루카치가 맑스를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단순히 '전의 것이 틀리고 이번 것이 맞다'가 아닙니다. 양자 모두 제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고 그것들은 각각 후대의 '재해석'과 '오독'을 기다리고 있지요. 신칸트주의자들이 때로 맑스와 만나며, 헤겔 우파인 베버가 맑스를 부정하고, 후기 맑스에 초점을 맞췄던 알튀셰와 탈-아리스토텔레스적 서사학을 기치로 내세운 브레히트가 전기 맑스와 호응하며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으로 문학을 종합하려했던 루카치를 그처럼 비판했습니다. 개념의 오용과 타락은 라캉만이 저지른 게 아닙니다. 애초에 인문학 자체가 이처럼 서로간의 개념을 오용하고 타락케하며 재구성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용과 타락임을 서로 지적하고 그 오용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 오용과 타락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오용과 타락이 맞을지언정 그 오용과 타락이 어떠한 맥락에서 유효한지) 밝혀나가는 도상 위에 서 있지요. 이중 완벽하게 정당화가 끝난 사상? 그런 거 없습니다. 다만 그 오용과 타락에 대한 많은 갑론을박을 거느린 사상이 있고 그 와중에 쓸만한 것들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마치 시학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누대에 걸친 쟁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라캉이 그의 저서와 강의록에서 과학/수학의 개념을 자기 임의로 쓴 건 맞고 그게 별달리 엄밀치 못한 수사적 활용에 불과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오용이라봐야 라캉이 자신의 입장을 비유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쓴 말놀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자의성과 무지의 소산으로 비유가 온당치 못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비유와 비유가 지시하는 개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지시대상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라캉 개인이 학적으로 엄밀하지 못하고 글러처먹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가 상정한 개념이 인문학적으로, 문학/미학적으로 쓸만한 것이냐와는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왜곡을 수사 놀음에 그치지 않고 아예 자기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깔고 갔던 사르트르를 생각하면 라캉은 양반이죠. 그럼 이제 라캉이 어떻게 소설과 영화를 보는데 있어 이야기할 여지가 있는지를 말해야겠지요. 그에 앞서 라캉의 학문적 기반인 프로이트부터 짚고 넘어가야할텐데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개념화하고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문학작품에 빚진 바 많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과거 무의식의 발견자라 자신을 칭송하는 이들 앞에서 프로이트는 "나에 앞서 시인과 소설가, 철학가들이 무의식을 발견했다. 내가 발견한 건 그 무의식을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이라고 말했죠. 그리고 그가 말한 과학적 방법은 이후에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과학적 방법의 대상을 제공한 시인, 소설가, 철학가의 저서 역시 도매급으로 폐지 취급되어야할까요? 말도 안 되죠. 프로이트 이전에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었습니다. (프로이트의 겸손을 최대한 받아들이자면)프로이트의 작업은 그들에 대한 인용과 주석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 인용과 주석이 글러먹었다고 원저도 글러먹었다는 건 위아래가 맞지 않는 소리지요. 이건 프로이트의 '과학적 작업'에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의 정신분석이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아니라고 해도, 시/소설/철학에 대한 나름의 비평서인 건 부정할 수 없거든요. 그 비평이 과학에 이르지 못한다고 할지언정 비평이 비평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해당 비평의 가치를 판별하는 건 얼마나 인간의 인지/의식 과정에 있어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타당하느냐가 아닙니다. 해당 비평이 주목하는 부분의 심미적으로 얼마나 그럴싸하냐가 되는 거지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한 아르놀트 하우저는 정신분석을 일종의 낭만주의라고 말합니다. 정확히는 낭만주의 예술/문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접근이라고요. 오늘날의 문학을 파악하는데 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별로 유효한 틀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잘만 써먹습니다. 같은 입장이 낭만주의, 모더니즘 예술과 프로이트 사이에서라고 성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내적으로 타당하건 그렇지 않건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쓸 수 있는 개념을 던져주니까요. 정신분석을 문학에 접목할 수 있는 이유? 애초에 정신분석 자체가 문학에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출발했는데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라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19세기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6세기 홀바인의 [대사들]을 볼때 우리가 느끼는 독특하고 이질적인 감흥을 미학에서는 라캉의 응시와 왜상을 경유하여 말합니다. 왜 라캉에 굳이 의존할까요? 그들이 게을러서요? 아뇨. 그게 해당 그림에 대한 해석들 중 가장 타당하다고 느끼니까요. 라캉이 제시한 구조가 작품 외적으로 얼마나 그럴싸하건 말건과 무관하게 (응시와 왜상을 말하려면 당연히 실재계를 말해야하니)그 세계가 해당 작품의 세계를 비교적 온전하게 설명하고 자신들이 느끼는 이질감을 생생히 담아낸다고 느끼기에 그를 인용하는 겁니다. 실제로 라캉 자신이 회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기 사상을 풀어내지요. 프로이트가 문학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한 자기 사상의 설명"- 이게 바로 비평입니다. 미학 차원에서 라캉의 타당성은 라캉의 정신분석이 얼마나 엄밀하냐에 있지 않습니다. 철저히 한 명의 비평가로서 그가 제기한 [썰]이 작품에 얼마나 부합하냐에 맞춰져있죠. 그리고 해당 작품을 비교적 잘 풀어냈다면? 이러한 툴을 다른 작품에도 써먹어 볼 수 있을까 궁리해보는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이는 라캉을 떠받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 중 라캉을 떠받드는 이들이 있겠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차용하며, 일부는 사르트르가 하이데거를 향해 그러했듯 도리어 라캉의 개념을 전복하기도 합니다. 지젝은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 개념의 엄밀성을 기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합니다만, 라캉을 인용하는 학자들 중 정작 그런 작업에 관심있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문학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처럼요. 또한 정작 지젝의 작업 역시 라캉을 어떤 식으로든 왜곡하는 길일 수밖에 없고요. 저는 이 자리에서 미적 유인물을 말함에 라캉을 읽어도 될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정작 제 자신은 라캉에 입각한 여러 평론들이 썩 마음에 드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정신분석 일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라캉에 대한 반성과 자기 고유의 논리가 없이 단지 끼워맞추는 인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니까요(실제 영화학회에 실리는 논문들 중에도 라캉 인용해서 황당하게 집필된 논문들 종종 있습니다.). 제 아무리 잘 쳐줘봐야 그렇게 적용이 되는 라캉의 개념이 대단할 뿐, 그 적용한 이의 대단함도, 작품의 대단함도, 라캉의 대단함도 될 수 없는 많은 글들이 있지요. 그리고 보다 많은 작품을 설명함에 있어 라캉보다 타당한 툴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제가 일전에 언급한 영미문학계 웨인 부스의 [내포 저자]개념이 대표적으로 그러할테고요. 허나 라캉의 개념을 굳이 경유할 필요가 없는 만큼, 라캉의 개념을 경유할 때에만 이를 수 있는 어떤 지점 역시 있습니다. 아마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던 여러 평론들 역시 그런 의도에서 쓰여졌을테고요. 이때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 굳이 라캉의 학적 엄밀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라캉이 딱히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해서 끌어온 게 아니기도 하고요. 그들의 독해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성립되지 않는 지점이 있는지를 보이면 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라캉을 경유해서 특정한 영화를 읽어낸다고 한들, 그 모든 비평이 타당한 게 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들 비평의 타당성은 라캉이 담보하지도 않고, 라캉의 개념이 담보하지도 않습니다. 작품과 라캉의 개념을 조응시키는 개별적인 접근에서 비롯하는 것이죠. 서로를 계승하며 부정하는 일련의 작업들, 이를 이르기 위한 가장 좋은 표현을 헤겔의 '지양'일 것입니다. 다만 이때 지양에 함의된 '발전'의 개념을 달리 이해해야겠지요. 무엇이 발전이라고 정답을 특정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정답을 말하기 위한 여러 노력만이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굳이 발전을 함의하는 지양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 낱낱한 작업들이 누적되고 쌓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 하여금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부정하고 왜곡하게 만들기 위해서요. 그것이 원 저자의 의도와 달리 쓰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걸 쓸 경우 어떤 이야기를 얼마나 할 수 있느냐지요.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개별 영역에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정입니다. 라캉을 경유한 작품의 독해가 마음에 들지 않을때, 마냥 그들을 배척하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도리어 라캉을 읽고, 그가 어떤 맥락에서 특정 개념을 썼고, 그의 개념을 차용한 이는 어떠한 맥락에서 이를 답습/왜곡하여 작품을 분석했는지를 파악하는 게 모범적인 길이지요. 그런 모범적인 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개별 작품에 대해 다른 평을 내놓으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보다 많은 '부산물'을 낳을 수 있는 논의라면 그러한 입장이 수용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그렇지 않다면, 그저 묻히는 것이고요. 따라서 굳이 라캉을 경유해야만 문학과 영화를 읽을 수 있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저 그렇게 하면 됩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작품을 읽는 방법은 라캉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제가 읽고 있는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은 라캉을 '모범적으로' 읽습니다. 말이 모범이긴 한데, 꽤 드문 일이지요. 그의 사상에서 서로 이율배반이 되는 부분이 찾고, 그러나 그 안에서 쓸만한 것들을 뽑아내고, 과거에 이와 같은 작업을 했던 다른 학자들을 (같은 방식으로)경유하여 자기 나름대로 쓸만한 부분들을 재구성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재구성 과정을 거치기에 그의 작업은 진정 주관적인 것이되고요. 외적 논리에 의해 누군가를 부정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해당 학자 자신의 논리로 그 자신을 부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며, 그 부정 끝에 이를 재구성한다면 그건 해당 사상을 넘어 자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사사키 아타루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개인의)혁명'이라고 말하며 자기가 전개하는 인문학의 기치로 삼습니다. 그의 작업 자체가 그의 주장에 대한 사례인 셈이지요. http://pgr21.com/?b=26&n=56237&c=506031 역시, 저와 방향은 다르지만 '라캉을 거론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답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첨부합니다. 피지알 질게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금요일이네요. 연말이라그런지 기분도 들뜨고 신나게 보낼겁니다. 홍차넷 회원 여려분도 좋은 주말 되세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12-16 17:25)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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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지난 번 논쟁에서 기분을 상하게 했던 점을 사과드리며, 그에 대한 보완으로 이렇게 글을 써주신 노력에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합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뤼야님의 말씀은 라캉의 개념이 과학적 엄밀성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 이론이 비평으로서 원작의 본질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에 틀린 것은 없습니다. 작품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이것들이 과학적으로 완전해야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안타깝게도 라캉을 경유한 작품해석이 과도한 의미부여로 인해 원작의 본... 더 보기
안타깝게도 라캉을 경유한 작품해석이 과도한 의미부여로 인해 원작의 본... 더 보기
먼저 지난 번 논쟁에서 기분을 상하게 했던 점을 사과드리며, 그에 대한 보완으로 이렇게 글을 써주신 노력에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합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뤼야님의 말씀은 라캉의 개념이 과학적 엄밀성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 이론이 비평으로서 원작의 본질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에 틀린 것은 없습니다. 작품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이것들이 과학적으로 완전해야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안타깝게도 라캉을 경유한 작품해석이 과도한 의미부여로 인해 원작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라캉에게만 묻는 것은 지나친 일이겠으나, 라캉의 이론이 이로부터 완전 결백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지금도 라캉 철학을 보완/발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문학의 목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인간과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 또한 그 중 하나라고 봅니다. 라캉의 이론이 작품속 인간과 삶에 대한 본질을 제대로 짚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 이론이 문제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얻어 걸리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적 시각을 거둘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문제가 없는 비평 이론적 도구를 개발하는 노력을 갈구하게 됩니다. 물론 그 새로운 이론으로 라캉만으로 설명가능한 본질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 이론의 개발이 쉬운 것은 아닐테지만 궁극적으로 나아가야할 지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성 교육의 좋은 방법으로 소설을 보는 것을 권장합니다. 이는 과학적 서술로는 이룰 수 없는 인문학만의 위대한 능력 중 하나이죠. (오히려 어설픈 지식으로 과학적 서술을 흉내내는 자기계발서는... 뭐 그냥 불쏘시개입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능력을 보다 더 강화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부터 탈피해야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본질을 제대로 짚어낼 순 있겠으나 그 과정에서 과학적 오류를 포함한다면 구해낸 본질은 해석적 틀 안에 갇히게 될 뿐이니까요. 이것이 과학적 무류성을 갖춘 새로운 비평이론이 필요한 이유이고, 제가 심리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라캉을 경유한 작품해석이 과도한 의미부여로 인해 원작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라캉에게만 묻는 것은 지나친 일이겠으나, 라캉의 이론이 이로부터 완전 결백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지금도 라캉 철학을 보완/발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문학의 목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인간과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 또한 그 중 하나라고 봅니다. 라캉의 이론이 작품속 인간과 삶에 대한 본질을 제대로 짚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 이론이 문제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얻어 걸리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적 시각을 거둘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문제가 없는 비평 이론적 도구를 개발하는 노력을 갈구하게 됩니다. 물론 그 새로운 이론으로 라캉만으로 설명가능한 본질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 이론의 개발이 쉬운 것은 아닐테지만 궁극적으로 나아가야할 지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성 교육의 좋은 방법으로 소설을 보는 것을 권장합니다. 이는 과학적 서술로는 이룰 수 없는 인문학만의 위대한 능력 중 하나이죠. (오히려 어설픈 지식으로 과학적 서술을 흉내내는 자기계발서는... 뭐 그냥 불쏘시개입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능력을 보다 더 강화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부터 탈피해야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본질을 제대로 짚어낼 순 있겠으나 그 과정에서 과학적 오류를 포함한다면 구해낸 본질은 해석적 틀 안에 갇히게 될 뿐이니까요. 이것이 과학적 무류성을 갖춘 새로운 비평이론이 필요한 이유이고, 제가 심리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음... 제 생각에 뤼야님 말씀은 작품의 본질이라는 건 없다는 쪽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뤼야님께서 곧잘 보르헤스를 인용하시는 점을 보아도 그렇고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품의 본질(이라는 게 있다면)은 작품 그 자체라는 입장이죠.
