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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8/01 05:58:29 |
Name | 문학소녀 |
Subject | 얻고 싶은 사람 있다면 밀지 말고 당겨라 |
23
이 게시판에 등록된 문학소녀 님의 최근 게시물 |
음.... 여러분 이 글은 문학소녀 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몇몇 분들의 가열찬 윤문과 감수 덕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관우의 스포츠카가 조조회사 임직원들을 오관돌파하는 부분이라든가... 하여튼 많이 잘라냈음. 여보야 홍보해줘서 고마운데 담부턴 이렇게 노골적으로 밀지말고 은근하게 독자들을 당겨봐ㅋㅋㅋ
아항 그런거군요.
앞으로 두 분이 다투시게 될 일이 있으면 문학소녀님 편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새벽에 전력질주하다 기아트윈스님에게 끊긴 이후 아직 미미한 원한이 남음) (정작 전력질주는 그 며칠 후 달성함)
앞으로 두 분이 다투시게 될 일이 있으면 문학소녀님 편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새벽에 전력질주하다 기아트윈스님에게 끊긴 이후 아직 미미한 원한이 남음) (정작 전력질주는 그 며칠 후 달성함)
흐음... 깊고 어두운 ‘틈’을 이용해 상대를 (밀지 않고)끌어당기는 여성성이라... 시위현빈에 현빈지문이란 말이 대놓고 들어간 도덕경의 6장을 가져오는 게 글의 의도에 더 부합했을텐데도 글쓴이가 굳이 1장으로 대신한 이유를 알겠네요. 그 정도로 노골적인 섹드립이라면(더불어 웬디라는 사춘기 소녀로부터 시작하니 아청법 스멜 확...) 민족정론지에 올리기는 어려울 거란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전 ebs와 도올이란 선례도 있으니 별 상관없었을 거 같거든요. 그리고 그쯤은 있어야 저 긴 글의 주제와 재미가 좀 살지, 이건 앙꼬 없는 찐빵이고 버터 안 바른 크로아상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 세상에 ㅋㅋㅋㅋㅋㅋㅋ 이게 그 뭐냐 텍스트가 저자의 손에서 떠나면 자기 갈 길 간다더니 ㅋㅋㅋㅋ 이런 독법은 예상 못했어요 ㅋㅋㅋㅋㅋㅋ 얼마나 예상 못했느냐하면 이 댓글 읽자마자 '도...도덕경 6장이 뭐지..?'하고 검색해봤다능
이런 경우 저자가 사족을 달면 판 깨는거니까 그러면 안된다는 선례를 그 무슨 래퍼가 최근에 보여줬지요. 그래도 꼭 밝히고 싶은 건 이번 칼럼은 카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에서 영감을 꽤 얻었다는 거예요. 문제의 책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다른 ... 더 보기
이런 경우 저자가 사족을 달면 판 깨는거니까 그러면 안된다는 선례를 그 무슨 래퍼가 최근에 보여줬지요. 그래도 꼭 밝히고 싶은 건 이번 칼럼은 카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에서 영감을 꽤 얻었다는 거예요. 문제의 책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다른 ... 더 보기
ㅋㅋㅋㅋㅋㅋ 세상에 ㅋㅋㅋㅋㅋㅋㅋ 이게 그 뭐냐 텍스트가 저자의 손에서 떠나면 자기 갈 길 간다더니 ㅋㅋㅋㅋ 이런 독법은 예상 못했어요 ㅋㅋㅋㅋㅋㅋ 얼마나 예상 못했느냐하면 이 댓글 읽자마자 '도...도덕경 6장이 뭐지..?'하고 검색해봤다능
이런 경우 저자가 사족을 달면 판 깨는거니까 그러면 안된다는 선례를 그 무슨 래퍼가 최근에 보여줬지요. 그래도 꼭 밝히고 싶은 건 이번 칼럼은 카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에서 영감을 꽤 얻었다는 거예요. 문제의 책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려면 상대방의 속이 뻔히 안보여야 하거든요. 말하자면, '알 수 없는 한 길 사람 속 (unfathomability)'이 없으면 상대방은 사람이 아니라 살코기가 되는 거지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인간대 인간으로 흥미를 느끼는 그 모든 관계에는 바로 그 측량불가한 물 속을 향해 뛰어드는 것과 같은 특징이 있어요. 그걸 가능한한 잘 알려진 텍스트들을 통해서 (피터팬, 도덕경, 천자문 등) 해설하면서도 '경영전문지'에 올라가는 글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이런 경우 저자가 사족을 달면 판 깨는거니까 그러면 안된다는 선례를 그 무슨 래퍼가 최근에 보여줬지요. 그래도 꼭 밝히고 싶은 건 이번 칼럼은 카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에서 영감을 꽤 얻었다는 거예요. 문제의 책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려면 상대방의 속이 뻔히 안보여야 하거든요. 말하자면, '알 수 없는 한 길 사람 속 (unfathomability)'이 없으면 상대방은 사람이 아니라 살코기가 되는 거지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인간대 인간으로 흥미를 느끼는 그 모든 관계에는 바로 그 측량불가한 물 속을 향해 뛰어드는 것과 같은 특징이 있어요. 그걸 가능한한 잘 알려진 텍스트들을 통해서 (피터팬, 도덕경, 천자문 등) 해설하면서도 '경영전문지'에 올라가는 글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전 리메인스... 좀 보다가 아, 이건 저얼대로 내가 읽을만한 감성이 아니구나 싶어서 덮은 뒤로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말씀하신 건 잘 모르겠구요.
