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자가 질문을 받을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AMA는 Ask me anything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뜻입니다.
Date | 18/11/27 01:43:58수정됨 |
Name | [익명] |
Subject | 역사공부하는 대학원생입니다. |
역사공부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정확하게는 석사수료 상태고, 지금 학위논문 쓰고 있으며 내년 1학기에 졸업할 예정입니다. 논문 진행도 잘 안되고,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도 있고, 홍차넷에 대학원 석/박사 경험이 현재진행형인 혹은 과거인 분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 같아서 AMA 형식을 빌려서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있는 대학원 이야기가 워낙 이공계 쪽이 많은데 문과, 특히 인문계 문사철 이야기도 좀 나눠보고 싶었구요. 여튼 이런저런 이야기 부탁드리고, 저도 많이 얻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앗, 제가 하나 빼먹었는데, 예비군 가는 날이라 예비군 끝나고 댓글달도록 하겠습니다 ㅋㅋ ㅠ 0
|
죄송하지만... 자세하게 밝히기가 좀 그렇습니다 ㅎㅎㅠ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는, 제 학위논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다루었던 분이 국내에 없습니다.
혹시 학회 같은 곳에서 저와 만났던 분이라면 듣자마자 바로 저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요.
이 주제 관련한 연구논문은 국내에서 2006년에 1편 나왔었는데,
그 연구논문에서도 선행연구가 거의 없다. 그나마 ~~를 참고할 만하다. 라고 언급하였는데
2006년 이후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제가 알기로는) 연구논문이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유니크한 주제입니다. ㅎㅎ...
(거... 더 보기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는, 제 학위논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다루었던 분이 국내에 없습니다.
혹시 학회 같은 곳에서 저와 만났던 분이라면 듣자마자 바로 저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요.
이 주제 관련한 연구논문은 국내에서 2006년에 1편 나왔었는데,
그 연구논문에서도 선행연구가 거의 없다. 그나마 ~~를 참고할 만하다. 라고 언급하였는데
2006년 이후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제가 알기로는) 연구논문이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유니크한 주제입니다. ㅎㅎ...
(거... 더 보기
죄송하지만... 자세하게 밝히기가 좀 그렇습니다 ㅎㅎㅠ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는, 제 학위논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다루었던 분이 국내에 없습니다.
혹시 학회 같은 곳에서 저와 만났던 분이라면 듣자마자 바로 저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요.
이 주제 관련한 연구논문은 국내에서 2006년에 1편 나왔었는데,
그 연구논문에서도 선행연구가 거의 없다. 그나마 ~~를 참고할 만하다. 라고 언급하였는데
2006년 이후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제가 알기로는) 연구논문이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유니크한 주제입니다. ㅎㅎ...
(거의)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분야를 공부한다는 게 조금 편하기도 하고 많이 어렵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대와 분야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제강점기 경제사, 경제사 중에서도 상업 쪽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는, 제 학위논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다루었던 분이 국내에 없습니다.
혹시 학회 같은 곳에서 저와 만났던 분이라면 듣자마자 바로 저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요.
이 주제 관련한 연구논문은 국내에서 2006년에 1편 나왔었는데,
그 연구논문에서도 선행연구가 거의 없다. 그나마 ~~를 참고할 만하다. 라고 언급하였는데
2006년 이후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제가 알기로는) 연구논문이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유니크한 주제입니다. ㅎㅎ...
(거의)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분야를 공부한다는 게 조금 편하기도 하고 많이 어렵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대와 분야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제강점기 경제사, 경제사 중에서도 상업 쪽입니다.
한국사에서도 한국근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위논문에서 다루는 범위는 시기적으로는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지역은 한반도 전체입니다.
너무 범위가 넓다, 방만하다고 많이 지적을 받았는데,
특정한 지역이나 범위에 집중하여 쓸 만큼 사료가 풍부하지 않고 이 시기 저 시기, 이 지역 저 지역에 산재되어 있어서,
(제가 연구하는 주제 자체가 사료가 부족하기도 하고, 제가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요)
일단 현재는 방만하게라도 쓰고 있습니다.
