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2/08/21 02:03:48
Name   카르스
Subject   자폐 스펙트럼과 일반인의 경계에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
자폐 스펙트럼 변호사를 다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가 결말까지 잘 나온 상황에서.
티타임을 보자하니 장애학 시리즈도 있고, 자폐 스펙트럼 자녀를 둔 부모의 고백도 있으니 이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가 고백할 타이밍인 것 같네요.
네. 자폐 스펙트럼과 일반인의 경계에 있는 사람인 제 이야기입니다.  

타임라인엔 새벽시간대에 펑글로 짤막하게 언급했지만, 유학 준비하면서 제 정체성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었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에 용기를 얻어 고백해봅니다.

자폐 스펙트럼에 포함되기에는 애매하게 약한 증상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특이한 일반인으로 치부하기에는 자폐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고, 외부에서 보면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모를 수 있습니다. 좀 많이 독특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보일 뿐. 그래서 제 친구나 주변사람들에게 광의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임을 고백할 때마다, 그런 줄 몰랐다는 분들이 뭔가 있을 것 같았다는 분들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뒤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병무청의 병역판정검사에서 4급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내릴 정도의 증상은 있거든요.

우영우 드라마의 우영우에 비교하자면, 우영우보다도 자폐 증상이 약한 사람입니다. 지하철 탈 때마다 헤드셋을 낄 필요는 없고, 회전문을 건너는 데는 문제가 없고, 무조건적으로 고집하는 식단도 없고, 우영우의 고래에 비견될만한 평생 집착하는 주제는 없습니다. (하나에 몰두하긴 하는데 주제는 자주 바뀝니다.) 유감스럽게도 우영우만큼 똑똑하진 못하지만요. ㅎㅎ
그래서 저는 우영우를 보면서 공감이 많이 됐고, 그녀가 자폐를 미화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우영우보다'도' 증상이 약한 사람이었기에.

세계적 유명인사인 일론 머스크나 그레타 튠베리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라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에서 장애인하면 떠오르는 누가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 이미지는 아니지요? 이들의 논란 많은 행보와는 별개로, 성격이 독특하고 특정 주제에 집착하는 사람 정도로 보일 뿐입니다. 저는 증세가 그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약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 페널티가 있다면.
1) 운동신경이 좀 많이 약합니다. 초등학교 때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울 때 100명 중 한명 있을까말까할 둔재라고 부모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기운동에 끼기 쉽지 않고, 길거리나 지하철 통로에서 사람들을 피하지 못해 스칠 때가 많습니다.
2) 문자 그대로의 언어적 표현(literal)에 집착하고, 언행을 분위기와 문맥(context) 속에서 파악하고 그에 맞는 언행을 하기가 살짝 어렵습니다. 제가 사는 한국 사회가 고맥락 문화권이라 특히 신경써야 하는 문제입니다. 존비어 체계, 친척 간 호칭, 압존법, 눈치, 위계서열, 암묵의 룰 등등...  
3) 매사에 진지하고, 가볍게 있질 못합니다. 그래서 주변인들이 제게 친근감을 느끼기 어렵고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저도 가끔 가벼워지고 싶은데, 여행와서도 매일같이 진지하고 어려운 주제를 생각나는 거 보고 포기했습니다.
4) 목소리는 어눌하고, 말투는 아이같고 남자답지 못합니다. 그래서 식당이나 학술발표회에서 입 열 때마다 주변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나마 목소리는 목소리 교정 시설에 다녀서 어느정도 극복했는데 말투는 도데체 어떻게 고쳐야할지 감이 안 잡히네요.
 

1. 유년기부터 10대까지

저는 어렸을 때 말을 꽤 늦게 시작했고, 저를 불러도 반응을 하지 않아서 마음고생이 컸다고 합니다. 유치원까지 보냈는데 "카르스님의 똑똑함은 나중에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좋았다니 기쁜 소식이지만, '뭔가 부족한 게 있지만... '을 숨긴듯한 뉘앙스였죠. 그때는 성장기인지라, 자폐 수준이 좀 많이 심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덴 별 관심이 없었고, 걸을 때는 배를 두 손으로 치면서 걷기도 했고, 종종 이상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학교에서 발표했을 때는 우영우가 변론했듯 책의 대사를 기계적인 말투로 외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박수치면서 칭찬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마음이 복잡하네요. 그나마 공부를 잘해서 반 1-2등하는 모범생이었던 게 위안거리였습니다.