해서... 전 마스터충달님께 묻고 싶습니다. 본질이란 무엇이고, 작품에 있어서 본질은 어떤 걸 말하는건지요. 모름지기 본질이라 함은 작품 자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다른 무엇과 비교할 때 대체불가능한 성질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하나의 작품으로부터... 더 보기
해서... 전 마스터충달님께 묻고 싶습니다. 본질이란 무엇이고, 작품에 있어서 본질은 어떤 걸 말하는건지요. 모름지기 본질이라 함은 작품 자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다른 무엇과 비교할 때 대체불가능한 성질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하나의 작품으로부터... 더 보기
음... 제 생각에 뤼야님 말씀은 작품의 본질이라는 건 없다는 쪽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뤼야님께서 곧잘 보르헤스를 인용하시는 점을 보아도 그렇고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품의 본질(이라는 게 있다면)은 작품 그 자체라는 입장이죠.
해서... 전 마스터충달님께 묻고 싶습니다. 본질이란 무엇이고, 작품에 있어서 본질은 어떤 걸 말하는건지요. 모름지기 본질이라 함은 작품 자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다른 무엇과 비교할 때 대체불가능한 성질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하나의 작품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비평을 쏟아낼 수 있지만, 그 비평을 그러모은다고 원작품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미적 합목적성이란 무목적적 합목적성이기 때문이고 비평을 통해 작품에 \'본질(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들 그 본질(적 의미)를 향한 작품의 방향성만을 밝힐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죠. 하여 본질(적 의미)를 묻는 것보다 중요한 건 본질(로서의 구조)를 밝히는 것일테고, 그보다 본질적인 건 다름 아닌 작품 자체일 겁니다. 제 아무리 타당한 비평이라고 한들 우리에게 주어진 작품 자체보다 작품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돌려 말한다면? 작품의 본질을 먼 데서 찾을 게 없다는 뜻이 되겠죠. 이미 작품 자체로 우리 앞에 주어져 있으니까요. 그게 작품의 본질이며 이데아입니다. 비평은 작품 내의 시뮬라크럼을 덜어내어 작품의 이데아에 다가가려 시도하지만 그건 시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비평이란 이데아에 대한 시뮬라크럼일 수밖에 없는 거고요. 거짓이고 기만된 비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비평 그 자체가 이미 작품에 대한 거짓이고 기만입니다.
문학비평이(러시아 형식주의와 영미 문학의 신비평, 그리고 다시 이를 비판한 내포 저자 등의 담론을 거치며) 의미 분석에서 구조 분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이와 같은 성찰이 있었으며 오늘날 비평은 그 전제와 인식 위에서 출발합니다. 그럼에도 비평을 하는 이유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상관없기 때문이고요. 비평가들이 개별 작품에 대한 온당한 평가내지는 이 작품은 본래 이러저러하게 쓰여져야했다...는 것에 고증학적 관심 이상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닌 거죠. 개별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문학이론은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일 뿐입니다. 현대의 문학이론은 그저 작품을 바라보는 틀로서 기능할 뿐이죠.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할 때 굳이 문학사적 의의내지는 정치성을 끌고 오는 건 그게 아니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뭐... 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평가야 그와 별개로 가능하겠죠. 헌데 이런저런 문학이론을 끌고 와서 거기에 부합한다고 좋은 작품이라거나,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비평이론과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이때의 준거는 철저히 개별 예술의 기술적 방법론에 입각한 평가가 되겠죠(물론 이때 기술적 방법론과 비평이론 사이의 접점을 상정해볼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떤 작품을 보고 어떤 철학자의 어떤 사상이 연상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서 그 작품의 의의를 찾을 때 그 철학자나 이론가가 누구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라캉이든 들뢰즈든 웨인 부스든 콜린 윌슨이든 무관해요. 그런 행위 자체가 이미 글러먹은 짓입니다. 그리고 사실... 정말 아마추어 수준의 평론가가 아닌 한에야 \"라캉의 이러저러한 비평에 이 소설/영화가 이러저러하게 부합하니까 이 소설/영화는 위대한 작품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텐데요. 애초에 그런 건 학계에서 유의미하게 통용되지도 못합니다. 기껏해야 \"이러저러하게 볼 수 있다\" 수준에서 끝나기 마련이죠(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그러므로 위대하다\'라고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맥락이 아니라는 걸 내재화하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니 별 문제될 것도 없고요.). 인용된 철학자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잘못 인용한 사람, 혹은 (개별 작품의 가치 정당화와 무관한 맥락에서)인용한 걸 (가치 정당화를 한다고)잘못 읽은 독자의 잘못만이 있을 뿐이죠.
해서... 전 마스터충달님께 묻고 싶습니다. 본질이란 무엇이고, 작품에 있어서 본질은 어떤 걸 말하는건지요. 모름지기 본질이라 함은 작품 자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다른 무엇과 비교할 때 대체불가능한 성질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하나의 작품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비평을 쏟아낼 수 있지만, 그 비평을 그러모은다고 원작품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미적 합목적성이란 무목적적 합목적성이기 때문이고 비평을 통해 작품에 \'본질(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들 그 본질(적 의미)를 향한 작품의 방향성만을 밝힐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죠. 하여 본질(적 의미)를 묻는 것보다 중요한 건 본질(로서의 구조)를 밝히는 것일테고, 그보다 본질적인 건 다름 아닌 작품 자체일 겁니다. 제 아무리 타당한 비평이라고 한들 우리에게 주어진 작품 자체보다 작품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돌려 말한다면? 작품의 본질을 먼 데서 찾을 게 없다는 뜻이 되겠죠. 이미 작품 자체로 우리 앞에 주어져 있으니까요. 그게 작품의 본질이며 이데아입니다. 비평은 작품 내의 시뮬라크럼을 덜어내어 작품의 이데아에 다가가려 시도하지만 그건 시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비평이란 이데아에 대한 시뮬라크럼일 수밖에 없는 거고요. 거짓이고 기만된 비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비평 그 자체가 이미 작품에 대한 거짓이고 기만입니다.
문학비평이(러시아 형식주의와 영미 문학의 신비평, 그리고 다시 이를 비판한 내포 저자 등의 담론을 거치며) 의미 분석에서 구조 분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이와 같은 성찰이 있었으며 오늘날 비평은 그 전제와 인식 위에서 출발합니다. 그럼에도 비평을 하는 이유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상관없기 때문이고요. 비평가들이 개별 작품에 대한 온당한 평가내지는 이 작품은 본래 이러저러하게 쓰여져야했다...는 것에 고증학적 관심 이상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닌 거죠. 개별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문학이론은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일 뿐입니다. 현대의 문학이론은 그저 작품을 바라보는 틀로서 기능할 뿐이죠.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할 때 굳이 문학사적 의의내지는 정치성을 끌고 오는 건 그게 아니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뭐... 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평가야 그와 별개로 가능하겠죠. 헌데 이런저런 문학이론을 끌고 와서 거기에 부합한다고 좋은 작품이라거나,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비평이론과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이때의 준거는 철저히 개별 예술의 기술적 방법론에 입각한 평가가 되겠죠(물론 이때 기술적 방법론과 비평이론 사이의 접점을 상정해볼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떤 작품을 보고 어떤 철학자의 어떤 사상이 연상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서 그 작품의 의의를 찾을 때 그 철학자나 이론가가 누구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라캉이든 들뢰즈든 웨인 부스든 콜린 윌슨이든 무관해요. 그런 행위 자체가 이미 글러먹은 짓입니다. 그리고 사실... 정말 아마추어 수준의 평론가가 아닌 한에야 \"라캉의 이러저러한 비평에 이 소설/영화가 이러저러하게 부합하니까 이 소설/영화는 위대한 작품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텐데요. 애초에 그런 건 학계에서 유의미하게 통용되지도 못합니다. 기껏해야 \"이러저러하게 볼 수 있다\" 수준에서 끝나기 마련이죠(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그러므로 위대하다\'라고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맥락이 아니라는 걸 내재화하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니 별 문제될 것도 없고요.). 인용된 철학자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잘못 인용한 사람, 혹은 (개별 작품의 가치 정당화와 무관한 맥락에서)인용한 걸 (가치 정당화를 한다고)잘못 읽은 독자의 잘못만이 있을 뿐이죠.
몇가지 첨언한다면... 문학이나 예술의 가치는 인문학적 목표를 얼마나 잘 실현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라는 게 근래 문학과 예술의 입장입니다. 다는 아니고요. 물론 절대 다수는 그런 거에 관심없죠.). 그런 것이 예술 담론의 주류였던 시기는 아주 예전의 일이에요.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유의미한 평가를 얻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것도 무색할 만치 예전의 일이죠. 그 모든 걸 통합하는 체계를 상정한 건 루카치 시절의 일이고, 오늘날에는 그러한 루카치를 비판했던 브레히트조차 \"정치적 진보와 미적... 더 보기
몇가지 첨언한다면... 문학이나 예술의 가치는 인문학적 목표를 얼마나 잘 실현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라는 게 근래 문학과 예술의 입장입니다. 다는 아니고요. 물론 절대 다수는 그런 거에 관심없죠.). 그런 것이 예술 담론의 주류였던 시기는 아주 예전의 일이에요.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유의미한 평가를 얻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것도 무색할 만치 예전의 일이죠. 그 모든 걸 통합하는 체계를 상정한 건 루카치 시절의 일이고, 오늘날에는 그러한 루카치를 비판했던 브레히트조차 \"정치적 진보와 미적 진보를 [(순전히 당위차원에서)]동일선상으로 환원시켰다\"는 이유로 비판 받는걸요.