[상상해보자. 지표면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윤곽이 분명하지만 햇빛이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은 어둡고 흐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미세스 달링의 매력이 무한한 까닭은 그것이 무한히 펼쳐지는 상자나 무한히 깊은 카스마와 같아서 이성과 계몽의 상징인 저 위대한 나폴레옹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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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보자. 지표면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윤곽이 분명하지만 햇빛이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은 어둡고 흐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미세스 달링의 매력이 무한한 까닭은 그것이 무한히 펼쳐지는 상자나 무한히 깊은 카스마와 같아서 이성과 계몽의 상징인 저 위대한 나폴레옹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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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리메인스... 좀 보다가 아, 이건 저얼대로 내가 읽을만한 감성이 아니구나 싶어서 덮은 뒤로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말씀하신 건 잘 모르겠구요.
[상상해보자. 지표면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윤곽이 분명하지만 햇빛이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은 어둡고 흐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미세스 달링의 매력이 무한한 까닭은 그것이 무한히 펼쳐지는 상자나 무한히 깊은 카스마와 같아서 이성과 계몽의 상징인 저 위대한 나폴레옹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아닌 게 아니라 『도덕경』은 이미 한(漢)나라 당시에 위정자들의 정치비급으로 인기를 얻었다. 저 위대한 도(道)는 현묘(玄妙)한 매력만으로 천지만물이 알아서 움직이게 만드니...... 이러한 종류의 매력통치는 어쩐지 전통시대의 여성들에게 기대됐던바 남성들을 움직이던 방식, 배리 경이 묘사한바 미세스 달링이 미스터 달링을 움직이던 방식과 닮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도덕경』도 (당시 기준으로) 여성성을 이상적인 품덕으로 묘사한다.]
ㅋㅋㅋㅋㅋ 노자 이야기가 아예 없었으면 몰라도 도덕경에다 거기 담긴 여성성 이야기가 뻔히 있는데 동양학 전공자가 이걸 쓰면서 현빈(거뭇거뭇한 암컷, 신비한 여성, 알 수 없는 여인 등등)과 현빈지문 시위천지근(만물이 생성되는 거뭇거뭇한 암컷의 문......ㅋㅋㅋ)을 전혀 고려치 않았다는 건 뻥이죠. 보통 도덕경에서 여성성을 찾을때도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을 근거로 하지 않나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글쓴이가 본인의 의도 없이도 섹드립을 행하는 무위자연적 스섹머신이란 이야긴데... ㅋㅋㅋㅋㅋㅋㅋ 부인과 잘 상의하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보면 되겠네요 ㅋㅋㅋㅋ
[상상해보자. 지표면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윤곽이 분명하지만 햇빛이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은 어둡고 흐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미세스 달링의 매력이 무한한 까닭은 그것이 무한히 펼쳐지는 상자나 무한히 깊은 카스마와 같아서 이성과 계몽의 상징인 저 위대한 나폴레옹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아닌 게 아니라 『도덕경』은 이미 한(漢)나라 당시에 위정자들의 정치비급으로 인기를 얻었다. 저 위대한 도(道)는 현묘(玄妙)한 매력만으로 천지만물이 알아서 움직이게 만드니...... 이러한 종류의 매력통치는 어쩐지 전통시대의 여성들에게 기대됐던바 남성들을 움직이던 방식, 배리 경이 묘사한바 미세스 달링이 미스터 달링을 움직이던 방식과 닮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도덕경』도 (당시 기준으로) 여성성을 이상적인 품덕으로 묘사한다.]