박사과정은 지금 현재는 진학할 생각이 1도 없구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 더 보기
학위논문에서 다루는 범위는 시기적으로는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지역은 한반도 전체입니다.
너무 범위가 넓다, 방만하다고 많이 지적을 받았는데,
특정한 지역이나 범위에 집중하여 쓸 만큼 사료가 풍부하지 않고 이 시기 저 시기, 이 지역 저 지역에 산재되어 있어서,
(제가 연구하는 주제 자체가 사료가 부족하기도 하고, 제가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요)
일단 현재는 방만하게라도 쓰고 있습니다.
박사과정은 지금 현재는 진학할 생각이 1도 없구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 더 보기
한국사에서도 한국근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위논문에서 다루는 범위는 시기적으로는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지역은 한반도 전체입니다.
너무 범위가 넓다, 방만하다고 많이 지적을 받았는데,
특정한 지역이나 범위에 집중하여 쓸 만큼 사료가 풍부하지 않고 이 시기 저 시기, 이 지역 저 지역에 산재되어 있어서,
(제가 연구하는 주제 자체가 사료가 부족하기도 하고, 제가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요)
일단 현재는 방만하게라도 쓰고 있습니다.
박사과정은 지금 현재는 진학할 생각이 1도 없구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하게 된다면
국내에서 수료 후 해외(일본)으로 유학가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하고 희망만 하고 있습니다.
학위논문에서 다루는 범위는 시기적으로는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지역은 한반도 전체입니다.
너무 범위가 넓다, 방만하다고 많이 지적을 받았는데,
특정한 지역이나 범위에 집중하여 쓸 만큼 사료가 풍부하지 않고 이 시기 저 시기, 이 지역 저 지역에 산재되어 있어서,
(제가 연구하는 주제 자체가 사료가 부족하기도 하고, 제가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요)
일단 현재는 방만하게라도 쓰고 있습니다.
박사과정은 지금 현재는 진학할 생각이 1도 없구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하게 된다면
국내에서 수료 후 해외(일본)으로 유학가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하고 희망만 하고 있습니다.
일단 좋아요 눌러놓고 답변은 이제서야 드립니다.ㅠ
먼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덕분에 역사대중서를 많이 읽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좀 역사친화적(?) 인간이 되어갔구요.
지금 보면 특이하게도 부모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보내셨는지 모르겠지만
국영수 배우는 학원이 아니라 "서원"을 꽤 오래 꾸준히 다녔었어요.
단순히 한자 외우게 하는 학원이 아니라, 사자소학부터해서 사서삼경같은 유교 경전을 읽는 곳이었고
아마 초등학생 때 논어 전반부까지 읽고 학원 그만뒀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익힌 한문실력으로 지금까지 근근이 버티고... 더 보기
먼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덕분에 역사대중서를 많이 읽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좀 역사친화적(?) 인간이 되어갔구요.
지금 보면 특이하게도 부모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보내셨는지 모르겠지만
국영수 배우는 학원이 아니라 "서원"을 꽤 오래 꾸준히 다녔었어요.
단순히 한자 외우게 하는 학원이 아니라, 사자소학부터해서 사서삼경같은 유교 경전을 읽는 곳이었고
아마 초등학생 때 논어 전반부까지 읽고 학원 그만뒀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익힌 한문실력으로 지금까지 근근이 버티고... 더 보기
일단 좋아요 눌러놓고 답변은 이제서야 드립니다.ㅠ
먼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덕분에 역사대중서를 많이 읽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좀 역사친화적(?) 인간이 되어갔구요.
지금 보면 특이하게도 부모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보내셨는지 모르겠지만
국영수 배우는 학원이 아니라 "서원"을 꽤 오래 꾸준히 다녔었어요.