그리고 주류가 아닌 이유는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이러저러한 성찰 때문이고요. 비평이 정말 \'학적\'이길 바라신다면 한가지 떠올려보세요. \'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학적 대상\'입니다. \'학적 대상\'에 이반되는 \'학\'은 \'학\'이 아니죠. \'학\'은 \'학적 대상\'이 그러해야할 바(당위)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학적 대상\'이 위치하는 바를 기술할 뿐이죠. 바로 그런 맥락에서 칼 포퍼가 부정되고, 토마스 쿤이 긍정된 것이죠. 과학철학이 과학에 있어 그러하듯, 비평이 예술에 있어 그러하듯이요.
그리고 주류가 아닌 이유는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이러저러한 성찰 때문이고요. 비평이 정말 \'학적\'이길 바라신다면 한가지 떠올려보세요. \'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학적 대상\'입니다. \'학적 대상\'에 이반되는 \'학\'은 \'학\'이 아니죠. \'학\'은 \'학적 대상\'이 그러해야할 바(당위)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학적 대상\'이 위치하는 바를 기술할 뿐이죠. 바로 그런 맥락에서 칼 포퍼가 부정되고, 토마스 쿤이 긍정된 것이죠. 과학철학이 과학에 있어 그러하듯, 비평이 예술에 있어 그러하듯이요.
마스터충달님이 계속 제 글에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셔서 제가 완전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마디 남깁니다. 충달님이 비평계를 걱정하는 마음은 갸륵하지만, 저는 비평계가 어떻게 굴러가든 관심없습니다. 제 글에 누누이 밝혔듯이 제 독서는 제 개인의 영역이고 충달님이 비평계가 나아갈 방향을 아무리 제게 설파하셔봤자 제게는 안먹힙니다. 안먹힐 뿐만 아니라 제 개인의 영역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당위의 잣대로 제 글에 토를 다는건 폭력이지요. 전 일반론과 보편으로 무장한 재미없는 비평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런 ... 더 보기
마스터충달님이 계속 제 글에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셔서 제가 완전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마디 남깁니다. 충달님이 비평계를 걱정하는 마음은 갸륵하지만, 저는 비평계가 어떻게 굴러가든 관심없습니다. 제 글에 누누이 밝혔듯이 제 독서는 제 개인의 영역이고 충달님이 비평계가 나아갈 방향을 아무리 제게 설파하셔봤자 제게는 안먹힙니다. 안먹힐 뿐만 아니라 제 개인의 영역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당위의 잣대로 제 글에 토를 다는건 폭력이지요. 전 일반론과 보편으로 무장한 재미없는 비평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런 비평을 읽을면 오히려 작품을 마주하기 싫어집니다. 그런 글이 없어도 그 정도는 저도 볼 줄 압니다. 라캉을 들먹이는 비평계의 관행이 싫으시면 제게 그런 비판을 가하시지 마시고, 글을 하나 쓰세요. 아마 많은 분들이 호응해 주실 겁니다.
전 비평계의 권력자도 아니고, 비평의 가치를 높이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도대체 뭡니까? 그저 글읽기를 좋아하는 독서가이고, 저를 자극하는 글을 좋아한다는 말에 왜 비평계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하시는지요? 저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제가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비평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이것을 쓸 수 없겠다]하는 비평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홍차넷에 얼마전 한국영화 [사도]의 평을 올려주신 맷코발스키님의 글이 바로 그런 겁니다. 악령을 김치에 싸서 드셔보시라니... 정말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얼마나 유쾌합니까? 저는 그런 것을 원합니다. 사도라는 영화완 별개로 그 글은 읽는 재미가 있지요. 맷코발스님의 재치가 드러나지요. 라캉을 들먹이지 않고도 제게 좋은 비평이란 그런 겁니다.
전 비평계의 권력자도 아니고, 비평의 가치를 높이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도대체 뭡니까? 그저 글읽기를 좋아하는 독서가이고, 저를 자극하는 글을 좋아한다는 말에 왜 비평계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하시는지요? 저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제가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비평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이것을 쓸 수 없겠다]하는 비평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홍차넷에 얼마전 한국영화 [사도]의 평을 올려주신 맷코발스키님의 글이 바로 그런 겁니다. 악령을 김치에 싸서 드셔보시라니... 정말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얼마나 유쾌합니까? 저는 그런 것을 원합니다. 사도라는 영화완 별개로 그 글은 읽는 재미가 있지요. 맷코발스님의 재치가 드러나지요. 라캉을 들먹이지 않고도 제게 좋은 비평이란 그런 겁니다.
뤼야님에게 뭔가 강요하고 싶어 댓글을 남기진 않습니다. 라캉의 존재와 영향력에 대한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것 뿐이죠. 설마 인터넷 댓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리가요;;;;;
그리고 <사도>가 아니라 <검은 사제들>이었죠. 말씀하신 독창성도 비평에서 중요한 덕목(아니 모든 글의 중요한 덕목)이겠지만... <검은 사제들>은 지역화 측면에서는 실패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네요. 악령은 나오는데 김치가 나왔는가는 갸우뚱할 작품이죠. 독창성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의 본질을 짚어내는 것 또한 비평의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아니라 <검은 사제들>이었죠. 말씀하신 독창성도 비평에서 중요한 덕목(아니 모든 글의 중요한 덕목)이겠지만... <검은 사제들>은 지역화 측면에서는 실패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네요. 악령은 나오는데 김치가 나왔는가는 갸우뚱할 작품이죠. 독창성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의 본질을 짚어내는 것 또한 비평의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예술작품의 원작에 본질이 있다]는 말은 데이비드 흄이 제시한 길을 따라 전개된 현대적 형이상학에 역행하는 발언입니다. 분명 현대는 흄이 제시한 형이상학의 길을 따라 걸었고 이것은 철학과 미학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만약 마스터충달님께서 원작의 본질은 분명 있다고 하신다면 현대의 미학과 쳘학은 마스터충달님께서 새로 쓰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형이상학적 전복은 홍차넷에 풀만한 것이 아닙니다. 책을 쓰세요. 현대의 모든 형이상학, 그리고 영화의 해석인 미학의 흐름까지 전복시키는... 더 보기
[예술작품의 원작에 본질이 있다]는 말은 데이비드 흄이 제시한 길을 따라 전개된 현대적 형이상학에 역행하는 발언입니다. 분명 현대는 흄이 제시한 형이상학의 길을 따라 걸었고 이것은 철학과 미학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만약 마스터충달님께서 원작의 본질은 분명 있다고 하신다면 현대의 미학과 쳘학은 마스터충달님께서 새로 쓰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형이상학적 전복은 홍차넷에 풀만한 것이 아닙니다. 책을 쓰세요. 현대의 모든 형이상학, 그리고 영화의 해석인 미학의 흐름까지 전복시키는 발언을 지금 하신겁니다.
현대의 형이상학 혹은 미학에 따르면 한 개인과 작품 사이의 관계는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매우 자의적입니다. 시대를 선핵할 수 없는 것은 운명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전근대에 살고 있지 않은데 전근대적 비평만을 해야할 이유는 없지요.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가정하에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 참 뒤떨어진 미학관인 [작품의 본질] 운운은 마스터 충달님이 정성들여 리뷰하시는 모든 영화를 오히려 엿먹이는 짓입니다. 슬프군요. 이런 말씀을 드려야한다는게...
현대의 형이상학 혹은 미학에 따르면 한 개인과 작품 사이의 관계는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매우 자의적입니다. 시대를 선핵할 수 없는 것은 운명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전근대에 살고 있지 않은데 전근대적 비평만을 해야할 이유는 없지요.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가정하에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 참 뒤떨어진 미학관인 [작품의 본질] 운운은 마스터 충달님이 정성들여 리뷰하시는 모든 영화를 오히려 엿먹이는 짓입니다. 슬프군요. 이런 말씀을 드려야한다는게...
본질이라는 표현은 너무 거창한 것 같고, 그렇다고 의미라고 표현하자니 너무 좁은 것 같고... 좀 애매하긴 하네요. 그래도 작품의 핵심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니 본질이란 표현이 제 의도와 많이 벗어나진 않을겁니다. 다만 전근대적 개념과는 다르긴 합니다. (좀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현대적 조류와 궤를 달리한다는 말은 학생시절에도 들었던 말입니다. 당시 교수님은 고대철학에 가까운 것이라 말씀하시기도 하셨죠. 현대 미학 조류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고, 절대주의라는 고대적 가치의 환원일수도 있다... 뭐 이런 평가를 들었던 기... 더 보기
현대적 조류와 궤를 달리한다는 말은 학생시절에도 들었던 말입니다. 당시 교수님은 고대철학에 가까운 것이라 말씀하시기도 하셨죠. 현대 미학 조류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고, 절대주의라는 고대적 가치의 환원일수도 있다... 뭐 이런 평가를 들었던 기... 더 보기
본질이라는 표현은 너무 거창한 것 같고, 그렇다고 의미라고 표현하자니 너무 좁은 것 같고... 좀 애매하긴 하네요. 그래도 작품의 핵심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니 본질이란 표현이 제 의도와 많이 벗어나진 않을겁니다. 다만 전근대적 개념과는 다르긴 합니다. (좀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현대적 조류와 궤를 달리한다는 말은 학생시절에도 들었던 말입니다. 당시 교수님은 고대철학에 가까운 것이라 말씀하시기도 하셨죠. 현대 미학 조류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고, 절대주의라는 고대적 가치의 환원일수도 있다... 뭐 이런 평가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전복이라 할 정도로 경천동지할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늘 있었고 한 때는 주류이기도 했던 시각일 뿐이지요. 이게 \'옛날\'사고 방식에 가까운 것은 맞지만, \'뒤떨어진\'시각이라 표현하는 것은 단정적인 말씀이라고 생각되네요. (뤼야님의 이런 단정적인 태도는 좀 고쳐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홍차넷에서 할 말이 아니라느니, 엿먹이는 짓이라느니, 슬프다느니 하는 표현도 듣는 사람의 심기가 마냥 편안한 말씀은 아닙니다. 표현을 주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그 본질이란 것이 고대/중세의 주장처럼 정해진 단 하나의 정답이라면, 작품의 가치를 훼손한다기 보다. 비평작업 자체를 부정하는 짓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지나친 확대해석과 과도한 의미찾기를 염려하는 정도랄까요. 제가 항상 주장하는 좋은 비평은 공감과 반향을 불러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는 독창성이 있어도 공감을 구할 수 없다면 논란에 그칠 것이고, 공감은 많이 되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할 게 없는 이야기는 가치가 떨어진다 할 수 있습니다. 비평이란 것이 우스갯소리로 \'그럴 듯한 헛소리\'라고 합니다만, 정말 헛소리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염려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만의 유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타당성과 설득력을 포기해선 안 될것이고, 이를 위해서라면 과학적 사고를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간과하면 <협녀>같은 작품을 보고 \'살부살모의 급진적 정치성\'같은 헛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제 주장도 작품의 본질은 없다는 말씀에 동의하는 거라 볼 수 있을겁니다. 결국 제가 지목하는 본질이란 시대와 대중이 선택하거나, 시대와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것을 말하니까요.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본질\'이라고 적은 것이고요) 단 하나의 본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핵심이 들려주는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여러가지가 될 수도 있고, 시대에 따라 변할 수도 있는 것이죠. [작품의 본질은 없다.]라는 말씀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네요. [작품의 본질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어야 하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여담입니다만, 이런 시각이 인기영합주의가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도리어 타당성을 고려하지 않고 급진적 주장을 하는 경우가 논란이 되어 더 많은 노출을 얻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물론 논란 이상의 반향은 없기에 별로 가치를 찾긴 어렵습니다.