그러다 초 4때 지인의 권유로 정신과 검사를 받았고, (지금은 안 쓰이는 표현인) 아스퍼거 증후군 판단을 받았습니다. 되게 먼 병원으로 가서 뭔가 재미있는 문제를 풀었는데, 그게 자폐 스펙트럼 검사임을 알게 된 건 꽤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별 효과는 없었지만 놀이치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자폐성향 때문인지 애들의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특히 초6-중1 때가 정점이었습니다. 다행히 그것때문에 학교가기 싫다거나 자살을 생각했다던가 그런 적은 없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은 잘 지냅니다. 다만 모든 자폐 스펙트럼 환자가 저같지는 않을 걸 생각하면 씁쓸합니다.

그러던 저도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왠지 멋있어 보여서 강원 고성에서 경기도 파주까지 10박11일 정도를 걷는 국토순례를 도전했었고, 체력이 미약해서 대원들에게 민폐가 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낙오하지 않고 무사히 마무리했습니다. 담당 교사님 말에 따르면 낙오할 것 같았는데 끝까지 잘 했다네요. 그때 용기 덕분이었을까요. 중3때부터는 제 노력 하에 친구를 좀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집까지 같이 하교할 친구도 있었고,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친구들도 여럿 만들어서 겉돌긴 했어도 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자사고를 다녔었는데(2.5:1의 추첨 확률을 뚫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많이 어설펐지만 피아노 동아리 동기나 순한 반 친구들과 많이 지냈습니다. 체육시간에 땅바닥에 앉는 게 싫어서 배드민턴 라켓을 가져와서 운동신경 약한 친구들과 같이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자폐 증세도 눈썰미가 좋지 않으면 안 보이는, 특이한 애 정도로 순화됐습니다. 독서와 클래식 현대음악이라는 취미생활에 빠지기도 했었고, 여전히 자폐 스펙트럼 특유의 어려움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중학교 2학년까지의 시절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려 했었어요. 그 결과 고2때 동아리 콘테스트에서 3위에 올라 입상하기도 했었고, 이런저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변화는 제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달았던 시기였기에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예전에는 나의 특이함을 나는 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스스로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되고, 고1에서 고2로 올라가는 무렵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아닌가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니 아스퍼거 증후군의 경계, 지금 용어로 하자면 자폐 스펙트럼의 경계에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초4때 제가 진단을 받았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를 개선하고 싶었습니다.


2. 대학과 취미생활

다행히 모범생 스타일을 유지한 덕에 대학도 괜찮다 할 곳에 갔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겠다는 희망에 들떴습니다. 제 학교가 1학년은 학부제라 LC별로 묶어서 20명씩 배정했거든요. 거기 친구들은 꽤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더 희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못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누리다 미련이 생겨 반수를 도전했지만 실패하면서 동기들과 멀어졌고, 반 년 동안 강제로 휴학해야 했었거든요. 그리고 휴학한 이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싸 생활을 했습니다. 교내 문학동아리 하나와 제 관심분야인 피아노-클래식을 다루는 교외 동호회를 하나씩 알게 되어 가볍게나마 사람들을 알기도 했었지만, 저는 그 두 커뮤니티 모두에서 겉돌았습니다. 앞서 말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완전히 벗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력하고 싶어했지만 타인의 존재에 그리 절실하지도 못했고요.
 
