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08/20 20:24:25
Name   私律
Subject   족보
탐라에 고려인 얘기가 나와서.
방문취업이란 체류자격이 있습니다. 동포들이  단순노무분야에 자유롭게 취업하는 비자인데, 대신 체류기간의 상한이 있었습니다(요즘은 조금 달라졌습니다만). 어느 고려인 아저씨가 찾아오셔서는, 방문취업자격이지만 상한을 넘겨 한국에 계속 살고 싶다며 방법이 없겠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보니 무국적자였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오셨는데, 카자흐 정부에서는 여권에 이 분의 국적을 코리아로 적어놨더군요.

* 참고로 어느 사람의 국적이 한국인지 결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입니다. 외국정부가 어느 사람의 국적을 한국이라 하더라도, 그건 그 정부의 생각일 뿐 우리 정부가 그 결정에 구속되는 건 전혀 아닙니다. 고려인의 경우(사할린동포는 접어둡시다) 소련시절 소련국적을 취득하면서 우리 국적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도 당연히 소련사람 등으로 태어났죠. 그래서 실무상 조선족/고려인은 특정 시점에 한국국적을 상실한 것으로 의제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건가 여쭤보니, 이 분의 할아버지가 연해주로 건너가셨답니다. 그리고 아버지 때였나?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살다가 우크라이나를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갔답니다. 구소련이 무너질 때, 그냥 한 곳에 눌러살았던 사람들은 그 곳의 국적을 받았다는데, 이 분들 가족처럼 이사를 다녔던 분들은 붕 떠버렸다고 하시더군요. 결국 그 정부에서 '까레이스끼 너희는 우리 나라 사람 아냐' 해버린 모양입니다.
그리고 동포정책 덕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셨더군요.

이 분께서는 우리말도 못하셨습니다만, 족보를 가져오셨습니다. 몇십년은 지난 러시아 신문으로 싼, 조선시대 쯤 것 같은 족보를. 펼쳐보니 한문을 잘 몰라서  뭔 소린지는 모르겠으나 족보는 맞아보였습니다.
연해주로 건너갈 때, 요즘같은 이삿짐센터가 있었을리 없쟎습니까. 이고 지고, 메고 끌고 갔겠죠. 제가 듣기론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이주도, 옷이나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챙긴 채 끌려갔고,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면 얼어 죽은 것이었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들었습니다. 옷과 쌀을 제대로 못 가져가면서도 챙긴, 그 모든 과정에서 땔감으로 쓰지 않고 지켜낸, 결국 이 땅에 돌아온 족보... 뭐라 말하기 힘든 느낌이 들더군요.

어찌어찌 방법을 찾아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줬습니다. 제가 인사이동으로 그 곳을 떴습니다만, 그 분은 아마 뜻한대로 한국에 계속 사실 겝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8-31 13:1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5
  • 족보가 사람 마음을 울릴수도 있군요......
  • 마음이 참...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80 일상/생각자격지심이 생겨났다가 해소되어가는 과정 14 골든햄스 23/02/22 4443 43
1245 일상/생각"교수님, 제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24 골든햄스 22/10/20 4711 53
1147 일상/생각둘째를 낳았습니다. 15 고양이카페 21/11/29 4427 32
214 과학Re : Re : 국내의 에너지 산업 혹은 태양광산업 동향은 어떤가요? 29 고양이카페 16/06/06 7792 10
466 의료/건강나의 갑상선암 투병기2 - 부제: 끝 없는 기다림, 그리고 포폴짱은 넘모 대단해. 25 고라파덕 17/07/05 5973 15
440 의료/건강나의 갑상선암 투병기 -부제: 워보이와 나 37 고라파덕 17/06/01 6265 20
1353 의료/건강환자의 자기결정권(autonomy)은 어디까지 일까? 7 경계인 24/01/06 2199 22
1148 기타서울대병원 응급실에 대한 단상 6 경계인 21/12/03 5022 14
1336 여행북큐슈 여행기 1 거소 23/10/15 2221 9
1130 일상/생각합리적인 약자 9 거소 21/09/19 5215 32
1096 정치/사회누군가의 입을 막는다는 것 19 거소 21/06/09 5534 55
1087 일상/생각어느 개발자의 현타 26 거소 21/05/04 7548 35
1042 정치/사회편향이 곧 정치 20 거소 20/12/23 5523 34
1001 일상/생각타임라인에서 공부한 의료파업에 대한 생각정리 43 거소 20/08/25 8715 82
30 과학쥬라기 월드흥행에 적어보는 공룡이야기(3)-모든걸 새로쓰게한 공룡 9 개평3냥 15/06/20 7727 0
28 과학쥬라기월드흥행에 적어보는 공룡이야기(2)-공룡은 파충류가 아니다 20 개평3냥 15/06/17 8907 0
1044 영화홍콩의 화양연화(2) 꿈의 시공간, 2046 간로 20/12/26 4738 15
1041 영화홍콩의 화양연화[香港的 花樣年華](1) 4 간로 20/12/18 5460 21
965 일상/생각흑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국가 미국 21 가람 20/06/05 6661 68
1119 일상/생각족보 4 私律 21/08/20 3958 35
1059 일상/생각나도 누군가에겐 금수저였구나 15 私律 21/02/06 6876 72
955 일상/생각할아버지 이야기 10 私律 20/05/03 4418 17
13 영화[스포] 대부 보고 왔습니다. 3 王天君 15/06/07 9937 0
2 일상/생각Knock Knock 10 王天君 15/06/01 8552 0
788 정치/사회제1저자, 교신저자, 학회, 자리싸움, 그리고 관행 25 烏鳳 19/04/03 6521 2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