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03/22 10:32:24
Name   쉬군
File #1   1616376883394.jpg (339.5 KB), Download : 12
Subject   그럼에도 사랑하는 너에게.


엊그제는 참 정신없는 날이었어.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 아빠는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집에서 공룡이야 들이랑 핑크퐁이랑 놀고 싶은데 억지로 끌려서 따라 나온 것도 이미 속상한데,

엄마·아빠 볼일 보는 동안 잠깐 쥐여준 휴대폰 유튜브도 지겹고, 신나게 먹고 있던 롤리팝도 손이랑 얼굴이 찐득해진다며 먹고 있던 사탕을 엄마가 야속하게도 뺏어가 버렸어.

너의 속상함이 그때부터였을까.

시간도 때마침 점심시간이 살짝 지나서 배도 고프고,

신나게 먹고 있던 사탕도 뺏기고,

거기에 낮잠 시간도 다가오니 졸리기도 하고, 충분히 속상할 만하지. 맞아.

아빠는 부랴부랴 네가 좋아하는 돈까스를 주문해놓고 좋아하는 그림자놀이 유튜브도 틀어줬지만 이미 배고프고 졸리고 뿔이 잔뜩 난 너는 속이 많이 상했을 거야.

다음 달이면 세 번째 생일 파티를 해야 하는 너지만 아직 조금 느리기에 속상한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니 속상함과 답답함에 엉엉 울음이 날 수밖에.

다른 아기들보다 목소리가 크다 보니 식당이 울음소리로 울리고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기 시작해서 아빠는 어쩔 수 없이 널 사람이 없는 마트 구석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어.

우선은 식당 손님들께 폐를 끼칠 순 없으니 조용한 곳에서 울음이 그치길 기다려 봤지만, 여전히 속상한 마음에 발까지 동동 구르며 한참을 서럽게 우는 널 안았다가 바닥에 내려놓고 같이 바닥에 앉았다가 하지만 좀처럼 울음이 가라앉지 않더라.

그렇게 한참 지나고 엄마한테 주문한 돈까스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가서 유튜브를 다시 후다닥 세팅하고 돈까스를 한입 먹이니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기분이 풀렸는지 까르륵 웃어가며 밥을 먹기 시작했어.

네가 귀여워서 다행이야. 안 그랬다면 두어대는 쥐어박지 않았을까? 싶은 순간이었으니까.

주위 다른 아기 부모님들이랑 어르신들도 네가 울음을 그치고 돈가스를 한 입 집어 먹으니 그제야 다행이라는 표정들을 보여주셨지.

하지만 네가 우는 그 짧은 순간에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은 아빠를 많이 긴장하게 만들고, 우리와 비슷한 가족들의 그 현실감이 몸으로 느껴졌었어.

걱정과 불편함과 동정이 담긴 그런 시선들이, 그리고 사정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의 그 수군거림이 하나의 돌덩이처럼 내려앉는데 그 무게가 생각보다 무겁더라고.

앞으로도 네가 열심히 자라서 또래 친구들과 비슷해질 때까지 이런 무게감을 엄마, 아빠는 계속 짊어지고 지내야겠지.

하지만 아빠는, 아니 우리 가족은 네가 조금 느리게 자라도 아주 문제없다고 생각해. 조금 느리지만, 하루하루 성장하는 모습만 봐도 대견하거든.

가끔 오늘처럼 힘들기도 하고 조금은 슬퍼질 때도 있지만 그건 찰나의 속상함이니까 그런 거로 네가 싫어지거나 미워할 이유가 될 순 없지.

그래도 많이 사랑하니까 괜찮아. 아기들은 다 그렇게 자라는 거니까.

조금 느려도 언젠가는 엄마, 아빠를 불러줄 거고, 친구들이랑도 사이좋게 지낼 거고 더 많은 세상을 보기 위해 훌쩍 자랄 테니까. 엄빠 기대보다 더 크게 자라려고 하다 보니 준비가 오래 걸리는 거라고 생각해.

심지어 작년에는 자폐 의심 진단까지 받았던 니가 지금은 자폐가 아닌 조금 느릴뿐이니 걱정하지말라는 소견을 받았으니 훨씬 발전한 거지!

아! 그래도 다음 달 네 생일파티에는 엄마 아빠를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자그마한 바람은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서 같이 노력해보자.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너에게 그럼에도 사랑하는 아빠가.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4-06 07:4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4
  • 육아는 추천
  • 춫천
  • 비슷한 처지의 아빠라서 더 공감합니다
  • 마음이 짠해요.. 화이팅!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52 일상/생각박사생 대상 워크숍 진행한 썰 19 소요 22/11/19 3843 26
1267 정치/사회장애학 시리즈 (3) - 지리는 게 매력적인 모습은 아니잖아요?: '어른'이 되기 위해 억제를 배워간다는 것, 그리고 장애와 섹슈얼리티 8 소요 23/01/17 2638 12
1321 일상/생각뉴욕의 나쁜 놈들: 개평 4센트 6 소요 23/08/16 2428 20
818 체육/스포츠심판 콜의 정확도와 스트라이크존 기계판정 4 손금불산입 19/06/15 6390 8
1017 체육/스포츠르브론 제임스의 우승은 그를 역대 2위 그 이상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가? 15 손금불산입 20/10/14 5309 21
1181 게임요즘은 엑스컴 2를 재미있게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15 손금불산입 22/03/28 5385 14
177 기타[空知] 녹차넷을 엽니다. 78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04/01 8013 9
182 기타[회고록] 그 밤은 추웠고, 난 홍조를 띠었네. 43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04/12 5547 10
437 일상/생각[회고록] 그녀의 환한 미소 17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5/24 4790 13
341 일상/생각[회고록] 나 킴치 조아해요우 19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1/09 5622 18
488 일상/생각수박이는 요새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完 26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8/07 6215 18
989 여행속초, 강릉 여행 가볍게(?) 정리 36 수영 20/07/27 5419 9
1058 문학오늘부터 5월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는 20 순수한글닉 21/02/04 4820 24
1107 기타소우주를 여행하는 아미를 위한 안내서: 2 7 순수한글닉 21/07/21 3232 11
1100 일상/생각안티테제 전문 29 순수한글닉 21/06/29 4734 34
1106 기타소우주를 여행하는 아미를 위한 안내서 : 1 22 순수한글닉 21/07/16 4306 21
1145 문화/예술회사 식당에서 만난 박수근 12 순수한글닉 21/11/19 5979 46
890 정치/사회셰일가스는 미국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변경시켰나? 6 술탄오브더디스코 19/11/22 5086 13
556 일상/생각나도 결국 이기적인 인간 2 쉬군 17/12/02 6001 13
618 기타황구 출현 이틀차 소감 15 쉬군 18/04/19 6987 24
624 기타예비 아빠들을 위한 경험담 공유를 해볼까 합니다. 19 쉬군 18/04/30 6409 17
1014 기타30개월 아들 이야기 25 쉬군 20/10/05 5659 47
1067 요리/음식중년 아저씨의 베이킹 도전기. 27 쉬군 21/03/08 4500 29
1072 기타그럼에도 사랑하는 너에게. 9 쉬군 21/03/22 4322 34
1085 기타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키즈카페 추천 2 쉬군 21/05/04 5660 35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