전공은 철학이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고 혼자서 사유를 전개하다보니 이런 학문에 끌리더군요 ㅎㅎ 수업이 부실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재미있었고, 특히 수리논리적 사고를 극한으로 전개한 분석철학 쪽 수업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지금 전공하는 경제학과도 생각보다 연관이 깊고. 나중에는 경제학도 복수전공했습니다. 둘 모두 학점은 잘 나왔고 덕에 대학원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혼자 하는 취미생활을 계속 즐겼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했던 독서는 계속 했고, 클래식(현대음악도 포함한) 음악은 감상은 집이든 콘서트든 즐겼고, 피아노를 집 주변의 연습실을 끊으면서 치기도 했습니다. 또 본격적으로 국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반수 실패하고 멘탈 나가서 기차타고 정동진(그때는 강릉선 KTX가 없어서 남쪽으로 돌아가느라 5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갔던 걸 처음으로 한 해에만 여러군데 다녔습니다. 내일로 여행도 여러 번 하고, 당일치기도 가끔 갔다오고 심지어 해외여행도 혼자서 세 번 갔다왔습니다. (두 번은 일본, 한 번은 대만) 모두 혼자서 갔다온 여행이었습니다.  


3. 사회복무요원으로서 군 복무

그러던 저도 한국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군 복무를 해야 했습니다.

처음에 공문 받고 신검장 떠났을 때 자폐 스펙트럼 문제 있는 걸 밝혀야 할 것 같아 비고란에 적었고, 서류 재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진단해서 다시 오니 11개월동안 경과를 봐야한다는 7급 재검 판정을 받았고, 11개월동안 정신과 진단을 지켜본 결과 4급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습니다. 정신과라서 군사 훈련과 예비군 훈련은 제외되며, 근무지에서 교육, 복지시설 등은 제외됩니다, 
 
현역에 안 가게 되서 다행으로 생각되면서도, 예전부터 고민하던 문제 때문에 4급 사회복무요원으로 간 건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4급 판정이 제가 현역복무 할 능력이 안 된다는 판결처럼 느껴졌거든요. 자폐 스펙트럼은 당시에 3급에서 5급까지의 판정을 받는데, 3급이 아니라 4급을 받아서 '내가 이렇게 자폐증상이 심했었나 싶었습니다'(지금은 엄격해져서 4급에서 6급까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현역 가는 대신 제 자폐 스펙트럼 문제를 '없애는' 초능력이 있었다면 기꺼이 현역 복무를 택했을 겁니다. 

그때가 일시적으로 현역자원이 넘쳐나서 '입대 대란'으로 사회문제가 된 시기였고, 그 대란은 사회복무요원 복무지 신청대란까지 넘어왔습니다. 저는 정신과 사회복무요원이라 복무기관 신청에서 우선순위가 많이 밀렸고(그거때문에 인권위에서 차별 판정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https://www.humanrights.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boardtypeid=24&boardid=7601106&menuid=001004002001 참조), 그래서 원래 계획보다 한 해 늦게 들어가야 했습니다. 복무지 선택지가 제한되어 경쟁률 높은 데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다행히 다음 해는 운 좋게 주민센터에서 일하도록 결정됐습니다. 원래는 구청으로 신청했는데, 거기서 특정 주민센터로 발령받았습니다.  
 
복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실근무 시간이 하루 8시간 중 평균 2시간 정도에 불과해서, 이렇게 일 안 시킬거면 왜 2년을 복무시키나? 차라리 풀로 일해도 좋으니 1년만 복무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있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몸을 쓰는 일도 있었고, 가끔은 민원 받는 일도 했지만 할 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일하던 곳에서 공공근로 직원으로 장애인도 뽑아서 저와 같은 업무를 하기도 했는지라,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일을 피하기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복무지역에 차 타고 지역 곳곳을 돌아나니면서 많은 걸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가 일했던 18-19년도가 사병월급이 많이 올랐던 때라 교통비와 출장비는 자전거로 해결하고, 점심비는 아끼니까 돈이 수백만원 모인 채로 소집해제 할 수 있더군요. 그래서 정신과 사유 사회복무요원들에게 병역판정검사 기준이 엄격해졌는데 재검해볼래? 편지가 왔을때도 그냥 하지 않았습니다. 4급 된 것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고 복무 불편도 없는데, 5급까지 떨어진다면 진짜 마음이 심란해질 것 같았거든요.