ㅋㅋㅋㅋㅋ 노자 이야기가 아예 없었으면 몰라도 도덕경에다 거기 담긴 여성성 이야기가 뻔히 있는데 동양학 전공자가 이걸 쓰면서 현빈(거뭇거뭇한 암컷, 신비한 여성, 알 수 없는 여인 등등)과 현빈지문 시위천지근(만물이 생성되는 거뭇거뭇한 암컷의 문......ㅋㅋㅋ)을 전혀 고려치 않았다는 건 뻥이죠. 보통 도덕경에서 여성성을 찾을때도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을 근거로 하지 않나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글쓴이가 본인의 의도 없이도 섹드립을 행하는 무위자연적 스섹머신이란 이야긴데... ㅋㅋㅋㅋㅋㅋㅋ 부인과 잘 상의하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보면 되겠네요 ㅋㅋㅋㅋ
흠... 20세기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서양철학자가 비트겐슈타인이냐고 하면 반대할 사람이 있겠지만 두명만 꼽으라고하면 비트겐슈타인을 안뽑을 사람이 별로 없을 거예요. 하지만 현대 서양철학 대마왕이 실은 평생 아리스토텔레스를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예요. 희랍철학 전공자들이 이 얘기를 보통 잘 안 믿거나 혹은 믿어도 몹시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사실이라는.
동양학 애호가 중에선 도덕경을 읽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 몰라도 동양학 전공자 중에선 끝까지 안읽은 사람이 꽤 될 거예요. 필요할 때 필요한 부분을 찾아볼 능력만 있으면 됐지 저거 굳이 다 읽을 필요 없거든요. 제가 뻥을 쳤든 섹스머신이든 그건 독자님이 믿고 싶은대로 믿으시면 될 듯....
동양학 애호가 중에선 도덕경을 읽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 몰라도 동양학 전공자 중에선 끝까지 안읽은 사람이 꽤 될 거예요. 필요할 때 필요한 부분을 찾아볼 능력만 있으면 됐지 저거 굳이 다 읽을 필요 없거든요. 제가 뻥을 쳤든 섹스머신이든 그건 독자님이 믿고 싶은대로 믿으시면 될 듯....
[수요곡선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고 섹드립을 외치고 다니던 후배가 떠오르네요 ㅋㅋㅋ 공급과 수요 중 공수가 어찌되는지는 각자의 취향으로...
「버자이너 문화사」 읽을 때 재미있게 봤던 대목도 말씀하신 주제와 연관되었어요. 어둡고 좁은 것들이 여성기의 도상적 특징과 연결되어 묘사되는 양상은 뿌리깊은 패턴이더라고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어지는 바기나 덴타타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저도 글을 읽으면서 현과 빈을 연결지어 미메님 같은 상상을 떠올리기도 했어요(수줍)
다만 현빈과... 더 보기
「버자이너 문화사」 읽을 때 재미있게 봤던 대목도 말씀하신 주제와 연관되었어요. 어둡고 좁은 것들이 여성기의 도상적 특징과 연결되어 묘사되는 양상은 뿌리깊은 패턴이더라고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어지는 바기나 덴타타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저도 글을 읽으면서 현과 빈을 연결지어 미메님 같은 상상을 떠올리기도 했어요(수줍)
다만 현빈과... 더 보기
[수요곡선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고 섹드립을 외치고 다니던 후배가 떠오르네요 ㅋㅋㅋ 공급과 수요 중 공수가 어찌되는지는 각자의 취향으로...