단순히 한자 외우게 하는 학원이 아니라, 사자소학부터해서 사서삼경같은 유교 경전을 읽는 곳이었고
아마 초등학생 때 논어 전반부까지 읽고 학원 그만뒀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익힌 한문실력으로 지금까지 근근이 버티고 있습니다.
대학교 학부전공을 "사학과"로 선택한 계기는 고1때 시립도서관에서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란 책을 읽고 나서입니다.
(이태진 外,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푸른역사, 2004.)
이 책은 '고종(과 그의 정책, 당시 조선의 상황 등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이태진(굳이 분류하자면 내재적 발전론적 입장) vs 이영훈/김재호(식민지 근대화론적 입장) vs 주진오 등(양비론)
이 벌인 논쟁이 실린 책입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을 어딜 가든 전공은 무조건 사학과로 정해야겠다고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음 돌이켜보니 막상 사학과에 들어오고 나서는 적응을 못해서 1~2학년은 그냥 허비하고
제대 후 복학해서 공무원 준비나 할까, 하고 있던 중에 서양현대사 수업을 하나 듣게 되었습니다.
주제는 '전세계의 과거사 청산'이었구요.
원래 제가 있던 과는 모든 수업이
강의(+조or개인발표)-중간고사-강의(+조or개인발표)-기말고사-최종레포트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업은 특이하게
'처음 1달은 공통주제에 대한 교수님의 강연과 토론을 진행하고,
다음 2달은 휴강, 대신에 종강까지 각자 주제를 정해서 기말보고서를 준비하는데,
기말보고서는 15쪽 정도의 분량으로, 학부졸업논문으로 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준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상당히 대학원의 세미나식 수업에 가까운 방식이었는데요.
이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수강생 중 1명에게만 부여하는 A+를 받았고
종강 후에는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가서 수업에 대해 1:1 면담을 해야 했는데
"주제선정이 좋다. 문제의식-논리전개가 명확하다. 글 잘쓴다"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 수업을 듣고 나서 뭔가 대학원을 가도 되겠구나, 라는 확신이 섰던 것 같아요.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먼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덕분에 역사대중서를 많이 읽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좀 역사친화적(?) 인간이 되어갔구요.
지금 보면 특이하게도 부모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보내셨는지 모르겠지만
국영수 배우는 학원이 아니라 "서원"을 꽤 오래 꾸준히 다녔었어요.
단순히 한자 외우게 하는 학원이 아니라, 사자소학부터해서 사서삼경같은 유교 경전을 읽는 곳이었고
아마 초등학생 때 논어 전반부까지 읽고 학원 그만뒀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익힌 한문실력으로 지금까지 근근이 버티고 있습니다.
대학교 학부전공을 "사학과"로 선택한 계기는 고1때 시립도서관에서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란 책을 읽고 나서입니다.
(이태진 外,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푸른역사, 2004.)
이 책은 '고종(과 그의 정책, 당시 조선의 상황 등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이태진(굳이 분류하자면 내재적 발전론적 입장) vs 이영훈/김재호(식민지 근대화론적 입장) vs 주진오 등(양비론)
이 벌인 논쟁이 실린 책입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을 어딜 가든 전공은 무조건 사학과로 정해야겠다고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음 돌이켜보니 막상 사학과에 들어오고 나서는 적응을 못해서 1~2학년은 그냥 허비하고
제대 후 복학해서 공무원 준비나 할까, 하고 있던 중에 서양현대사 수업을 하나 듣게 되었습니다.
주제는 '전세계의 과거사 청산'이었구요.
원래 제가 있던 과는 모든 수업이
강의(+조or개인발표)-중간고사-강의(+조or개인발표)-기말고사-최종레포트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업은 특이하게
'처음 1달은 공통주제에 대한 교수님의 강연과 토론을 진행하고,
다음 2달은 휴강, 대신에 종강까지 각자 주제를 정해서 기말보고서를 준비하는데,
기말보고서는 15쪽 정도의 분량으로, 학부졸업논문으로 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준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상당히 대학원의 세미나식 수업에 가까운 방식이었는데요.