현대적 조류와 궤를 달리한다는 말은 학생시절에도 들었던 말입니다. 당시 교수님은 고대철학에 가까운 것이라 말씀하시기도 하셨죠. 현대 미학 조류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고, 절대주의라는 고대적 가치의 환원일수도 있다... 뭐 이런 평가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전복이라 할 정도로 경천동지할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늘 있었고 한 때는 주류이기도 했던 시각일 뿐이지요. 이게 \'옛날\'사고 방식에 가까운 것은 맞지만, \'뒤떨어진\'시각이라 표현하는 것은 단정적인 말씀이라고 생각되네요. (뤼야님의 이런 단정적인 태도는 좀 고쳐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홍차넷에서 할 말이 아니라느니, 엿먹이는 짓이라느니, 슬프다느니 하는 표현도 듣는 사람의 심기가 마냥 편안한 말씀은 아닙니다. 표현을 주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그 본질이란 것이 고대/중세의 주장처럼 정해진 단 하나의 정답이라면, 작품의 가치를 훼손한다기 보다. 비평작업 자체를 부정하는 짓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지나친 확대해석과 과도한 의미찾기를 염려하는 정도랄까요. 제가 항상 주장하는 좋은 비평은 공감과 반향을 불러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는 독창성이 있어도 공감을 구할 수 없다면 논란에 그칠 것이고, 공감은 많이 되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할 게 없는 이야기는 가치가 떨어진다 할 수 있습니다. 비평이란 것이 우스갯소리로 \'그럴 듯한 헛소리\'라고 합니다만, 정말 헛소리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염려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만의 유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타당성과 설득력을 포기해선 안 될것이고, 이를 위해서라면 과학적 사고를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간과하면 <협녀>같은 작품을 보고 \'살부살모의 급진적 정치성\'같은 헛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제 주장도 작품의 본질은 없다는 말씀에 동의하는 거라 볼 수 있을겁니다. 결국 제가 지목하는 본질이란 시대와 대중이 선택하거나, 시대와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것을 말하니까요.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본질\'이라고 적은 것이고요) 단 하나의 본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핵심이 들려주는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여러가지가 될 수도 있고, 시대에 따라 변할 수도 있는 것이죠. [작품의 본질은 없다.]라는 말씀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네요. [작품의 본질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어야 하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여담입니다만, 이런 시각이 인기영합주의가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도리어 타당성을 고려하지 않고 급진적 주장을 하는 경우가 논란이 되어 더 많은 노출을 얻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물론 논란 이상의 반향은 없기에 별로 가치를 찾긴 어렵습니다.
작품의 본질은 하나가 아니고 그것이 본질어야하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는데, 충달님의 미학관에 근거한 비평은 본질에 가깝고 충달님이 보시기에 라캉을 들먹이는 비평가들의 비평은 해석의 감옥에 갖힌 또는 본질을 간과한 해석이라는 것은 어떤 철학적 미학적 근거가 있는지요?
그리고 제가 슬픈데 왜 충달님 기분이 나쁘신건가요? 제 표현에 대한 충고는 그만두시지요. 현대적 철학의 조류를 뒤집을 만한 발언을 접했는데 책쓰라는 말이 뭐가 나쁩니까. 제 글에 끝까지 반응하시면서 제 표현이 이러쿵 저러쿵하는 말로 논의를 흐리지 마세요.... 더 보기
그리고 제가 슬픈데 왜 충달님 기분이 나쁘신건가요? 제 표현에 대한 충고는 그만두시지요. 현대적 철학의 조류를 뒤집을 만한 발언을 접했는데 책쓰라는 말이 뭐가 나쁩니까. 제 글에 끝까지 반응하시면서 제 표현이 이러쿵 저러쿵하는 말로 논의를 흐리지 마세요.... 더 보기
작품의 본질은 하나가 아니고 그것이 본질어야하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는데, 충달님의 미학관에 근거한 비평은 본질에 가깝고 충달님이 보시기에 라캉을 들먹이는 비평가들의 비평은 해석의 감옥에 갖힌 또는 본질을 간과한 해석이라는 것은 어떤 철학적 미학적 근거가 있는지요?
그리고 제가 슬픈데 왜 충달님 기분이 나쁘신건가요? 제 표현에 대한 충고는 그만두시지요. 현대적 철학의 조류를 뒤집을 만한 발언을 접했는데 책쓰라는 말이 뭐가 나쁩니까. 제 글에 끝까지 반응하시면서 제 표현이 이러쿵 저러쿵하는 말로 논의를 흐리지 마세요. 정곡을 찔려서 기분 나쁘신 거라면 손을 터시구요. 제가 무엇이 두려워서 제 표현을 주의해야 합니까? 저는 글로 만드는 텔레토비세상의 나나가 아닙니다. 충달님과의 논의는 아카데믹한 것이지 개인의 감정에 관련된게 아닌데 왜 기분나쁘다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해석과 아닌 해석의 객관성은 어떻게 담보하시는지요?
충달님이 보시기에 말도 안돼는 해석이 난무하는 것이 영화의 비평에 라캉을 들먹이는 것과의 상관관계는 분명 존재하는 것인가요?
제가 알고 있는 철학이나 미학과 전혀 반대방향의 주장을 하고 계시니 제 궁금증이 폭발하네요. 답변 기다리지요.
그리고 제가 슬픈데 왜 충달님 기분이 나쁘신건가요? 제 표현에 대한 충고는 그만두시지요. 현대적 철학의 조류를 뒤집을 만한 발언을 접했는데 책쓰라는 말이 뭐가 나쁩니까. 제 글에 끝까지 반응하시면서 제 표현이 이러쿵 저러쿵하는 말로 논의를 흐리지 마세요. 정곡을 찔려서 기분 나쁘신 거라면 손을 터시구요. 제가 무엇이 두려워서 제 표현을 주의해야 합니까? 저는 글로 만드는 텔레토비세상의 나나가 아닙니다. 충달님과의 논의는 아카데믹한 것이지 개인의 감정에 관련된게 아닌데 왜 기분나쁘다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해석과 아닌 해석의 객관성은 어떻게 담보하시는지요?
충달님이 보시기에 말도 안돼는 해석이 난무하는 것이 영화의 비평에 라캉을 들먹이는 것과의 상관관계는 분명 존재하는 것인가요?
제가 알고 있는 철학이나 미학과 전혀 반대방향의 주장을 하고 계시니 제 궁금증이 폭발하네요. 답변 기다리지요.
우선 전근대적 미학관에 근거한 비평만이 본질에 가깝다는 발언은 한 적이 없습니다.
라캉을 경유하는 비평은 타당성 면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비판적입니다. 굉장히 나이브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 행동의 동기는 욕망보다 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욕망이 모티브인 경우도 있긴 하죠) <협녀>의 주인공이 부모를 죽인 것은 죽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이었지요. 이를 \'살부살모의 급진적 정치성\'이라고 보는 것은 흔한 욕망만능주의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왕의 남자>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 더 보기
라캉을 경유하는 비평은 타당성 면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비판적입니다. 굉장히 나이브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 행동의 동기는 욕망보다 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욕망이 모티브인 경우도 있긴 하죠) <협녀>의 주인공이 부모를 죽인 것은 죽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이었지요. 이를 \'살부살모의 급진적 정치성\'이라고 보는 것은 흔한 욕망만능주의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왕의 남자>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 더 보기
우선 전근대적 미학관에 근거한 비평만이 본질에 가깝다는 발언은 한 적이 없습니다.
라캉을 경유하는 비평은 타당성 면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비판적입니다. 굉장히 나이브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 행동의 동기는 욕망보다 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욕망이 모티브인 경우도 있긴 하죠) <협녀>의 주인공이 부모를 죽인 것은 죽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이었지요. 이를 \'살부살모의 급진적 정치성\'이라고 보는 것은 흔한 욕망만능주의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왕의 남자>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pgr21.com/?b=8&n=53124) 여기서는 죽음을 주체의 의지로 승화하는 이상한 결론을 내기도 하더군요. 이런 허황된 비평의 원인은 정신분석학이라는 것 자체가 가진 학문적, 과학적 타당성의 결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이 라캉에 대해 내적 정합성은 뛰어나나 외적 정합성이 무너졌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라캉의 이론에 따라 작품을 비평한다면 그의 이론 안에서 충분히 효과적으로 발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부적 지적, 특히 심리학적 성과에 의한 반론에는 타협안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반박을 받아야 하죠. 물론 때때로 외부 요인들과도 충돌하지 않는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지만, 얻어걸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굉장히 적다는 것도 문제일 겁니다.
전근대적 미학관만이 올바른 자세라고 주장할 생각도, 주장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소피스트적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컬트무비 같은 경우는 절대주의적 관점으로는 그 가치를 판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죠) 단, 라캉만은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라캉을 계속 파고든다 하더라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인정과 반성 그리고 수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만의 유희와 현학적 헛소리에 점철된, 대중과 괴리된 비평계만 남을거라 생각합니다.
라캉을 경유하는 비평은 타당성 면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비판적입니다. 굉장히 나이브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 행동의 동기는 욕망보다 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욕망이 모티브인 경우도 있긴 하죠) <협녀>의 주인공이 부모를 죽인 것은 죽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이었지요. 이를 \'살부살모의 급진적 정치성\'이라고 보는 것은 흔한 욕망만능주의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왕의 남자>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pgr21.com/?b=8&n=53124) 여기서는 죽음을 주체의 의지로 승화하는 이상한 결론을 내기도 하더군요. 이런 허황된 비평의 원인은 정신분석학이라는 것 자체가 가진 학문적, 과학적 타당성의 결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이 라캉에 대해 내적 정합성은 뛰어나나 외적 정합성이 무너졌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라캉의 이론에 따라 작품을 비평한다면 그의 이론 안에서 충분히 효과적으로 발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부적 지적, 특히 심리학적 성과에 의한 반론에는 타협안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반박을 받아야 하죠. 물론 때때로 외부 요인들과도 충돌하지 않는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지만, 얻어걸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굉장히 적다는 것도 문제일 겁니다.
전근대적 미학관만이 올바른 자세라고 주장할 생각도, 주장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소피스트적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컬트무비 같은 경우는 절대주의적 관점으로는 그 가치를 판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죠) 단, 라캉만은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라캉을 계속 파고든다 하더라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인정과 반성 그리고 수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만의 유희와 현학적 헛소리에 점철된, 대중과 괴리된 비평계만 남을거라 생각합니다.
마스터충달 님// 제 질문에 제대로된 답변이 아닙니다. 저는 미학적 철학적 근거를 달라고 했지 피지알에 올라온 글에는 관심없습니다. 개별사례를 들먹이며 일반론처럼 포장하시지 말고 납득할 만한 형이상학적 근거를 대세요. 처음 발언은 분명 일반론처럼 거대하게 시작하셔놓고 왜 개별사례로 제 질문을 무마하십니까? 어떤 분이라니 누구입니까? 그분의 주장에 동의하셨으니 그분(?)의 철학적 미학적 근거에도 동의하시겠지요? 그분이라는 말로 퉁치치 마시고 그분의 형이상학을 이야기하세요. 그래야 제대로 논의를 하지요.
라캉를 들먹이는 비평가들이 작품의 본질을 비껴가고 있다는 충달님의 발언은 어떤 객관성을 담보합니까? 그냥 충달님 개인의 사견입니까?
라캉를 들먹이는 비평가들이 작품의 본질을 비껴가고 있다는 충달님의 발언은 어떤 객관성을 담보합니까? 그냥 충달님 개인의 사견입니까?
\'쯧쯧쯧\' 하는 기분이 드는 표현인데 기분이 안 나쁠 수가 없지요;;; 정곡을 찔려서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참....) 교조적이고 고압적이라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무시받는 듯한 기분을 금할길이 없는데 말이죠. 내용이 아카데믹하다고 조소하는 듯한 표현이 허락되는 건 아닐겁니다.
부탁인데 이런 표현 좀 안해주시면 안 될까요? 굳이 이렇게 비꼼이 들어간 표현들을 쓰지 않아도 말씀 잘 하시는 분이잖아요;; 저도 또 흥분하고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표현에 대해서는 이 댓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본인께서 계속 그렇게 하시겠다면 뭐 운영진이 제제 하지 않는 한 제가 뭘 강제 할 수는 없으니까요. 부탁드릴뿐입니다.