일하던 경험이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비교적 좋게 2년동안 일했고, 동장님의 문화상품권 선물과 함께 무사히 소집해제할 수 있었습니다. 곧 말하겠지만 사회복무요원 말기에 다이어트를 포함한 개인적인 자기계발 시도를 또 해서, 복학 후 생활이 더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가 터져서 물거품으로 허무하게 끝났지만.
  

4. 연애 (부제 - 나는 왜 연애를 중요시하는가)

지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연애에 대한 관심 자체는 사회복무요원 복무 말기에 시작했습니다. 언제나처럼 혼자 국내여행을 떠나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이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거기서 느끼는 인싸스러운 분위기에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연애 영역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폐스펙트럼과 관련된 저 스스로의 결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지금 상태론 연애 절대 못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 패션고자에게 패션수준을 평균적인 수준까지 올리고
- 파마, 눈썹 다듬기를 통해 헤어스타일을 새로 만들고
- 자전거 출퇴근과 덜 먹기로 체중을 7kg 감량하고 (그놈의 확찐자 효과로 원상복귀)
- 위와는 별개로 홈트레이닝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 있는 친구나 지인 인간관계부터 제대로 관리하고
- 새로운 동호회에 참여해서 친구를 많이 만들고 => 홍차넷에서 벙개하는 데로 이어졌습니다. 
- 쩝쩝대면서 먹는 나쁜 버릇을 고치고
- 목소리를 교정해서 덜 이상하게 들리게 하고
- 영화와 같은 공통 대화소재, 취미를 하나 만들고
- 운동신경이 부족해서 생기는 이상한 걸음거리를 (하체운동으로) 교정하고
- 데이팅 앱을 써서 한국 이성이든 외국 이성이든 이야기를 좀 해보기

이렇게 별의별 시도를 다 했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특유의 특정 대상에 대한 집착이 좋은 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가 터져서 복학하고 바로 연애해보겠다는 목표가 2021년, 2022년...으로 늦춰지긴 했지만 
그 덕에 스스로를 많이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연애를 지금까지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운 좋게 여러 이성을 접했고 알고 지내는 사이는 좀 있지만, 사귄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영우가 고민했듯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들에게 연애는 감당 못 할 성질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타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자폐 스펙트럼 환자들이 하기 정말 힘든 것이거든요.
- 매일 혼자 하는 활동을 즐기던 사람이 상대를 염두에 두고 활동을 해야 하고 
- 둘 사이에 있는 미묘함에 맞는 맥락적인(context) 언행을 해야 하며
- 가볍고 덜 격식적(informal)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많으며 (특히 서로 호감에 빠지는 구간에)
- 이를 위해서 편하지 않아도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제가 연애를 많이 갈망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단하게 스스로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저에게 연애 시도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제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삶을 살아갈지에 대한 질문이에요.  
연애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지.
나를 넘어서 남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
남으로 하여금 나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지.
그렇게 관계가 형성되면 그것을 가꾸고 유지할 역량이 있는지.

완전히 저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동일하죠.
그렇기에 저는 연애를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사회가 점점 연애 안해도 되는 쪽으로 움직인다지만, 저는 제 정체성 때문에 거꾸로 가고 있어요.
아마 10년동안 연애 성과가 없더라도 연애를 포기할 수는 없을 거에요. 
물론 그동안 받은 무수한 피드백은 받아들여야겠지만.


이러면 너무 진지하면 안 된다, 너무 집착하지 말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연애 별 거 없으니 마음 비워라 이렇게 많이 말할 거에요.
그런데 저는 앞서 말한 자폐 스펙트럼 문제로 이런 게 잘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식의 말들은 저에게 연애를 더 신비화시킵니다.
진지하지 않기, 마음을 놓기, 집착하지 않기,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기, 별 거 없다고들 하는 행동 해보기.
이거 또한 극복해야 할 목록에 추가되서 연애에 대한 욕구가 더 생기거든요. 

