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04/05 01:47:41
Name   알료사
Subject   스타여캠) 안시성
스타여캠판에 '주차'라는 개념이 생겼더라구요. 아마 자체발생한거 같지는 않고 롤판이든 어디서든 흘러들어온거 같은데 '적당한 시기에 실력상승에 대한 야망?을 버리고 본인의 현 위치에 안주한다' 정도 의미인듯 합니다. 하지만 자전가가 패달을 열심히 밟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옆으로 넘어져 버리듯 주차 마인드를 가지게 되면 살짝 퇴보하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는데 이런 부작용까지 감수하면서 BJ들은 '주차'를 합니다.

단순하게 수치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초보시절 래더 700에서 래더 1000까지 가는데 필요한 노력이 100이라면 1200까지 가기에는 200의 노력이, 1500까지 가려면 300의 노력이, 1700까지 가려면 500이.. 2000까지 가려면.. (포기) 들이는 노력에 비해 상승할 수 있는 폭은 점점 줄어들고 시청자들의 기대치가 올라가면서 잔소리와 훈수의 강도가 심해시기 때문에 심적인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견뎌내기 어렵게 되어버려요. 그에 비해 실력이 좋아져서 얻을 수 있는 과실은 그저 '명예' 뿐입니다. 사람들이 '와~ 누구 잘해졌네~' 하고 칭찬해주는 그 하나의 달콤함 뿐. 그리고 승리 그 자체에 대한 짜릿한 환희 뿐. 돈을 더 잘 벌게 된다든지 인기가 올라간다든지 하지 않아요. .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고 시청자가 몰리는 방송은 이제 막 들어온 신입BJ들의 방송입니다. 별풍선도 신입BJ들에게 펑펑 터지고 대회 상금도 초보들 구간과 최상위권 구간이 별 차이가 없어서 서지수가 버는 상금과 3개월차 신입중 가장 잘하는 BJ가 버는 상금이 거의 비슷하거나 오히려 신입BJ가 더 많거든요.

게임이 워낙 고여버려서 뉴비가 귀해지고 뉴비에 대한 고인물들의 갈망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역차별적 복지시스템?을 만들어낸것도 같고.. 그런걸 떠나서도 단순하게 시청자들 입장에서 투입(별풍선) 대비 결과(성장)이 눈에 띄게 보이는 구간이라 가성비가 좋을수밖에 없거든요.. 왜 아기들이 유치원 들어가고 초딩 되고 중딩 되고 이럴때는 몇달에 한번 볼때마다 확확 커 있고 그런데 20대 이상 된 성인들은 성장을 해도 언뜻 보기엔 뭐 거기서 거기 같잖아요..



얼마전 한 보라(보이는 라디오)BJ가 "나.. 방송 잘 안되면 스타라도 할까.. " 라는 말을 해서 스타 비하 발언 아니냐고 커뮤니티에서 열폭했던 사건이 있었어요ㅋㅋ

남자들이 취업도 잘 안되고 집안은 망해가고 그러면 "아.. 새우잡이 배라도 탈까.. 노가다나 뛸까.. " 하는거랑 비슷한 말이었거든요ㅋ

방송에 소질 없는 BJ들이 이걸 해도 실패하고 저걸 해도 실패해서 아 난 안되나보다 방송 접어야겠다.. 하고 막다른 절벽 끝자락에 서게 됐을 때 마지막으로 한번 희망을 가져 보는게 '스타'거든요ㅋㅋㅋ

과연 스타판은 여러 분야에서 실패한 능력 없는 BJ들을 품어주기는 합니다. 상대적으로 이곳은 외모도 좀 딸려도 되고 나이가 많아도 되고 쇼맨십이나 숫기 없어도 되고 입담 없어도 되거든요. 물론 그런 것들도 잘하면 좋긴 한데 일단 스타판에서는 스타만 빡세게 열심히 해주면 환영해줘요. 근성을 보여 주고 승부욕을 보여 주면 사랑받습니다. 그 <빡세게>라는 것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렇지..  이제 막 일꾼 나누고 건물 뭐가 뭔지 알아가는 초보들에게 하루 10시간 이상의 연습과 프로게이머의 마인드를 요구하니까요. 하지만 많은 실패에 좌절해온 BJ들은 다른 분야의 방송에서 요구되는 여러 까다로운 재능들에 비해 그저 무식하게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죠. 나는 별로 이쁘지도 않은데 왜 나한테 별풍을 쏴주지? 나는 별로 말도 재미있게 못하는데 왜 나한테 별풍을 쏴주지? 나는 게임을 별로 잘하지도 못하는데 사람들이 내 게임에 대해 커뮤니티에서 왈가왈부하고 내 닉네임이 사람들 입에서 오고가네? 이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처음에는 들뜬 마음에 힘든게 힘든줄도 모르고 정말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니까 실력이 오르고 사람들은 더 좋아해주고 아아 나도 BJ로 성공할 수 있는걸까 하는 희망과 감격에 휩싸이게 되죠..