이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수강생 중 1명에게만 부여하는 A+를 받았고
종강 후에는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가서 수업에 대해 1:1 면담을 해야 했는데
"주제선정이 좋다. 문제의식-논리전개가 명확하다. 글 잘쓴다"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 수업을 듣고 나서 뭔가 대학원을 가도 되겠구나, 라는 확신이 섰던 것 같아요.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ㅋㅋㅋ 일부러 그런 건 아니구요.
학회나 뭐 회식 같은 여러 자리에서 자기소개하면서 논문주제 말씀드리면 듣는 분들 반응이 모두 하나같이
"XX를 공부한다고? 그러고보니 그거 연구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본 것 같은데? 재미있겠다" 였습니다.
그 정도로 유니크한 주제라서... (쓸데없는 자부심이 문장에 좀 섞인 것 같긴 하네요ㅋㅋ)
시간이 좀 지나면 관련해서 편하고 잘 쓴 글을 홍차넷에 올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학회나 뭐 회식 같은 여러 자리에서 자기소개하면서 논문주제 말씀드리면 듣는 분들 반응이 모두 하나같이
"XX를 공부한다고? 그러고보니 그거 연구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본 것 같은데? 재미있겠다" 였습니다.
그 정도로 유니크한 주제라서... (쓸데없는 자부심이 문장에 좀 섞인 것 같긴 하네요ㅋㅋ)
시간이 좀 지나면 관련해서 편하고 잘 쓴 글을 홍차넷에 올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1. 정말 죄송합니다. 졸업 관련해서 일이 좀 크게 꼬여서, 답변 나중에 달아드려야지, 하고 있다가
홍차넷 접속을 한참동안 못해서 까먹고 있다가, 이제서야 댓글답니다.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2-1. 제 전공분야가 경제사에 가깝긴 한데, 막 경제지표나 무역수지를 가지고 연구하고 그런 건 아니고
기록이나 증언, 통계, 문서 등을 바탕으로 실태를 재구성하는 것에 가까운 쪽이라,
김낙년/허수열 선생님과는 좀 궤를 달리합니다. 솔직히 한줄요약하자면 "잘 모릅니다" ㅋㅋ
2-2. 일반대중이나, 역사에 관심 많은 일반... 더 보기
홍차넷 접속을 한참동안 못해서 까먹고 있다가, 이제서야 댓글답니다.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2-1. 제 전공분야가 경제사에 가깝긴 한데, 막 경제지표나 무역수지를 가지고 연구하고 그런 건 아니고
기록이나 증언, 통계, 문서 등을 바탕으로 실태를 재구성하는 것에 가까운 쪽이라,
김낙년/허수열 선생님과는 좀 궤를 달리합니다. 솔직히 한줄요약하자면 "잘 모릅니다" ㅋㅋ
2-2. 일반대중이나, 역사에 관심 많은 일반... 더 보기
1. 정말 죄송합니다. 졸업 관련해서 일이 좀 크게 꼬여서, 답변 나중에 달아드려야지, 하고 있다가
홍차넷 접속을 한참동안 못해서 까먹고 있다가, 이제서야 댓글답니다.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2-1. 제 전공분야가 경제사에 가깝긴 한데, 막 경제지표나 무역수지를 가지고 연구하고 그런 건 아니고
기록이나 증언, 통계, 문서 등을 바탕으로 실태를 재구성하는 것에 가까운 쪽이라,
김낙년/허수열 선생님과는 좀 궤를 달리합니다. 솔직히 한줄요약하자면 "잘 모릅니다" ㅋㅋ
2-2. 일반대중이나, 역사에 관심 많은 일반인들에게
내재적 발전론 vs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에서 대표적인 연구와 연구자들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거의 90% 가까이 이영훈, 안병직, 허수열, 김낙년 이런 분들의 이름과,
막 GDP, 경제성장률 등의 수치와 각종 그래프, 표가 막 난무하는 연구를 떠올릴 것이라고 확신하는데요.