어떻게 해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안돼요. 
일단 누군가한테 사랑을 받는 걸 기대하지 말고, 도리어 남에게 사랑을 주는 걸 기대하기로 마음먹긴 했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인 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최소한의 감은 잡혔다는 것?
예를 들어, 연애를 회귀분석이나 조악한 경제학적 논리로, 요소 모두를 내가 통제할 수 있으며 노력하면 무조건 사귄다는 오만함으로 대하면 큰일난다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운의 요소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 (https://kongcha.net/recommended/1212, https://kongcha.net/recommended/1188 - 후자는 일반론적이지만 사실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노력 끝에 스몰토크나 민감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법을 기꺼이 배운 것 같았습니다.
아는 누나랑 두달 전에 대화하다가 자연스럽게 스몰토크를 하게 됐고,  
아는 분의 도움으로 민감한 주제로 말하는 법도 익혔어요.
한번 해보고 싶었고, 상대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받아들였습니다. 
만나고 집에서 보내준 톡 중에서 '제가 마음을 연 것 같다'는 칭찬이 참 눈물납니다.

왜 이렇게 쉬운 걸 이제야 안 걸까요. 
지금까지의 저는 대화하면서 마음을 열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 걸까요.

그저 이제라도 말하는 방법을 알게 되서 다행이라고 마음먹겠습니다. 


5. 대학원, 학문 그리고 미국 유학
이런 자폐적 성향을 지닌 저에게 그나마 좋은 진로는 학계나 연구직 쪽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대학원으로 왔습니다.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석사과정 막학기가 오는군요. 세월 참 빠르네요.
저는 따져보면 대학원생 치곤 일도 별로 안하는 등 운이 좋은 편이고, 그래서 잘 왔다 싶습니다.
논문들을 읽고 석사논문을 쓰는 게 힘들어도 할 만한 일이라는 걸 느끼거든요.
자폐 성향이 그나마 재능을 발휘할만한 곳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폐 성향이 아예 문제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체감 상, 도리어 다른 직종보다 더 인간관계가 중요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학계는 좁은 물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더 신경써야 하고,
학술대회에 나가고 논문을 쓰고 출판하는 데는 생각보다 암묵적인 룰이 많이 작용하거든요.
그걸 학교에서 겉도는 사람이 극복하기는 생각보다 어렵겠다는 생각이 합니다.
안 그러면 몸을 굴려서 겨우겨우 힘들게 알아내야 하니까요.

그걸 안 저는 이제 미국 유학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실 꼭 가야 하나 싶지만, 일단은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제 자폐스펙트럼 문제는 떠나질 않더군요. 
 
부끄럽지만 다른 교수님과 유학 상담을 하다가,
전에 교수님의 메일에 "네, 그렇게 합시다"라고 (지위에 맞지 않는 어색한 어투로) 답변했던 걸 예로 들면서
이건 학장이나 쓸 말투다, 너는 직접 대면할 때는 무례하지 않지만 이메일을 보면 어투가 종종 어색해서 어르신들이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유학가면 이런 언어적 문제는 없으니 유학 여부 고민할 때 이것도 고려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한동안 자폐 스펙트럼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질 않았는데, 안 떠올릴 수가 없더군요. 
제가 문제가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았지만
굳이 괴로운 자폐 스펙트럼을 염두에 둬야하나, 그냥 일반인처럼 생각하고 극복하면 되지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제가 평생 자폐 스펙트럼 문제를 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유학을 간다면 이런 어색한 언어사용의 페널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미국은 미국대로의 문화가 있는데, 안그래도 의사소통이 서툰 제가 또 하나의 문화를 익히느라 힘들지 않을까요?
그나마 미국 문화는 저맥락적이라서 상대적으로 습득 난이도가 낮을 거라는 게 위안이지만.

그리고 미국에 유학을 간다면 내년 2학기에 시작인데, 그 사이 1년동안 제 소원인 연애를 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저 혼자 유학 떠난다면 초장거리 연애가 될 텐데 잘 할 수 있을까요?
그걸 피하기 위해 현지에서 애인을 사귀는 건 문화 차이까지 생각해야 할텐데 자폐 스펙트럼인 제게 너무 벅찬 일은 아닐까요?


그렇게 도저히 답이 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어요.
남들은 안 하거나 덜한 강도로 할 질문을, 저는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었어요.