「버자이너 문화사」 읽을 때 재미있게 봤던 대목도 말씀하신 주제와 연관되었어요. 어둡고 좁은 것들이 여성기의 도상적 특징과 연결되어 묘사되는 양상은 뿌리깊은 패턴이더라고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어지는 바기나 덴타타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저도 글을 읽으면서 현과 빈을 연결지어 미메님 같은 상상을 떠올리기도 했어요(수줍)
다만 현빈과 여성성을 같이 썼다고 줄기차게 무위자연 스섹머신설을 주장하는 건 지나치다 싶네요. 여성기가 현빈한 속성을 지니지만, 현빈한 속성을 지닌 모든 것을 여성기에 환원할 수는 없잖아요. 세상에 현빈을 자아내는 아이콘이 한 두개도 아니고... 모든 빌딩을 남근에 빗대는 것이 허랑한 일이듯이요.
내 독해를 가지고 저자의 의도를 따져물으시는 건 한 번이라면 모를까 두 번은 별로여요. 제가 기아트윈스님이라면 헤드락이라도 멕이고 싶을 듯요. 전공이랑 가족까지 들먹이는 건 악취미임당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든, 타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든 결국은 자기지시적/자기현시적 속성을 강하게 지니지요. 타인은 언제나 측량불가해한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을 채워넣기 위한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 자아든, 젠더이든, 계급이든, 그 너머의 무엇이든 - 암시해요. 제가 항상 재미나게 지켜보는 미메님이 이걸 모르실 분은 아닐테고, 알면서도 그러는 분이시니 미메님이 미메했다 싶네요. 스섹머신은 미메님이신걸루...
「버자이너 문화사」 읽을 때 재미있게 봤던 대목도 말씀하신 주제와 연관되었어요. 어둡고 좁은 것들이 여성기의 도상적 특징과 연결되어 묘사되는 양상은 뿌리깊은 패턴이더라고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어지는 바기나 덴타타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저도 글을 읽으면서 현과 빈을 연결지어 미메님 같은 상상을 떠올리기도 했어요(수줍)
다만 현빈과 여성성을 같이 썼다고 줄기차게 무위자연 스섹머신설을 주장하는 건 지나치다 싶네요. 여성기가 현빈한 속성을 지니지만, 현빈한 속성을 지닌 모든 것을 여성기에 환원할 수는 없잖아요. 세상에 현빈을 자아내는 아이콘이 한 두개도 아니고... 모든 빌딩을 남근에 빗대는 것이 허랑한 일이듯이요.
내 독해를 가지고 저자의 의도를 따져물으시는 건 한 번이라면 모를까 두 번은 별로여요. 제가 기아트윈스님이라면 헤드락이라도 멕이고 싶을 듯요. 전공이랑 가족까지 들먹이는 건 악취미임당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든, 타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든 결국은 자기지시적/자기현시적 속성을 강하게 지니지요. 타인은 언제나 측량불가해한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을 채워넣기 위한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 자아든, 젠더이든, 계급이든, 그 너머의 무엇이든 - 암시해요. 제가 항상 재미나게 지켜보는 미메님이 이걸 모르실 분은 아닐테고, 알면서도 그러는 분이시니 미메님이 미메했다 싶네요. 스섹머신은 미메님이신걸루...
동양학을 전공했다고 꼭 도덕경을 완독하고 구절 하나하나 달달달 외워댈 이유는 없겠죠. 하지만 기아트윈스님께서 기사의 서브텍스트가 노자 도덕경 6장이 아니라 가즈오 이시구로의 네버 렛 미 고에 가깝다고 밝히셨듯, 제가 놀란 이유 역시도 글쓴이가 동양학 전공이 때문이 아니라 도덕경과 여성성을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랍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이라... 저도 제가 기사를 읽으며 받은 느낌을 좀 다른 소재로 바꾸어볼까요?
어느 철학 전공자가 인간의 마음 속 지침을 소재로 기사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 나오... 더 보기
희랍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이라... 저도 제가 기사를 읽으며 받은 느낌을 좀 다른 소재로 바꾸어볼까요?
어느 철학 전공자가 인간의 마음 속 지침을 소재로 기사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 나오... 더 보기
동양학을 전공했다고 꼭 도덕경을 완독하고 구절 하나하나 달달달 외워댈 이유는 없겠죠. 하지만 기아트윈스님께서 기사의 서브텍스트가 노자 도덕경 6장이 아니라 가즈오 이시구로의 네버 렛 미 고에 가깝다고 밝히셨듯, 제가 놀란 이유 역시도 글쓴이가 동양학 전공이 때문이 아니라 도덕경과 여성성을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랍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이라... 저도 제가 기사를 읽으며 받은 느낌을 좀 다른 소재로 바꾸어볼까요?