하지만 이것은 몇개월 후 다시는 누리지 못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입니다. 그것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질쳐 사라집니다. 실력이 일정 궤도에 오르게 되면 점차 사람들은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길은 다시 신규 유입되는 뉴비들에게 쏠려 있죠. 처음에 내가 누렸던 그 모든 것들을 이제 다음 세대 뉴비들이 향유하는 것을 보면서 동생이 태어나면 부모들이 동생만 잘 챙겨주는 거 같은 소외감에 빠져들게 되어요..

나에게 쏟어지던 스포트라이트는 없어졌지만 나에게 요구하는 근성은 그 강도가 점점 높아져만 갑니다. 동기들 중에서만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자꾸 멈추지 말고 선배들을 따라잡으라고 닥달합니다. 시간과 체력으로만 때려박는 것이 전부였던 노력의 '질'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평도 늘어갑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하되 이런것도 신경쓰고 저런것도 신경쓰고 하랍니다. '생각하는 게임'을 하지 않으면 수면부족에 허덕이는 내 노력은 노력도 아니랍니다.

이게 맞는 걸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지쳐 있는 동안 '날카로운 첫 키스'에 신나서 에너지가 넘치는 후배들이 치고올라옵니다. 어쩌다 실수로 후배들한테 지면 채팅창에서 폭동이 나고 커뮤니티에 움짤이 돌고 조리돌림 당하고 elo보드에서 점수가 깎이고 순위가 내려가고 우울해지고 술을 마시고 결방을 하고 현타가 오고.. 하면..


이제 그만..  


주차 하게 됩니다.


시발 잘해져봐야 좋은거 하나도 없네. 적당히 여기서 이기고 지고 하자. 내가 이제와서 다른 방송으로 옮겨가기도 힘들고 신입때만큼은 아니어도 이 구간도 적당히 시청자도 있고 적당히 별풍도 있으니까.. 그냥 여기서 만족하자.


안주라 하면 안주일 수만 있지만, 사실 이정도만 해도 어마무시한 끈기입니다. 수많은 BJ들이 이 단계에서 스타를 접고 떠나거든요. 최근 인기가 있는 대회 중에 <안진마리그>라는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주차'하는 BJ들이 중간계에서 점점 적층되다 보면 상위 랭커들에게 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는 내가 이긴다 라는 마인드끼리의 고만고만한 랭커들의 라이벌관계가 형성되고, 그 라이벌들을 위한 중간계 리그가 도입되고 라이벌이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스타판에서 가장 흥미있는 스토리 중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흥행에도 성공하게 된거죠ㅋ






그런데 주차를 거부하고 눈덮힌 킬리만자로에서 얼어죽는 표범이 되겠다며 산을 오르던 프로토스 BJ가 있었으니 그이름 안아.


안아의 별명은 '안시성'입니다.

게임이 거의 가망이 없어도 GG를 치지 않고 버티는데 수비가 워낙 괴랄해서 상대가 꼴아박고 상황이 반전되거나 얼렁뚱땅 맵을 반띵해 양분하면서 자원을 다 파먹고 게임이 비벼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해 생긴 별명이에요.

이런 게임 스타일은 시청자들에게도, 동료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시청자들은 당연히 의미없이 질질 시간만 끄는 게임을 좋아할 턱이 없고 상대하는 BJ들도 분명 내가 유리한건데 이기려는 의지도 없이 틀어박혀서 수비만 하는 상대한테 끌려다니게 되니 역전이라도 당하면 울화통이 터지고 이겨도 상쾌하지도 않으니까요. "안아랑은 게임하기 싫다"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왔고 커뮤니티에서도 논란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괜찮다 vs 저딴 식으로 게임하면 누가 보냐

대회를 여는 주최자들이나 해설자들도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곤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죠. 하는 게임마다 별 내용도 없이 맵 반띵해서 한시간짜리 경기가 나오는데 그거 해설하려면 진이 빠지거든요. 한번은 안아의 멀티가 모두 파괴되고 본진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상대는 올멀티를 하고 있는데 본진에서 아칸 다크아칸 템플러를 잔뜩 모아놓고 사이오닉스톰, 마엘스트롬, 마인드컨트롤로 무한존버를 해서 시청자들과 상대방을 경악시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자원이 없어도 마나는 무한으로 회복되니까요.. 상대는 참다못해 옵저버를 보는 선배 BJ에게 채팅으로 이거 내가 이긴건데 그냥 게임 중단해주면 안되냐고 요청했고 이 사태에 대해 또 커뮤니티에서는 싸움이 났죠ㅋㅋㅋ 올멀티 먹고 못끝내는 사람이 문제인거다 vs 이길 생각도 없이 의미없이 버티는건 비매너다..  