운이 좋게 그 때 저는 우영우 드라마를 접했어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이야기래서 봤지요. 
그렇게 저는 생각을 정립할 수 있었어요. 


6. 극복에서 수용으로 

장애는 잘못된 게 아니라 다름이며 존중할 대상임을 말해주는 이 드라마는,
스스로의 진로와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저에게 큰 용기를 주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긴 글로 제 심정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어요.

(경계선이나마) 자폐 스펙트럼에 있는 게 수치스러웠고 고민이 많이 되던 저는 이제 당당해요.  
그리고 스스로에 더 자비로워질 수 있었어요. 

많은 문제가 있고 앞으로 많은 문제에 부닥칠 저를 생각하면서도,
스스로의 단점을 극복하려 수많은 노력을 하고 수많은 성취를 얻은 저를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장점들을 생각했어요.

그렇게 저는 스스로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제가 자폐성향을 완전히 없앨 초능력이 있다면 쓰겠냐는 질문에 과감하게 예라고 하겠지만, 이제는 확답하기 고민될 것 같아요.
자폐성향은 여전히 제 고민거리지만, 그 과정에서 자폐성향과 관련된 제 성취와 재능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어찌보면 저는 장점과 단점 모두 극단적인 일반인에 불과할 수 있거든요.

제 관심사인 영화 이야기를 좀 하자면, 이창동, 고레에다 히로카즈, 하마구치 류스케, 허우샤오셴, 양더창 같은 동아시아 독립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든 부족한 사람이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인간을 향한 절제되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예전부터 좋았아요. 악인이나 부족한 사람을 무조건 감싸지만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인간 전반에 대한 따뜻함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저 스스로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기로 했어요. 부족함은 부족함대로 고치려 노력하고, 누군가에게 잘못을 주고 상처를 준다면 스스로 반성해야 겠지만, 범죄나 손해배상급 잘못이 아니라면 스스로를 자학하고 주늑들지는 않기로. 인간으로서 겪는 일로 편하게 생각하기로. (제가 노력 끝에 찾아낸 관심사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요)


우영우 마지막 화의 우영우 대사를 빌리자면,

"길 잃은 외뿔고래가 흰 고래 무리에 속해 함께 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요. 낯선 바다에서 낯선 흰고래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모두가 저와 다르니까 적응하기 쉽지 않고 저를 싫어하는 고래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 외뿔고래와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게 제 삶이니까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어떤 일이 제 앞에 닥치더라도, 볼드체로 쓴 부분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아갈 거에요. 
이상하고 별나도 괜찮다고. 이것이 나의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마지막으로, 저 스스로를 용기있게 돌아보게 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제작진과 배우들, 무엇보다 박은빈 배우에게 감사드립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09-06 00:5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78
  • 사람의 일을 다하셨으니 이제 기다리시면 되겠군요. 응원합니다.
  • 용기가 뿜는 에너지
  • 춫천
  • 좋은 글 입니다.
  •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아도 당신은 그 자체로 가치 있읍니다.
  • 멋있어요
  • 와 잘읽고 갑니다
  • 멋지십니다.
  • 잘 봤어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76 기타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923 18
1375 기타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4 Jargon 24/03/06 869 4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 24/03/06 827 8
1373 기타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1528 16
1372 기타2024 걸그룹 1/6 2 헬리제의우울 24/03/03 613 13
1371 기타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855 20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20 골든햄스 24/02/27 1560 56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1401 16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955 8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054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326 30
1365 기타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 24/02/06 1184 7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1115 23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549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151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812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바이엘) 24/01/31 1001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533 3
1358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3) 17 양라곱 24/01/22 6160 22
1357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2) 17 양라곱 24/01/17 5687 14
1356 요리/음식수상한 가게들. 7 심해냉장고 24/01/17 1254 20
1355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1) 9 양라곱 24/01/15 2672 21
1354 기타저의 향수 방랑기 31 Mandarin 24/01/08 3294 2
1353 의료/건강환자의 자기결정권(autonomy)은 어디까지 일까? 7 경계인 24/01/06 1276 21
1352 역사정말 소동파가 만들었나? 동파육 이야기. 13 joel 24/01/01 1307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