사실 이건 저 논쟁의 극히 단편적인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일제식민지기 연구라면, 거의 예외 없이
논문에 '식민지 근대화론', '내재적 발전론', '수탈론' 이런 개념들을 딱 명시하지 않았고
식근론이나 내발론과 전혀 상관없는 연구처럼 보여도
저런 시각들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가지고 진행한 연구라고 봐야 합니다.
이걸 다시 말하면, 논쟁과 전혀 관련 없어보이는 하나의 논문이 있을 때,
그 논문에서 내린 결론에 따라
그 연구를 어느 한 쪽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몇몇 단편적인 예시를 드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3-1. 면방직업 관련 최신 연구 가운데,
고급기술, 기계가 필요한 제품군A가 있고 고급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만들기 쉬운) 제품군B가 있는데
식민지 조선에서 A가 생산되었으나 A를 생산하기 위한 기술 자체는 일본인 고급기술자들이 독점하였고,
조선인 노동자(숙련공/비숙련공 모두)들은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여,
1960년대 중반 미국으로부터 A를 만들기 위한 기술이 다시 도입되기까지
조선에서는 A를 생산하지 못하였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수탈론에 입각하였고 식근론을 반박하는 연구라고 봐야죠.
그런데 이 연구에 대해서, 식근론 쪽 연구자가
기술도입에서의 민족적 차별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냥 조선인들의 소비형태가 A제품을 싫어하고 B제품을 좋아했기 때문에
굳이 조선인들이 (소비하지 않는) A제품을 생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고급기술이 도입되지 않은 것뿐이다.
수요-공급이라는 기본적인 경제논리를 고려하지 않은 연구 아니냐, 라고 반박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해당 연구와, 그에 대한 반박이
아직 공식적인 학술지게재논문으로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서, 두루뭉실하게 썼습니다. 양해바랍니다.)
어떤 쪽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시나요??
3-2. 『조선경제연보』와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1931년 4,613개였던 공장 수가 1943년에는 13,293개까지 늘어납니다. (2.24배 증가)
요기까지만 보면 급속한 공업화와 그로 인한 경제발전...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사실 1940년대가 되면 공장생산성과 노동생산성이 -20%를 찍을 정도로 엄청나게 감소하고
태평양전쟁-전시통제 때문에 13,293개의 공장 가운데 휴업/가동중지상태의 공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3-3. 제 주 전공분야의 통계추이를 보면
거래액이나 무역규모가 식민시기 전반에 걸쳐 우상향곡선을 그리다가 1940년대에 정점을 찍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본인 자본은 정경유착+일본본토로부터의 선진기술 도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조선인 자본에 비해 절대우위에 있었고 그들끼리의 카르텔을 구성합니다.
조선인 자본은, 대자본인 경우 일본인 카르텔에 포섭되거나 협력하며 해방 이후까지 거대자본으로 지속되는 모습을 보이고
영세자본은 그 수는 늘어나지만(개업수 증가)
1930년대 후반이 되면 통제조합이나 배급조합에서 물건을 풀어줘야 그걸 받아서 팔아먹고 사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즉 외양만 보고서는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이죠.