부탁인데 이런 표현 좀 안해주시면 안 될까요? 굳이 이렇게 비꼼이 들어간 표현들을 쓰지 않아도 말씀 잘 하시는 분이잖아요;; 저도 또 흥분하고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표현에 대해서는 이 댓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본인께서 계속 그렇게 하시겠다면 뭐 운영진이 제제 하지 않는 한 제가 뭘 강제 할 수는 없으니까요. 부탁드릴뿐입니다.
마스터충달님// 죄송한데 제 글에 먼저 폭력을 휘두른 분은 마스터충달님입니다. 왜 제대로 답변은 안하시고 표현이 어떻다는 둥하시면서 본질을 흐리십니까? 피지알에 올라온 글이나 그분(누군가요? 도대체...)의 발언따위로 제 글이 훼손당하는 꼴을 저도 좌시할수는 없지요. 제글이 교조적고 고압적이라 싫으시면 보지마세요. 저도 충달님 글 안봐요. 왜 보면서 뭐라합니까? 신고하시고 차단하세요. 저 안말립니다. 저를 한 수 가르쳐 보겠다고 하신다면 제대로 공부하고 오시던지요. 제대로 논의를 못할것 같으면 손털면 되지 예의운운하는게 웃기네요.운영진 찾지마시고 답변주시지요.
뤼야 님// 그것이 전형적이라는 걸 증명하려면 정신분석학을 바탕에 둔 비평들 중 비슷한 오류를 포함하는 비평의 비율을 말씀드려야 될텐데 제가 그렇게 까지 찾을 능력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살면서 봐온 것들이 공통적으로 저런 면모를 보였다고 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그런데 그런 정도로까지 경향적 문제점의 증거를 대는 저작들이 있는 것 같지도 않네요;; 더불어 일반론적으로 성립 가능한 명제도 제시했습니다.
라캉이 내적 정합성이 뛰어나다는 것이야 뤼야님이 더 잘 아실테고요. 외적 정합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어떻게 비주류화 되었는가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미국 심리학회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해 연구하는 비율은 채 10%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학문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라캉이 내적 정합성이 뛰어나다는 것이야 뤼야님이 더 잘 아실테고요. 외적 정합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어떻게 비주류화 되었는가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미국 심리학회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해 연구하는 비율은 채 10%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학문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마스터충달 님//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과학적 결여가 대체 어떻게 영화나 문학에 라캉을 접목시키는 비평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는지요. 그런 식의 비판이 가능하다면 라캉만이 아니라 어느 철학자든 영화와 문학을 말하는 과정에서 언급될 수 없을 겁니다. 인간의 심리적 경향성이 헤겔이 상정한 정신현상의 도상 위에 있지 않거늘 헤겔은 어찌 영화와 문학에 도입할 수 있겠습니까. 헤겔 이후의 대륙철학은 또 어떻고요. 그것들이 라캉보다 허황되지 않나요? 명백히 인간 의식의 경향성을 말하고 있는데요.
충달님께서 언급하신 포스트에서 문제시하는...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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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충달 님//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과학적 결여가 대체 어떻게 영화나 문학에 라캉을 접목시키는 비평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는지요. 그런 식의 비판이 가능하다면 라캉만이 아니라 어느 철학자든 영화와 문학을 말하는 과정에서 언급될 수 없을 겁니다. 인간의 심리적 경향성이 헤겔이 상정한 정신현상의 도상 위에 있지 않거늘 헤겔은 어찌 영화와 문학에 도입할 수 있겠습니까. 헤겔 이후의 대륙철학은 또 어떻고요. 그것들이 라캉보다 허황되지 않나요? 명백히 인간 의식의 경향성을 말하고 있는데요.
충달님께서 언급하신 포스트에서 문제시하는 이현경은 라캉의 상징계란 표현을 빌리긴 합니다(전 해당 표현이 작품에 대한 서술로서 왜 부적합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라캉을 빌어왔기 때문에 저런 말도 안 되는 비평이나 늘어놓는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운데, [같은 방식으로] 하이데거를 빌어온다면 더 극단적인 이야기도 가능하기 때문이죠. \'존재의 목적이 죽음이란 현존재의 자기인식에 사로 잡힌 인물들\'과 같은 도식으로요. 그리고 전 그런 맥락에서 \'저와 같은 논조의 비평\'에서 인용되는 학자라고 한다면 헤겔부터 바바(탈식민론을 제기했던 호미 바바이야기입니다)까지 무수히 많이 봤는걸요. 충달님께서 그중 라캉의 이름을 많이 접하셨다면 라캉을 유독 좋아했던 평론가들에게 먼저 물어야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충달님께서 언급하신 포스트에서 문제시하는 이현경은 라캉의 상징계란 표현을 빌리긴 합니다(전 해당 표현이 작품에 대한 서술로서 왜 부적합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라캉을 빌어왔기 때문에 저런 말도 안 되는 비평이나 늘어놓는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운데, [같은 방식으로] 하이데거를 빌어온다면 더 극단적인 이야기도 가능하기 때문이죠. \'존재의 목적이 죽음이란 현존재의 자기인식에 사로 잡힌 인물들\'과 같은 도식으로요. 그리고 전 그런 맥락에서 \'저와 같은 논조의 비평\'에서 인용되는 학자라고 한다면 헤겔부터 바바(탈식민론을 제기했던 호미 바바이야기입니다)까지 무수히 많이 봤는걸요. 충달님께서 그중 라캉의 이름을 많이 접하셨다면 라캉을 유독 좋아했던 평론가들에게 먼저 물어야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스터충달 님// 이참에 비평에 대한 \"작품의 본질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충달님의 정의에도 물음을 던지고 싶군요.
만약 작품에 있어 본질이라는 것이 작품 내적으로 충분히 풀이되는 것이라고 말해봅시다. 그럼 비평은 그 의미를 잃습니다. 이미 작품이 자기 본질을 더할나위없이 구현하고 있는데 비평이 무슨 소용일까요. 열위의 시뮬라크럼을 양산하는데 그칠 뿐이죠.
반대로 작품에 있어 본질은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상정해봅시다. 이번에는 어떤 비평이든 충달님께서 문제시하신 \'자의성\'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더 보기
만약 작품에 있어 본질이라는 것이 작품 내적으로 충분히 풀이되는 것이라고 말해봅시다. 그럼 비평은 그 의미를 잃습니다. 이미 작품이 자기 본질을 더할나위없이 구현하고 있는데 비평이 무슨 소용일까요. 열위의 시뮬라크럼을 양산하는데 그칠 뿐이죠.
반대로 작품에 있어 본질은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상정해봅시다. 이번에는 어떤 비평이든 충달님께서 문제시하신 \'자의성\'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더 보기
마스터충달 님// 이참에 비평에 대한 \"작품의 본질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충달님의 정의에도 물음을 던지고 싶군요.
만약 작품에 있어 본질이라는 것이 작품 내적으로 충분히 풀이되는 것이라고 말해봅시다. 그럼 비평은 그 의미를 잃습니다. 이미 작품이 자기 본질을 더할나위없이 구현하고 있는데 비평이 무슨 소용일까요. 열위의 시뮬라크럼을 양산하는데 그칠 뿐이죠.
반대로 작품에 있어 본질은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상정해봅시다. 이번에는 어떤 비평이든 충달님께서 문제시하신 \'자의성\'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작품에서 충분치 못한 본질을 비평을 통해 확보해야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본질을 비추는 거울]의 타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 건 작품 바깥의 초월적 기준이 됩니다. 이때 서로 다른 초월적 기준을 대입시킨 비평들의 성패를 가리는 게 문제가 되는데, 이 초월적 기준 중 무엇이 타당한 건지 판단할 잣대를 어디에 둘 것이냐가 문제되겠죠. 작품 안으로 돌아가 작품으로 판단하는 것? 순환론에 빠지는 겁니다. 작품이 불충분하여 본질을 비출 거울이 필요하댔는데 그 거울이 얼마나 덜 왜곡된 상을 비추는지 다시 작품을 통해 확인한다는 건 이율배반이 있으니까요. 아니면 충달님께서 언급하셨던 대중의 공감과 반향? 이는 보편과 초월성을 동치시키며 통해 결과야 당장에 쉽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만, 이 문제에 있어선 보편과 초월성을 동치시킨 자체를 절대전제 삼는 것으로 물음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작품에 있어 본질이라는 것이 작품 내적으로 충분히 풀이되는 것이라고 말해봅시다. 그럼 비평은 그 의미를 잃습니다. 이미 작품이 자기 본질을 더할나위없이 구현하고 있는데 비평이 무슨 소용일까요. 열위의 시뮬라크럼을 양산하는데 그칠 뿐이죠.
반대로 작품에 있어 본질은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상정해봅시다. 이번에는 어떤 비평이든 충달님께서 문제시하신 \'자의성\'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작품에서 충분치 못한 본질을 비평을 통해 확보해야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본질을 비추는 거울]의 타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 건 작품 바깥의 초월적 기준이 됩니다. 이때 서로 다른 초월적 기준을 대입시킨 비평들의 성패를 가리는 게 문제가 되는데, 이 초월적 기준 중 무엇이 타당한 건지 판단할 잣대를 어디에 둘 것이냐가 문제되겠죠. 작품 안으로 돌아가 작품으로 판단하는 것? 순환론에 빠지는 겁니다. 작품이 불충분하여 본질을 비출 거울이 필요하댔는데 그 거울이 얼마나 덜 왜곡된 상을 비추는지 다시 작품을 통해 확인한다는 건 이율배반이 있으니까요. 아니면 충달님께서 언급하셨던 대중의 공감과 반향? 이는 보편과 초월성을 동치시키며 통해 결과야 당장에 쉽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만, 이 문제에 있어선 보편과 초월성을 동치시킨 자체를 절대전제 삼는 것으로 물음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스터충달 님// 그외에 말씀을 보니 궁금한 게 있어 몇자 더 달겠습니다.
지인 분께서 라캉 철학의 문제를 외적 정합성의 부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보통 라캉철학이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비판받는 건 반대로 내적 정합성이 철두철미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지젝이 라캉의 학적 엄밀성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며,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위치를 명확히 하려는 거죠. 내적 정합성이 엄밀치 못하니까요.
그리고 (외적 정합성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지니 달리 바꾸자면) 외적 준거와의 조응이 문제시되는 걸로 친다면 여느 철학자의... 더 보기
지인 분께서 라캉 철학의 문제를 외적 정합성의 부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보통 라캉철학이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비판받는 건 반대로 내적 정합성이 철두철미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지젝이 라캉의 학적 엄밀성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며,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위치를 명확히 하려는 거죠. 내적 정합성이 엄밀치 못하니까요.
그리고 (외적 정합성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지니 달리 바꾸자면) 외적 준거와의 조응이 문제시되는 걸로 친다면 여느 철학자의... 더 보기
마스터충달 님// 그외에 말씀을 보니 궁금한 게 있어 몇자 더 달겠습니다.
지인 분께서 라캉 철학의 문제를 외적 정합성의 부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보통 라캉철학이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비판받는 건 반대로 내적 정합성이 철두철미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지젝이 라캉의 학적 엄밀성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며,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위치를 명확히 하려는 거죠. 내적 정합성이 엄밀치 못하니까요.
그리고 (외적 정합성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지니 달리 바꾸자면) 외적 준거와의 조응이 문제시되는 걸로 친다면 여느 철학자의 어떤 사상/개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라캉 이전에 촘스키 언어학을 (무려 촘스키를 프로이트와 도매로 싸잡으며)환원적이라 비판했던 들뢰즈가 가장 먼저 부정되어야겠지요. 인간 의식의 지향성을 준거로 인간/혹은 그외 다른 것들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해 궁구했던 현상학은 그 지향성 자체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문제시하는 진화심리학과 인지과학의 도래 앞에서 어찌 자유로울 수 있는지 궁금하고요.