어느 철학 전공자가 인간의 마음 속 지침을 소재로 기사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 나오죠. 양치기와 소녀의 이야기 말이에요. 그러면서 양치기가 자신의 연정을 서툰 욕정으로 바꾸지 않은 이유가 왜일지 자문합니다. 그와 함께 별이란 알레고리를 가리키며 루카치 ‘소설의 이론’의 그 유명한 첫 문장도 언급합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가야만 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별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문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그려졌고 그것이 때로는 마음이 마땅히 향해야할 방향성으로 형상화되었는지요. 이쯤에서 그 기사는 칸트의 도덕률로 이야기를 바꿉니다. 그리고 실천이성 비판을 언급하며 마음이 마땅히 향해야할 방향성이 무엇이며 다른 철학자와 문학자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말한 후, 다시 알퐁스 도데로 돌아가서 글을 마무리합니다. 소년의 연정과 내면의 도덕성을 도데의 문학은 ‘별’로서 형상화했다, 뭐 그렇게 말하면서요.
굳이 기사에 언급이 없어도 인문학에 소양이 있는 독자라면 ‘저 하늘의 별과 내면의 도덕 법칙’이 떠올릴 겁니다. 굳이 글쓴이가 언급하지 않은 건 아마 ‘너무 노골적이고 글이 뻔해지기 때문이겠거니’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막상 물어보니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자기는 실천 이성 비판을 읽어본 적도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글에서 의도한 맥락이 실은 전혀 달랐다고 하면 어떨까요?
기아트윈스님은, 호라타래님은, 여러분은 그렇지 않나요?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의 에피소드와 브레히트의 ‘아, 우리가 어떻게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것인가’를 동시에 언급하는 와중에, 헤겔 ‘법철학’의 이념적 종합성을 이야기하는 글이라면 당연히 장미와 춤에 얽힌 그의 말장난을 떠올리지 않겠어요? 비트겐슈타인을 소재로 언어의 한계와 서양철학사의 인식론을 언급하는 글이라면 이를 읽으면서 글쓴이가 ‘논고’를 염두에 두고 썼으리란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카뮈 철학이 어떻게 현대 노동자의 노동소외와 만나는지를 말하는 글이 있다면 당연히 ‘시지프 신화’를 떠올리지 않겠어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신앙의 문제를 말하는 글이 있다면 당연히 ‘대심문관’을 생각하겠죠.
그래서 처음 글쓴이를 대신하여 기아트윈스님이 부정하신 순간에 전 굉장히 놀랐지만, 한편 그 말이 틀림없다는 것도 알았어요. 당연하죠. 의도하고 쓴 사람이 부정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그런 의도가 있었고 현빈을 염두에 뒀다면 그 연관성이 보이는 걸 부정하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도 잘 알 텐데요. 섹드립이니 민족정론지니 하는 건 누구에게나 진지한 말은 아닐 거고요. 아마 그런 게 불쾌하거나 멋쩍어서 연관성을 부정할 사람이라면 현빈을 염두에 두고 저런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쨌든 워낙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중첩이긴 했죠. 그래서 엄청 놀라고, 또 우스웠어요. 그 우연의 중첩이 그려내는 문양이 얼마나 작위적인 성격인지요. 여러분들이 칸트를, 헤겔을, 비트겐슈타인을, 카뮈를, 도스토예프스키를 아신다면 아마 제 심정을 조금쯤은 짐작할 수 있으실테죠? 저는 딱 그런 기분이었어요. 참으로 기괴한 우연이었죠.
그래서 제가 웃긴 만큼 남들도 웃길 생각으로 두 댓글을 썼습니다.
다시 비트겐슈타인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과문하여 비트겐슈타인이 평생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지 않은지는 몰랐네요. 그리고 역시나 비트겐슈타인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여 쓴 글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의 사상의 성격을 주된 소재로 삼아 쓴 글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 별 문제의식도 갖지 못한다면, 전 우리 시대의 모든 철학자와 전공생이 20세기 비트겐슈타인을 최고의 철학자라고 공인하든 말든 상관없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꼭 지금처럼, 웃음거리로 삼을 생각입니다.
그런 글이 필요할 때 그런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그에게는 없으니까요.
