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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2/01 16:24:22
Name   Beer Inside
Subject   박사깍는 노인
벌써 몇년 전 일이다. 내가 갓 부서장 된 지 얼마 안 되어 학교 근처에서 살 때다. 연구재단 다녀오는 길에, 신설동 역에서 내려 안암동으로 가기 위해 일단 마을버스를 타야 했다. 신설동 수도학원 맞은 편 길가에 대학원생을 갈궈서 박사로 만들어 파는 노인이 있었다. 마침 연구교수가 하나 필요해서 사 가려고 갈궈서 졸업시켜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이었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연봉 3천짜리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하이브레인에 알아보시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연봉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갈궈만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갈구고 있었다. 처음에는 탈탈 터는 것 같더니만, 저물도록 논문을 가져오든지 말든지 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굼뜨기 시작하더니, 늑장이다. 내가 보기엔 그만하면 행정일은 다 하겠는데, 자꾸만 더 갈구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졸업시켜달라 해도 통 못들은 척 대꾸도 없다. 상반기 채용 마감이 빠듯해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갈구지 않아도 되니 그만 졸업시켜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갈굴 만큼 갈궈야 박사가 되지, 석사한테 재촉한다고 박사가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데려갈 사람이 좋다는데 뭘 더 갈군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채용 기간 끝나간다니깐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하이브레인 가보시우. 난 안 팔겠수."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채용공고도 안 내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어차피 이번 상반기에는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갈궈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쫄아서 도망만 간다니까. 박사란 적당히 밀당하면서 만들어야지, 갈구기만 하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갈구던 것을 숫제 옆 자리에 앉혀놓고 태연스럽게 담배만 태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논문을 이리저리 뒤적거려보더니 이제서야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되어 있기는 이미 다 된 박사였다.
상반기 놓치고 하반기까지 행정일을 도맡아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졸업을 시켜서 취업률 맞출 턱이 없다. 사회적 확산 본위가 아니라 순전히 제 본위다. 그래가지고 연봉만 되게 따진다. 인문학 진흥도 모르고 불통섭적이고 비융합적인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수도학원 꼭대기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스승다워 보였다. 학원에서 쌔빠지게 공부해서 대학 가봐야 문송하면 답없다는 듯한 표정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하반기가 되어 뒤늦게 연구교수로 채용하고 보니, 다들 이쁘게 갈궈놨다고 난리다. 조교 쓰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데리고 있던 조교와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동료 선생의 설명을 들어보니, 너무 일찍 졸업시키면 자기가 똑똑한 줄 알아서 남의 말을 잘 듣지를 않고, 남의 말을 잘 듣지를 않으면 행정일 시키기에는 영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렇게 적당히 갈궈서 적당히 말 잘 듣고 사소한 일은 알아서 먼저 움직이는 연구교수는 참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예로부터 박사과정생은 혹 학비가 떨어지면 조교를 하거나 BK 등의 지원을 받거나, 아니면 학원강사나 그룹과외를 해서라도 학비를 메꿀 수 있었다. 박사수료생만 되어도 강의가 가능하니 강의를 하면서 논문을 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조교 자리도 없고 강의는 졸업을 해도 얻을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다보니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최대한 빨리 졸업시키는 수밖에 없다. 행정일은 졸업 안 해도 할 수 있지만, 졸업을 해야 연구교수가 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논문만 해도 그렇다. 예전에는 학위논문을 쓰라고 하면 주제는 언제, 목차는 언제, 서론은 언제, 단계별로 시간을 들이게 했다. 이것을 구증구포라고 한다. 기껏 써온 논문을 아홉 번 '증발시켜' 아홉 번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일이다. 이 구증구포를 거친 논문은 가치를 높게 쳐주었다. 눈으로 봐선 이 논문을 아홉 번 뒤집은 건지 다섯 번 뒤집은 건지 알 수 없다. 단지 학위논문이라니까 믿고 보는 것뿐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무조건 양적 평가가 우선되는 세상에 어느 누가 업적으로 쳐주지도 않는 구증구포를 할 리도 없고, 또 그걸 믿고 평가해줄 사람도 없다.
이 박사도 그런 심정으로 갈궈서 졸업시켰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 죄를 진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국가지원을 받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양적 평가와 사회적 확산의 분위기로부터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발전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었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상반기에 다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전년도 교육부 평가 D를 받은 노인은 이제 그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이제는 양질의 박사를 3천의 연봉으로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맞은 편 수도학원의 지붕을 쳐다보았다. 푸른 창공에 헛되이 날려버린 청춘의 창백함과 같은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박사들을 갈구다가, 공부 백날 해봐야 뭣다 쓰려나 하는 표정으로 수도학원 지붕 너머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을 떠올렸다. 나는 무심히 "苦我事業捺磨多(고아사업날마다) 逸慢械束壘亂臺(일만계속누난대)" 라는 안암 선생의 싯구를 떠올렸다.
오늘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연구교수가 정량지표를 앞에 두고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전에 예산표를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열심히 지표 메꾸던 생각이 난다. 가라 영수증 구경한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전부 전자결제라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성과 맞추기 참 팍팍해진 세상에, 일하기도 참 팍팍해졌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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