4. 쭉 써놓은 것을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수탈론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내재적 발전론...은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답변이 한 달 넘을 정도로 늦었는데, 엄청난 지각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홍차넷 접속을 한참동안 못해서 까먹고 있다가, 이제서야 댓글답니다.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2-1. 제 전공분야가 경제사에 가깝긴 한데, 막 경제지표나 무역수지를 가지고 연구하고 그런 건 아니고
기록이나 증언, 통계, 문서 등을 바탕으로 실태를 재구성하는 것에 가까운 쪽이라,
김낙년/허수열 선생님과는 좀 궤를 달리합니다. 솔직히 한줄요약하자면 "잘 모릅니다" ㅋㅋ
2-2. 일반대중이나, 역사에 관심 많은 일반인들에게
내재적 발전론 vs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에서 대표적인 연구와 연구자들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거의 90% 가까이 이영훈, 안병직, 허수열, 김낙년 이런 분들의 이름과,
막 GDP, 경제성장률 등의 수치와 각종 그래프, 표가 막 난무하는 연구를 떠올릴 것이라고 확신하는데요.
사실 이건 저 논쟁의 극히 단편적인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일제식민지기 연구라면, 거의 예외 없이
논문에 '식민지 근대화론', '내재적 발전론', '수탈론' 이런 개념들을 딱 명시하지 않았고
식근론이나 내발론과 전혀 상관없는 연구처럼 보여도
저런 시각들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가지고 진행한 연구라고 봐야 합니다.
이걸 다시 말하면, 논쟁과 전혀 관련 없어보이는 하나의 논문이 있을 때,
그 논문에서 내린 결론에 따라
그 연구를 어느 한 쪽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몇몇 단편적인 예시를 드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3-1. 면방직업 관련 최신 연구 가운데,
고급기술, 기계가 필요한 제품군A가 있고 고급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만들기 쉬운) 제품군B가 있는데
식민지 조선에서 A가 생산되었으나 A를 생산하기 위한 기술 자체는 일본인 고급기술자들이 독점하였고,
조선인 노동자(숙련공/비숙련공 모두)들은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여,
1960년대 중반 미국으로부터 A를 만들기 위한 기술이 다시 도입되기까지
조선에서는 A를 생산하지 못하였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수탈론에 입각하였고 식근론을 반박하는 연구라고 봐야죠.
그런데 이 연구에 대해서, 식근론 쪽 연구자가
기술도입에서의 민족적 차별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냥 조선인들의 소비형태가 A제품을 싫어하고 B제품을 좋아했기 때문에
굳이 조선인들이 (소비하지 않는) A제품을 생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고급기술이 도입되지 않은 것뿐이다.
수요-공급이라는 기본적인 경제논리를 고려하지 않은 연구 아니냐, 라고 반박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해당 연구와, 그에 대한 반박이
아직 공식적인 학술지게재논문으로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서, 두루뭉실하게 썼습니다. 양해바랍니다.)
어떤 쪽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시나요??
3-2. 『조선경제연보』와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1931년 4,613개였던 공장 수가 1943년에는 13,293개까지 늘어납니다. (2.24배 증가)
요기까지만 보면 급속한 공업화와 그로 인한 경제발전...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사실 1940년대가 되면 공장생산성과 노동생산성이 -20%를 찍을 정도로 엄청나게 감소하고
태평양전쟁-전시통제 때문에 13,293개의 공장 가운데 휴업/가동중지상태의 공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3-3. 제 주 전공분야의 통계추이를 보면
거래액이나 무역규모가 식민시기 전반에 걸쳐 우상향곡선을 그리다가 1940년대에 정점을 찍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본인 자본은 정경유착+일본본토로부터의 선진기술 도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조선인 자본에 비해 절대우위에 있었고 그들끼리의 카르텔을 구성합니다.
조선인 자본은, 대자본인 경우 일본인 카르텔에 포섭되거나 협력하며 해방 이후까지 거대자본으로 지속되는 모습을 보이고
영세자본은 그 수는 늘어나지만(개업수 증가)
1930년대 후반이 되면 통제조합이나 배급조합에서 물건을 풀어줘야 그걸 받아서 팔아먹고 사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즉 외양만 보고서는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이죠.
4. 쭉 써놓은 것을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수탈론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내재적 발전론...은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답변이 한 달 넘을 정도로 늦었는데, 엄청난 지각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