지인 분께서 라캉 철학의 문제를 외적 정합성의 부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보통 라캉철학이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비판받는 건 반대로 내적 정합성이 철두철미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지젝이 라캉의 학적 엄밀성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며,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위치를 명확히 하려는 거죠. 내적 정합성이 엄밀치 못하니까요.
그리고 (외적 정합성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지니 달리 바꾸자면) 외적 준거와의 조응이 문제시되는 걸로 친다면 여느 철학자의 어떤 사상/개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라캉 이전에 촘스키 언어학을 (무려 촘스키를 프로이트와 도매로 싸잡으며)환원적이라 비판했던 들뢰즈가 가장 먼저 부정되어야겠지요. 인간 의식의 지향성을 준거로 인간/혹은 그외 다른 것들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해 궁구했던 현상학은 그 지향성 자체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문제시하는 진화심리학과 인지과학의 도래 앞에서 어찌 자유로울 수 있는지 궁금하고요.
팟저 님// 아마도 한국 비평계의 지나친 라캉 의존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네요. 말씀하신데로 하이데거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라캉을 내세워 이상한 글을 내놓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것도 제가 본 바에 불과할 뿐이긴 합니다)
다만 다른 사조들은 사실판단적 비판 가능성이 적고, 반론이 있다해도 무엇이 옳다/그르다 나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과학적 결과 덕에 옳다/그르다의 문제로 논의 가능한 영역이 많죠. 헤겔도 같은 논리로 비판할 수 있을겁니다. (솔직히 현대 이전의 철학 사조 중에는 과학적... 더 보기
다만 다른 사조들은 사실판단적 비판 가능성이 적고, 반론이 있다해도 무엇이 옳다/그르다 나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과학적 결과 덕에 옳다/그르다의 문제로 논의 가능한 영역이 많죠. 헤겔도 같은 논리로 비판할 수 있을겁니다. (솔직히 현대 이전의 철학 사조 중에는 과학적... 더 보기
팟저 님// 아마도 한국 비평계의 지나친 라캉 의존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네요. 말씀하신데로 하이데거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라캉을 내세워 이상한 글을 내놓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것도 제가 본 바에 불과할 뿐이긴 합니다)
다만 다른 사조들은 사실판단적 비판 가능성이 적고, 반론이 있다해도 무엇이 옳다/그르다 나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과학적 결과 덕에 옳다/그르다의 문제로 논의 가능한 영역이 많죠. 헤겔도 같은 논리로 비판할 수 있을겁니다. (솔직히 현대 이전의 철학 사조 중에는 과학적 오류를 갖는 경우가 꽤 있죠. 단 그 부분에 대한 반성은 과학적 성과 이전에 철학 내에서 스스로 이뤄진 경우가 많고, 그런 오류 지적이 전체 사상이 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경우도 적고요) 근데 헤겔이나 다른 철학 사조를 내세우기 보단 다들 라캉만 주구장창 언급하니... (저도 왜 죄다 라캉만 들먹이는지 궁금하네요;; 하이데거를 언급했다면 제가 관심갖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근데 심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비판은, 팟저님이 지적하신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심리를 종합적으로 통합하는 심리학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제한된 측면만을 다루는 상이한 이론들만 있을 뿐 통합적 이론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듯요...) 즉,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비슷한 내용이더라도 심리학적으로 반박을 놓기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특수한 상황에 대한 개별 이론으로 인간 사유에 대한 통합적 사조를 반박할 도리는 없겠죠. 그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그 내용 자체가 심리와 행동에 대한 것이다 보니 겹치는 영역만큼 반박의 근거가 존재합니다. 결국 비유하자면 물어뜯을만해 보이니깐 라캉만 물어뜯는 것이죠. 이를 뒤집어 말하면 물어뜯길만한 라캉을 수정없이 계속 내세워선 안 된다는 말도 되고요. 그래서 정신분석학적 주장을 하는 분과 논쟁을 하면 그 주제에 따라 상이한 이론들을 다 따로따로 들고와야 되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비평의 경우 작품이라는 제한적 상황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심리학적 비판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어떤 철학 이론을 통째로 깨부술 심리학 이론은 없을 겁니다. (이러니 내적 정합성이 뛰어난 라캉을 그 자체로 논파 하기는 힘듭니다. 결국 개별사안마다 따로 접근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 될지도 모르죠)
다만 다른 사조들은 사실판단적 비판 가능성이 적고, 반론이 있다해도 무엇이 옳다/그르다 나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과학적 결과 덕에 옳다/그르다의 문제로 논의 가능한 영역이 많죠. 헤겔도 같은 논리로 비판할 수 있을겁니다. (솔직히 현대 이전의 철학 사조 중에는 과학적 오류를 갖는 경우가 꽤 있죠. 단 그 부분에 대한 반성은 과학적 성과 이전에 철학 내에서 스스로 이뤄진 경우가 많고, 그런 오류 지적이 전체 사상이 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경우도 적고요) 근데 헤겔이나 다른 철학 사조를 내세우기 보단 다들 라캉만 주구장창 언급하니... (저도 왜 죄다 라캉만 들먹이는지 궁금하네요;; 하이데거를 언급했다면 제가 관심갖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근데 심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비판은, 팟저님이 지적하신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심리를 종합적으로 통합하는 심리학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제한된 측면만을 다루는 상이한 이론들만 있을 뿐 통합적 이론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듯요...) 즉,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비슷한 내용이더라도 심리학적으로 반박을 놓기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특수한 상황에 대한 개별 이론으로 인간 사유에 대한 통합적 사조를 반박할 도리는 없겠죠. 그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그 내용 자체가 심리와 행동에 대한 것이다 보니 겹치는 영역만큼 반박의 근거가 존재합니다. 결국 비유하자면 물어뜯을만해 보이니깐 라캉만 물어뜯는 것이죠. 이를 뒤집어 말하면 물어뜯길만한 라캉을 수정없이 계속 내세워선 안 된다는 말도 되고요. 그래서 정신분석학적 주장을 하는 분과 논쟁을 하면 그 주제에 따라 상이한 이론들을 다 따로따로 들고와야 되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비평의 경우 작품이라는 제한적 상황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심리학적 비판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어떤 철학 이론을 통째로 깨부술 심리학 이론은 없을 겁니다. (이러니 내적 정합성이 뛰어난 라캉을 그 자체로 논파 하기는 힘듭니다. 결국 개별사안마다 따로 접근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 될지도 모르죠)
마스터충달 님// 라캉은 전기와 후기에도 자신의 입장을 바꾸며 자기 사상의 엄밀치 못함을 그 자신이 느꼈기에 자기 저서를 불태우려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라캉의 내적 논리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축해서 라캉을 비판하는 과정은 들뢰즈나 지젝, 사사키 아타루가 이미 하고 있기도 하고요. 내적 정합성이 별로 탄탄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반면 그 개념들은 그 와중에도 건질 것들이 있기 때문이고요. 인상 비평 차원에서 라캉을 비판하는 것과 좀 더 전문적으로 라캉을 비판하는 건 궤가 좀 다른데... 인상비평 수준을 벗어난 라캉 비판은 대부분 그 내적... 더 보기
마스터충달 님// 라캉은 전기와 후기에도 자신의 입장을 바꾸며 자기 사상의 엄밀치 못함을 그 자신이 느꼈기에 자기 저서를 불태우려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라캉의 내적 논리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축해서 라캉을 비판하는 과정은 들뢰즈나 지젝, 사사키 아타루가 이미 하고 있기도 하고요. 내적 정합성이 별로 탄탄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반면 그 개념들은 그 와중에도 건질 것들이 있기 때문이고요. 인상 비평 차원에서 라캉을 비판하는 것과 좀 더 전문적으로 라캉을 비판하는 건 궤가 좀 다른데... 인상비평 수준을 벗어난 라캉 비판은 대부분 그 내적 정합성에 대한 비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비판자가 어느 진영에 있던지요. 과학자, 내지는 과학철학자들이 라캉을 비판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지요.
[현대 이전의 철학 사조 중에는 과학적 오류를 갖는 경우가 꽤 있죠. 단 그 부분에 대한 반성은 과학적 성과 이전에 철학 내에서 스스로 이뤄진 경우가 많고, 그런 오류 지적이 전체 사상이 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경우도 적고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단 전체 사상을 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경우가 적은 게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많은 형이상학의 경우 인간의 의식 지향을 특정한 방식으로 기반하여, 그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걸요. 그리고... 언급했던 아예 과학의 특정한 방법론과 세계 인식을 부정하는 식으로 자기 사상을 전개하는 학자들이 많지요. 아니... 실상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여기 포함될 겁니다. 아예 들뢰즈의 경우 위에서도 말했듯 촘스키의 언어학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같은 궤에 올리며 같은 식의 강박과 환원을 갖고 있다고 부정하는데요.
[현대 이전의 철학 사조 중에는 과학적 오류를 갖는 경우가 꽤 있죠. 단 그 부분에 대한 반성은 과학적 성과 이전에 철학 내에서 스스로 이뤄진 경우가 많고, 그런 오류 지적이 전체 사상이 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경우도 적고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단 전체 사상을 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경우가 적은 게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많은 형이상학의 경우 인간의 의식 지향을 특정한 방식으로 기반하여, 그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걸요. 그리고... 언급했던 아예 과학의 특정한 방법론과 세계 인식을 부정하는 식으로 자기 사상을 전개하는 학자들이 많지요. 아니... 실상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여기 포함될 겁니다. 아예 들뢰즈의 경우 위에서도 말했듯 촘스키의 언어학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같은 궤에 올리며 같은 식의 강박과 환원을 갖고 있다고 부정하는데요.
팟저 님// 과학적 방법론을 부정하는 것이 과학적 오류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물론 과학이냐 아니냐는 것은 어떤 결과가 아닌 그 방법론적으로 분류된다 보는 것이 맞지만 제가 언급한 과학적 오류란 1+1=3 같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과 반하는 내용을 뜻합니다. 방법론과는 별개의 이야기죠.
라캉의 내적 정합성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게 없어서;;; 그렇게 부정당한지는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외적 정합성이 반대로 보장받는 것은 아니니 내적 정합성의 문제가 제 주장에 영향이 있는 것 같진 않네요.
말씀하신 진화심리학과 인지과학의 도래 앞에서 현상학에 대한 대답으로 제가 생각하는 사람은 메를로-퐁티였습니다.
라캉의 내적 정합성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게 없어서;;; 그렇게 부정당한지는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외적 정합성이 반대로 보장받는 것은 아니니 내적 정합성의 문제가 제 주장에 영향이 있는 것 같진 않네요.
말씀하신 진화심리학과 인지과학의 도래 앞에서 현상학에 대한 대답으로 제가 생각하는 사람은 메를로-퐁티였습니다.
마스터충달 님// 유사성으로 따진다면 근래 마음이론에서 인간의 마음이 모니터에 가까우며 그 판단은 의회마냥 서로 다른 의견들의 거수대립으로 이루어진다는 추론 역시 헤겔의 자기의식 간 대립 사이의 연관성을 상정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헤겔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은 곧잘 과학계로부터 대개 사이비로 취급되거나 인문학계에서도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죠. 어디까지나 헤겔의 철학을 과학에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하며 헤겔을 과학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과 헤겔이 과학적이라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요. 이것이야말로 포퍼가 가장 날을 ... 더 보기
마스터충달 님// 유사성으로 따진다면 근래 마음이론에서 인간의 마음이 모니터에 가까우며 그 판단은 의회마냥 서로 다른 의견들의 거수대립으로 이루어진다는 추론 역시 헤겔의 자기의식 간 대립 사이의 연관성을 상정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헤겔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은 곧잘 과학계로부터 대개 사이비로 취급되거나 인문학계에서도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죠. 어디까지나 헤겔의 철학을 과학에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하며 헤겔을 과학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과 헤겔이 과학적이라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요. 이것이야말로 포퍼가 가장 날을 세웠던 초월성/형이상학의 과학주의입니다. 헤겔이 진정 과학적이 되기 위해서는 헤겔과 현대 마음이론 사이의 유사성을 맞춰보는 게 아니라 헤겔의 논리에 입각해서 현대 마음이론을 부정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 같은 지평의 이론 투쟁은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요.