스타방송이라는게 게임을 잘하는 것만이 지상목표인 활동이 아니다 보니까 여론이 안좋아지면 스타일을 바꿔볼만도 할텐데 안아의 안시성은 계속해서 진화해 갔읍니다. 앞마당만 먹고 버티다가 트리플을 먹고 버티는 방식으로, 앞마당을 조금 더 빨리 먹고 트리플을 조금 더 빨리 먹고 버티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압박해 위축시키고 수비라인을 최전방까지 올려쳐 존버하는 방식으로.. 맵을 반으로 갈라쳤을 때 상대가 한곳을 무너뜨리면 나도 상대의 더 치명적인 곳으로 크로스카운터 하는 방식으로.. 처음에는 괴로워하던 시청자들도 점차 조련이 된것인지 어쩐지 이제 안아의 게임이 시작되면 오늘은 또 어떤 미친 <안시성>을 보여줄까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읍니다.. ㅋㅋ









2021년 새로운 레종최(레이디스 종족최강전)이 시작되면서 프로토스 팀의 감독이 바뀝니다. 레종최는 맵 선정을 할 때 각 종족에서 하나씩은 감독이 고를 수 있고 당연히 그 하나는 자기편 종족에 유리한 맵을 선택합니다. 새로 부임한 홍덕 감독은 815라는 맵을 선택했는데, 2007년 so1 스타리그에서 도입된 컨셉맵입니다. 임요환이 박지호에게 극적으로 3:2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라갈 때 마지막 맵이 815여서 오래된 것 치고는 팬들의 기억에도 꽤 인상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맵이었죠.  본진과 앞마당을 통하는 언덕 입구가 매우 좁아서 질럿,저글링,마린은 통과할 수 있지만 드래군,탱크 같은 조금이라도 뚱뚱한 유닛은 통과가 안되어 섬맵이 아닌데도 사실상 반섬맵이나 다름없는 현상이 나타났고 앞마당에 가스가 없다는 요소가 더해져 프로토스에게 유리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으로만 그럴 뿐, 프로들의 세계에서나 그럴 뿐, 여캠스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홍덕감독의 패착이었습니다. 아직 역사가 짧은 이 판에서 여성게이머들은 투혼이나 서킷 같은 무난한 맵에서만 게임을 해 왔고 게임양상이 너무 크게 바뀌는 개성있는 맵에서는 경기력이 떨어져서 래더가 리셋될 때마다 그런 맵들은 먼저 지워놓고 연습을 하기 때문에 815같은 컨셉맵에서의 운영은 너무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설사 815의 유리함에 대해 교육을 받고 그걸 시행해서 정말로 유리한 출발을 한다 해도 반섬맵의 특성상 장기전을 가기 십상인 이 맵에서는 결국 서지수, 다린 등 노련한 고인물이 포진한 테란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버리기 쉬웠죠. 지상군의 이동이 용이하지 않아 여러 대의 드랍십 운용을 해야 하는 성격이 테테전과 닮은 면도 있어 더더욱 테란 BJ들이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든 홍덕 감독은 경질되고 이영한이 새로 부임한 상태에서 815맵에 안아가 출전하게 됩니다.

상대는 서지수.

게임이 가망이 없어도 GG를 치지 않는 안아는 방송이 가망이 없어보여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주차'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별다른 실익도 없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에 왔습니다.

시청자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14년만에 부활한 이 특이한 컨셉의 반섬맵이라는 환경은 경력 2년차인 안아가 갈고닦아온 <안시성>메타에 최적화된 것이었다는 걸.. 마치 so1스타리그에서 815라는 맵을 만든 맵퍼는 14년 후 이 판에 나타날 새로운 여성 게이머를 위해 미리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4월1일 만우절 거짓말같은 게임이 815에서 펼쳐졌습니다..



https://youtu.be/PndBiusJ5wQ?t=8190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4-18 19:54)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83 정치/사회의대 증원과 사회보험, 지대에 대하여...(펌) 43 cummings 24/04/04 6632 37
    1382 기타우리는 아이를 욕망할 수 있을까 22 하마소 24/04/03 1282 19
    1381 일상/생각육아의 어려움 8 풀잎 24/04/03 836 12
    1380 정치/사회UN 세계행복보고서 2024가 말하는, 한국과 동북아에 대한 의외의 이야기 16 카르스 24/03/26 1730 8
    1379 일상/생각인지행동치료와 느린 자살 8 골든햄스 24/03/24 1425 8
    1378 일상/생각아들이 안경을 부러뜨렸다. 8 whenyouinRome... 24/03/23 1186 28
    1377 꿀팁/강좌그거 조금 해주는거 어렵나? 10 바이엘 24/03/20 1503 13
    1376 일상/생각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1354 19
    1375 창작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5 Jargon 24/03/06 1151 4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서포트벡터) 24/03/06 1013 8
    1373 정치/사회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1801 16
    1372 기타2024 걸그룹 1/6 2 헬리제의우울 24/03/03 786 13
    1371 일상/생각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1011 20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20 골든햄스 24/02/27 1723 56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1519 16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1072 8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201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458 30
    1365 기타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서포트벡터) 24/02/06 1315 7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1240 23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701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286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963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 24/01/31 1105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658 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