희랍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이라... 저도 제가 기사를 읽으며 받은 느낌을 좀 다른 소재로 바꾸어볼까요?
어느 철학 전공자가 인간의 마음 속 지침을 소재로 기사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 나오죠. 양치기와 소녀의 이야기 말이에요. 그러면서 양치기가 자신의 연정을 서툰 욕정으로 바꾸지 않은 이유가 왜일지 자문합니다. 그와 함께 별이란 알레고리를 가리키며 루카치 ‘소설의 이론’의 그 유명한 첫 문장도 언급합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가야만 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별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문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그려졌고 그것이 때로는 마음이 마땅히 향해야할 방향성으로 형상화되었는지요. 이쯤에서 그 기사는 칸트의 도덕률로 이야기를 바꿉니다. 그리고 실천이성 비판을 언급하며 마음이 마땅히 향해야할 방향성이 무엇이며 다른 철학자와 문학자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말한 후, 다시 알퐁스 도데로 돌아가서 글을 마무리합니다. 소년의 연정과 내면의 도덕성을 도데의 문학은 ‘별’로서 형상화했다, 뭐 그렇게 말하면서요.
굳이 기사에 언급이 없어도 인문학에 소양이 있는 독자라면 ‘저 하늘의 별과 내면의 도덕 법칙’이 떠올릴 겁니다. 굳이 글쓴이가 언급하지 않은 건 아마 ‘너무 노골적이고 글이 뻔해지기 때문이겠거니’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막상 물어보니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자기는 실천 이성 비판을 읽어본 적도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글에서 의도한 맥락이 실은 전혀 달랐다고 하면 어떨까요?
기아트윈스님은, 호라타래님은, 여러분은 그렇지 않나요?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의 에피소드와 브레히트의 ‘아, 우리가 어떻게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것인가’를 동시에 언급하는 와중에, 헤겔 ‘법철학’의 이념적 종합성을 이야기하는 글이라면 당연히 장미와 춤에 얽힌 그의 말장난을 떠올리지 않겠어요? 비트겐슈타인을 소재로 언어의 한계와 서양철학사의 인식론을 언급하는 글이라면 이를 읽으면서 글쓴이가 ‘논고’를 염두에 두고 썼으리란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카뮈 철학이 어떻게 현대 노동자의 노동소외와 만나는지를 말하는 글이 있다면 당연히 ‘시지프 신화’를 떠올리지 않겠어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신앙의 문제를 말하는 글이 있다면 당연히 ‘대심문관’을 생각하겠죠.
그래서 처음 글쓴이를 대신하여 기아트윈스님이 부정하신 순간에 전 굉장히 놀랐지만, 한편 그 말이 틀림없다는 것도 알았어요. 당연하죠. 의도하고 쓴 사람이 부정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그런 의도가 있었고 현빈을 염두에 뒀다면 그 연관성이 보이는 걸 부정하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도 잘 알 텐데요. 섹드립이니 민족정론지니 하는 건 누구에게나 진지한 말은 아닐 거고요. 아마 그런 게 불쾌하거나 멋쩍어서 연관성을 부정할 사람이라면 현빈을 염두에 두고 저런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쨌든 워낙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중첩이긴 했죠. 그래서 엄청 놀라고, 또 우스웠어요. 그 우연의 중첩이 그려내는 문양이 얼마나 작위적인 성격인지요. 여러분들이 칸트를, 헤겔을, 비트겐슈타인을, 카뮈를, 도스토예프스키를 아신다면 아마 제 심정을 조금쯤은 짐작할 수 있으실테죠? 저는 딱 그런 기분이었어요. 참으로 기괴한 우연이었죠.
그래서 제가 웃긴 만큼 남들도 웃길 생각으로 두 댓글을 썼습니다.
다시 비트겐슈타인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과문하여 비트겐슈타인이 평생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지 않은지는 몰랐네요. 그리고 역시나 비트겐슈타인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여 쓴 글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의 사상의 성격을 주된 소재로 삼아 쓴 글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 별 문제의식도 갖지 못한다면, 전 우리 시대의 모든 철학자와 전공생이 20세기 비트겐슈타인을 최고의 철학자라고 공인하든 말든 상관없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꼭 지금처럼, 웃음거리로 삼을 생각입니다.
그런 글이 필요할 때 그런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그에게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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