뤼야 님// 내적 정합성만 만족하는 대표적인 예가 성경이죠. \'성경 말씀은 옳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니까\'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 에 특수한 권위를 부여해 논리를 완성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권위를 제거하면 아주 단순한 논리적 오류에 불과해지죠.
이건 좀 저급 예시이긴 한데 이거랑 비슷한 식이라는 겁니다. 내적으로 완결성을 갖췄는데 그게 과학, 경제, 법 등등 다양한 학문들이 이뤄놓은 시대적 패러다임 비슷한 말로 상식안에서 용납할 수 없다면 그건 논리적으로 완벽하나 결국 헛소리가 되는 셈이죠.
외적으로도 완결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인문학에서 논문심사는 뭐하러 해야되겠습니까? 각 논문마다 각자의 내적 완결성은 갖추고 있을텐데 말이죠.
이건 좀 저급 예시이긴 한데 이거랑 비슷한 식이라는 겁니다. 내적으로 완결성을 갖췄는데 그게 과학, 경제, 법 등등 다양한 학문들이 이뤄놓은 시대적 패러다임 비슷한 말로 상식안에서 용납할 수 없다면 그건 논리적으로 완벽하나 결국 헛소리가 되는 셈이죠.
외적으로도 완결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인문학에서 논문심사는 뭐하러 해야되겠습니까? 각 논문마다 각자의 내적 완결성은 갖추고 있을텐데 말이죠.
마스터충달 님// 좀 과격하게 비유하겠습니다. 그러한 \'올바른 상호조응\'이 대체 창조진화론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창조론도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현대 과학의 성과에 발맞춰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으며 \'창조론적 해석\'도 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과 창조론적 해석이 대체 얼마나 차이가 있고 창조론과 달리 어떤 필연성을 갖는 건가요. 여기에 대한 답은 과학이 쥐어주지 않지요. 단순히 발을 맞춘다고 해서 인문학이 과학이 되는 게 아니죠. 도리어 창조진화론마냥 사이비과학... 더 보기
마스터충달 님// 좀 과격하게 비유하겠습니다. 그러한 \'올바른 상호조응\'이 대체 창조진화론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창조론도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현대 과학의 성과에 발맞춰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으며 \'창조론적 해석\'도 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과 창조론적 해석이 대체 얼마나 차이가 있고 창조론과 달리 어떤 필연성을 갖는 건가요. 여기에 대한 답은 과학이 쥐어주지 않지요. 단순히 발을 맞춘다고 해서 인문학이 과학이 되는 게 아니죠. 도리어 창조진화론마냥 사이비과학으로 오염될 [위험]이 있겠죠. 실제로 그런 사례를 종종 발견할 수 있고요. 가장 터무니없는 사례로 동양철학과 물리학의 만남 등이 있겠네요.
현대 인문학자들이 윌슨의 통섭 이후 진화심리학/인지과학(이라고 마냥 묶어버리기에 이 둘은 접근 방법 자체가 워낙 상이하긴 하며 하나의 궤에서 모조리 과학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만 편의를 위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용서하시길.)의 도래에 바들바들 떨었던 이유가 그 성과들이 지금까지 인문학의 논지와 이반되는 주장을 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 도래 자체가 이전까지 인문학의 영역이라 상정해왔던 것에서 인문학을 추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과학을 뛰어넘는 인과율은 없으니까요. 설혹 그 인과율에서 과거 인문학과 유사한 무엇이 상정된다고 한들 그건 인문학의 성과가 아니며, 해당 사상이 과학적이란 걸 말해주지도 못합니다.
제게 있어 인문학은 그저 에쎄이에 불과합니다. 문학이요. 그리고 이른바 \'대륙철학\'에 기반하여 사유를 전개하는 이들이 오늘날 [인문학은 문학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단지 다른 입장에 서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과학의 시대에 걸맞게 인문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현대 인문학자들이 윌슨의 통섭 이후 진화심리학/인지과학(이라고 마냥 묶어버리기에 이 둘은 접근 방법 자체가 워낙 상이하긴 하며 하나의 궤에서 모조리 과학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만 편의를 위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용서하시길.)의 도래에 바들바들 떨었던 이유가 그 성과들이 지금까지 인문학의 논지와 이반되는 주장을 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 도래 자체가 이전까지 인문학의 영역이라 상정해왔던 것에서 인문학을 추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과학을 뛰어넘는 인과율은 없으니까요. 설혹 그 인과율에서 과거 인문학과 유사한 무엇이 상정된다고 한들 그건 인문학의 성과가 아니며, 해당 사상이 과학적이란 걸 말해주지도 못합니다.
제게 있어 인문학은 그저 에쎄이에 불과합니다. 문학이요. 그리고 이른바 \'대륙철학\'에 기반하여 사유를 전개하는 이들이 오늘날 [인문학은 문학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단지 다른 입장에 서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과학의 시대에 걸맞게 인문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마스터충달 님// 시대적 패러다임은 그럼 철학이나 미학이 아닙니까? 상식입니까? 과학입니까? 아니면 그럼 뭡니까? 지금 주장하시는건 상식에 어긋나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철학과 미학,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한 비평이 상식에 부합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철학자들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갔다는 말을 듣는 건지요?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가진 내적완결성이 왜 비판받지 못하는지랑 이거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떤 철학자의 책이나 미학자의 책도 성경이 가진 권위를 누린 적이 없어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더 보기
마스터충달 님// 시대적 패러다임은 그럼 철학이나 미학이 아닙니까? 상식입니까? 과학입니까? 아니면 그럼 뭡니까? 지금 주장하시는건 상식에 어긋나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철학과 미학,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한 비평이 상식에 부합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철학자들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갔다는 말을 듣는 건지요?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가진 내적완결성이 왜 비판받지 못하는지랑 이거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떤 철학자의 책이나 미학자의 책도 성경이 가진 권위를 누린 적이 없어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논문을 심사하는거랑 이거랑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인문학적 논문이야말로 내적 완결이 중요한 걸텐데 그걸 못해 떨어지는거 아닌가요? 저는 잘 모릅니다. 왜 떨어지는지... 내적완결이 잘 됐는데 외적완결성이 부족해 떨어진다는 말의 객관성은 어찌 담보합니까?
논문을 심사하는거랑 이거랑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인문학적 논문이야말로 내적 완결이 중요한 걸텐데 그걸 못해 떨어지는거 아닌가요? 저는 잘 모릅니다. 왜 떨어지는지... 내적완결이 잘 됐는데 외적완결성이 부족해 떨어진다는 말의 객관성은 어찌 담보합니까?
뤼야 님// 성경의 비유가 성경같은 권리를 보장해야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 비유에서 이 댓글의 대답은 해드린것 같습니다. 쭉 말씀드렸다시피 공감과 타당성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과거에 비 상식적이라 비판받고 후대에 제대로 평가받는 경우는 꽤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도 그에 대한 비판도 시대가 평가하겠죠. 전 그 와중에 제가 할 수 있는 비판을 하는 것 뿐이라 봅니다.
논문심사를 말씀드린건 내적 정합성만이 전부라면 논문과 같은 타인의 심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논의가 이 문제에 천착하는 건 옳지 못할 것 같군요. 제 비유가 별로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 상식적이라 비판받고 후대에 제대로 평가받는 경우는 꽤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도 그에 대한 비판도 시대가 평가하겠죠. 전 그 와중에 제가 할 수 있는 비판을 하는 것 뿐이라 봅니다.
논문심사를 말씀드린건 내적 정합성만이 전부라면 논문과 같은 타인의 심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논의가 이 문제에 천착하는 건 옳지 못할 것 같군요. 제 비유가 별로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음... 저는 철학이란 어떤 철학자가 어떤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는 것이 그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겨우 자연과학을 전공한 과거가 전부인 일반인인 제가 감히 빅네임들의 책을 겁도 없이 들추어본건 저 자신에 대한 깊은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이 자리, 이 시간 여기 존재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의 실체는 대체 무얼까 하고요. 이건 결국 증명이 불가능한 당위(신)의 영역임을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인과율을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는 영역이었죠.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공부가 이제는 즐거움이 되었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리니시아님은 제게 얼마나 중요한 질문을 던진 건지 아실런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책을 파도 그 대답은 없습니다. 대답이라고 한다면 책을 파서 얻는 것이 아니고, [책을 파는 과정 그 자체]일 뿐이지요. 빅네임으로 대답하자면 니체의 철학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생명의 절대적 가치 또는 의미는 단순한 종교적 믿음일 뿐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니힐리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신자가 되거나 신의 자리에 인간을 둔 휴머니스트(좌파)의 길을 선택해야하 하죠. 좌파적 철학작인 알랭 바디우가 ... 더 보기
지금 리니시아님은 제게 얼마나 중요한 질문을 던진 건지 아실런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책을 파도 그 대답은 없습니다. 대답이라고 한다면 책을 파서 얻는 것이 아니고, [책을 파는 과정 그 자체]일 뿐이지요. 빅네임으로 대답하자면 니체의 철학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생명의 절대적 가치 또는 의미는 단순한 종교적 믿음일 뿐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니힐리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신자가 되거나 신의 자리에 인간을 둔 휴머니스트(좌파)의 길을 선택해야하 하죠. 좌파적 철학작인 알랭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서 역설한 \'선언적 인간\'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중2병으로 시작했겠지요. 중2병이 저절로 치유될 무렵에는 사냥꾼이 사냥을 나가서 토끼나 너구리대신 맹수같은 큰 사냥감을 노리듯이 도저히 이해할 없어서 아름다운 생명을 가진 것의 목을 지그시 누르길 원했습니다. 사냥감이 가진 반짝이는 단어들의 결, 번뜩이며 제가 약해질 때를 노리는 듯한 사나운 이빨도 좋았습니다. 빠져나가고 놓칠 때도 있었지만 사냥꾼으로 살고 있어 좋습니다. 이거 근데 게임하시는 분들도 경험하는거 아닌가요? 흐흐흐
저도 처음엔 중2병으로 시작했겠지요. 중2병이 저절로 치유될 무렵에는 사냥꾼이 사냥을 나가서 토끼나 너구리대신 맹수같은 큰 사냥감을 노리듯이 도저히 이해할 없어서 아름다운 생명을 가진 것의 목을 지그시 누르길 원했습니다. 사냥감이 가진 반짝이는 단어들의 결, 번뜩이며 제가 약해질 때를 노리는 듯한 사나운 이빨도 좋았습니다. 빠져나가고 놓칠 때도 있었지만 사냥꾼으로 살고 있어 좋습니다. 이거 근데 게임하시는 분들도 경험하는거 아닌가요? 흐흐흐
솔직히 철학이라곤 쥐뿔도 몰라서 이진경의 해석조차 따라가기 버겁고, 정신분석도 혼자 현대에 쓰여진 책 몇 권 읽어본 게 다라서 뭐라 주절거릴 재주는 없고요, 그냥 이렇게 생각합니다. 옛날 과학자들의 이론이 틀렸다고 해도 그거 무의미하다고 하는 사람 없고 오히려 일부러 공부하기까지 하는데, 인문학은 그러면 안되리란 법 있나? 라고요. 이론의 비과학성을 떠나 과잉해석이 문제라고 하면 (저 역시 작가의 의식을 초월하는 과잉에 대해서는 냉소적입니다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 무의미한 것만도 아니고요. 해서 읽으면 읽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그걸 배척할 필요는 없는 거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문제점이 만연하다면 알아서 도태될테고요.
저도 정신과 수업 듣기 전에는 몰랐는데요.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서 가치를 잃고 인지과학과 뇌과학에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이 통념이죠. 실제 임상 정신건강의학에서는 환자의 정신병리를 분석하는 기본적인 도구로 정신분석학을 사실상 프로이트의 것 원형 그대로 사용합니다. 재밌는 건 융이나 라캉, 아들러 등의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학은 거의 없습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심리 발달 이론도 비슷한 맥락으로 그동안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동의 발달을 보는 도구로 계속 쓰이고 있습니다. 피아제 이론을 이어... 더 보기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서 가치를 잃고 인지과학과 뇌과학에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이 통념이죠. 실제 임상 정신건강의학에서는 환자의 정신병리를 분석하는 기본적인 도구로 정신분석학을 사실상 프로이트의 것 원형 그대로 사용합니다. 재밌는 건 융이나 라캉, 아들러 등의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학은 거의 없습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심리 발달 이론도 비슷한 맥락으로 그동안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동의 발달을 보는 도구로 계속 쓰이고 있습니다. 피아제 이론을 이어... 더 보기
저도 정신과 수업 듣기 전에는 몰랐는데요.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서 가치를 잃고 인지과학과 뇌과학에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이 통념이죠. 실제 임상 정신건강의학에서는 환자의 정신병리를 분석하는 기본적인 도구로 정신분석학을 사실상 프로이트의 것 원형 그대로 사용합니다. 재밌는 건 융이나 라캉, 아들러 등의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학은 거의 없습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심리 발달 이론도 비슷한 맥락으로 그동안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동의 발달을 보는 도구로 계속 쓰이고 있습니다. 피아제 이론을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에릭슨의 발달 단계 이론이 기본이 됩니다.
일례로 어제 오늘 의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고시 모의고사 같은 시험을 봤는데 이러 저러한 사례를 주고 이 환자가 문제가 있었던 시기는 언제인가가 정신과 문제로 나왔습니다. 답은 항문기였습니다. 강박증을 보이는 환자가 항문기에 배변 습관에 대한 지나친 훈육을 받았다는 걸 그대로 단답형으로 낸 겁니다. 물론 이런 강박증 환자를 소파에 눕혀 놓고 이야기를 하라고 해서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는 거의 없습니다. (있긴 합니다. 이 치료를 전공으로 하는 교수님들이 대학병원에 간혹 있습니다.) 항암제나 항생제처럼 철저한 임상 시험을 거친 약물을 줍니다. 비약물 치료로 노출 치료나 기타 등등을 하는데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 통계적 분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일정한 기준으로 분석하고 평가해야 하는 도구적인 이론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실용적인 예로 정신과 의사의 임상 상담이 있을 것이고 가장 비실용적인 예로 문학을 읽고 주인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있겠습니다. 프로이트가 강박증이나 히스테리 같은 것은 질병으로서 체계화했기 때문에 이런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강박적이고 히스테리 부리고 결핍되고 부모를 증오하지 않으면 아무 이야기도 안되겠죠. 역으로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를 질병으로 기술한 것이 프로이트이며, 다시 질병으로 이야기를 기술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비평적 적용이 되겠죠.
여기서 근본적인 괴리에 대해 저는 이야기, 즉,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사라는 말보다는 내러티브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이 내러티브는 역사성을 함축합니다.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안타까운 사고를 토마스 쿤이 치기 이전에는, 미분 적분도 못하는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감히 아인슈타인이나 뉴턴 같은 천재들에게 대적할 생각도 못했습니다. 마르크스부터 시작해서 우리도 과학처럼 되고 싶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게 전부였죠. 쿤이 발견한 것은 일련의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낸 내러티브였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종의 역사학을 시작한 것이죠. 문제는 계산이나 할 줄 아는 공돌이들은 역사 같은 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역사성에 인문학자들이 비평을 내놓는 걸 따라오질 못합니다. 이 때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프로이트와 라캉 욕하기와 소칼 논쟁 등등이 줄줄이 따라 나옵니다. 솔직히 저는 개인적으로 소칼 논쟁 같은 건 기본적인 소양이 안 되어 있는 자존심 배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싸우는 것도 한심해 보이는데 여러분들은 싸우지 마세요.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딜레마 중에 하나가 인간의 정신은 역사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성격이 이상해진 건 어렸을 때 엄마가 나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건 전혀 전혀 전혀 과학적 진술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진술이 되는 것이죠. 이게 실험이나 그런 걸로 밝혀질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한 번도 쓰다듬지 않은 쥐와 많이 쓰다듬은 쥐를 비교하니 많이 쓰다듬은 쥐가 미로를 탈출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는 실험을 통해서 유년기 애정 정도가 지능 발달과 성격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실험 결과 발표하는 사람 있으면 때려줘야 합니다. 그게 그렇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물론 인지과학의 발전 속도는 엄청나게 놀랍고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환상을 계속 부수고 있는데 정신분석학이 관심 가지고 있는 영역이랑 사실 별로 겹치는 게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이나 형제와의 관계 같은 게 우리의 성격과 정신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는데 이걸 과학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관계 같은 게 추상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이건 앞서 말했듯이 내러티브를 가진 역사적 총체로서의 정신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쩌면 전부인 무언가이죠. 이걸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분석하는 도구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라서 그냥 계속 쓰고 있는 겁니다.
라캉 얘기 안 해서 죄송요...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서 가치를 잃고 인지과학과 뇌과학에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이 통념이죠. 실제 임상 정신건강의학에서는 환자의 정신병리를 분석하는 기본적인 도구로 정신분석학을 사실상 프로이트의 것 원형 그대로 사용합니다. 재밌는 건 융이나 라캉, 아들러 등의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학은 거의 없습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심리 발달 이론도 비슷한 맥락으로 그동안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동의 발달을 보는 도구로 계속 쓰이고 있습니다. 피아제 이론을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에릭슨의 발달 단계 이론이 기본이 됩니다.
일례로 어제 오늘 의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고시 모의고사 같은 시험을 봤는데 이러 저러한 사례를 주고 이 환자가 문제가 있었던 시기는 언제인가가 정신과 문제로 나왔습니다. 답은 항문기였습니다. 강박증을 보이는 환자가 항문기에 배변 습관에 대한 지나친 훈육을 받았다는 걸 그대로 단답형으로 낸 겁니다. 물론 이런 강박증 환자를 소파에 눕혀 놓고 이야기를 하라고 해서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는 거의 없습니다. (있긴 합니다. 이 치료를 전공으로 하는 교수님들이 대학병원에 간혹 있습니다.) 항암제나 항생제처럼 철저한 임상 시험을 거친 약물을 줍니다. 비약물 치료로 노출 치료나 기타 등등을 하는데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 통계적 분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일정한 기준으로 분석하고 평가해야 하는 도구적인 이론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실용적인 예로 정신과 의사의 임상 상담이 있을 것이고 가장 비실용적인 예로 문학을 읽고 주인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있겠습니다. 프로이트가 강박증이나 히스테리 같은 것은 질병으로서 체계화했기 때문에 이런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강박적이고 히스테리 부리고 결핍되고 부모를 증오하지 않으면 아무 이야기도 안되겠죠. 역으로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를 질병으로 기술한 것이 프로이트이며, 다시 질병으로 이야기를 기술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비평적 적용이 되겠죠.
여기서 근본적인 괴리에 대해 저는 이야기, 즉,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사라는 말보다는 내러티브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이 내러티브는 역사성을 함축합니다.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안타까운 사고를 토마스 쿤이 치기 이전에는, 미분 적분도 못하는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감히 아인슈타인이나 뉴턴 같은 천재들에게 대적할 생각도 못했습니다. 마르크스부터 시작해서 우리도 과학처럼 되고 싶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게 전부였죠. 쿤이 발견한 것은 일련의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낸 내러티브였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종의 역사학을 시작한 것이죠. 문제는 계산이나 할 줄 아는 공돌이들은 역사 같은 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역사성에 인문학자들이 비평을 내놓는 걸 따라오질 못합니다. 이 때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프로이트와 라캉 욕하기와 소칼 논쟁 등등이 줄줄이 따라 나옵니다. 솔직히 저는 개인적으로 소칼 논쟁 같은 건 기본적인 소양이 안 되어 있는 자존심 배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싸우는 것도 한심해 보이는데 여러분들은 싸우지 마세요.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딜레마 중에 하나가 인간의 정신은 역사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성격이 이상해진 건 어렸을 때 엄마가 나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건 전혀 전혀 전혀 과학적 진술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진술이 되는 것이죠. 이게 실험이나 그런 걸로 밝혀질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한 번도 쓰다듬지 않은 쥐와 많이 쓰다듬은 쥐를 비교하니 많이 쓰다듬은 쥐가 미로를 탈출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는 실험을 통해서 유년기 애정 정도가 지능 발달과 성격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실험 결과 발표하는 사람 있으면 때려줘야 합니다. 그게 그렇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물론 인지과학의 발전 속도는 엄청나게 놀랍고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환상을 계속 부수고 있는데 정신분석학이 관심 가지고 있는 영역이랑 사실 별로 겹치는 게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이나 형제와의 관계 같은 게 우리의 성격과 정신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는데 이걸 과학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관계 같은 게 추상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이건 앞서 말했듯이 내러티브를 가진 역사적 총체로서의 정신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쩌면 전부인 무언가이죠. 이걸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분석하는 도구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라서 그냥 계속 쓰고 있는 겁니다.
라캉 얘기 안 해서 죄송요...
라캉이야기를 안하셨다기엔 의사샘들이 임상에서 사용하는 방법은 라캉의 상징계를 너무나 잘 설명해주는군요. 저는 임상에서 일종의 암시효과와 같은 방법을 쓴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그런지 안그런지 잘 모릅니다. (진짭니다. 살짝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약은 안먹는다능...)
라캉의 상징계는 들뢰즈에 와서 [극장의 무대]라는 레토릭으로 격하되고, 이 격하된 무대 뒤에는 아무도 없다, 즉 컴플렉스는 없다는 식으로 논파됩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해서 우리는 모두 신경증자지만,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정상(!)인 것이죠. 우하하하하 제가 이래서 들뢰즈를 좋아한다니깐요. 난 정상이야!!! 크크크크크
라캉의 상징계는 들뢰즈에 와서 [극장의 무대]라는 레토릭으로 격하되고, 이 격하된 무대 뒤에는 아무도 없다, 즉 컴플렉스는 없다는 식으로 논파됩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해서 우리는 모두 신경증자지만,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정상(!)인 것이죠. 우하하하하 제가 이래서 들뢰즈를 좋아한다니깐요. 난 정상이야!!! 크크크크크
[또한 정작 지젝의 작업 역시 라캉을 어떤 식으로든 왜곡하는 길일 수밖에 없고요.]
제가 따로 올린 지젝 책에도 나오는 대사인데요, 지젝의 클라스를 보여주는 설명을 합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모든 진리는 편파적이다.(Every truth is partial.)\" 이것이 라캉의 이론 핵심 중 하나다. 그가 프로이트를 편파적으로 해석하여 그를 재발견했듯이, 우리도 오늘날 라캉을 편파적으로 해석하여 재발견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장례식 메타포랑 겹쳐서 서문에서 풀어내는데 지젝 썰 풀기가 역시 클라스 오지구요. 라캉 이론 자체가 문화 비평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걸 메타적으로 보여준 셈이라고 봅니다.
제가 따로 올린 지젝 책에도 나오는 대사인데요, 지젝의 클라스를 보여주는 설명을 합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모든 진리는 편파적이다.(Every truth is partial.)\" 이것이 라캉의 이론 핵심 중 하나다. 그가 프로이트를 편파적으로 해석하여 그를 재발견했듯이, 우리도 오늘날 라캉을 편파적으로 해석하여 재발견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장례식 메타포랑 겹쳐서 서문에서 풀어내는데 지젝 썰 풀기가 역시 클라스 오지구요. 라캉 이론 자체가 문화 비평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걸 메타적으로 보여준 셈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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