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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2/22 10:26:29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케이온과 교지편집부와 영화감상반과 '리크루팅'에 대한 이야기
친구들이 도대체 케이온이 뭐가 재밌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재밌는거 아냐?"라고 했는데, 절대로 설득되지를 않았다. 이후로도 내가 왜 (친구들 말에 따르면) 아무 스토리라인도 없는(물론 나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지만) 부활동 일상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지를 생각해 봤는데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었다.

사실 실제 내 인생은 그런 동아리와 큰 관련이 있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당연히 그런 것이 없었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뭔가 클럽 액티비티 활동을 학교에서 추진하기는 했는데, 역시 당시에는 여건이 그리 좋지 않아서 대다수의 학생들이 영화감상반이나 컴퓨터연구반(의 탈을 쓴 고전게임 연구회), 축구부와 같은 뭐 하나마나한 나이롱 클럽에 소속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나도 그런 부에 소속된 것 같긴 했는데(기억 안남),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시절에는 마지막으로 학교 교지편집부에 가입해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학교 교지편집부는 다른 클럽과는 달리 국어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괜찮은 애들을 선발해서 "너 우리 동료가 돼라."는 식으로 부가 꾸려졌다. 이를테면 추천제였던 셈이다. 도대체 당시 국어선생님이 나의 어떤 점을 좋게 생각했는지는 아직도 상당히 의문이지만, 아무튼 나는 국어선생님의 추천을 등에 업고 교지편집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교지편집부는 대부분의 부원이 중3이었고, 나를 포함 2명이었나 3명이 중2였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전원이 여학생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딱 고립되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아직까지 완전히 흑화되어 찐 아싸의 테크를 타기는 전이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적응할 수는 있었는데, 사실 그건 내 착각일 뿐이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같은 부원이었던 누나들이 다들 성격들이 좋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중3때도 계속 나는 교지편집부에 잔류할 수 있었고, 다행히 신입 부원들이 작년에 같이 교지를 만들었던 친구들이거나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녀석들이어서 그 친구들을 중심으로 후배들을 데리고 다시 1년 교지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드는 생각이지만, 성장기에 남들과 힘을 합쳐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이리저리 부딪쳐보는 경험은 대단히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그냥 단순히 내가 문제를 풀면 되는 것이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남들과 같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남들과 같이 일하는 편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는 더 즐겁고 보람이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무언가를 해보는 경험은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도 소중한 경험이고, 또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한 경험이다.

아무튼 그런 일반론을 어찌되든 좋으니 제쳐두고, 여하간에 중학교 3학년을 마지막으로 나의 짧은 동아리 활동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고 그 이후로는 흑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이번에는 교지편집부가 아닌 영어신문부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와 같이 영어신문부의 문을 두드렸는데, 입부하고 싶은 학생은 선배들이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나는 뭐 중학교 시절의 경험이나 글솜씨나 이런 부분을 적당히 살려 자기PR을 할 생각이었고, 친구는 면접관들 앞에서 노래(랩)을 해서 끼를 발산하겠다고 했다. 하나는 정공법, 하나는 기공법이었던 셈인데..

아무튼 본방에서 우리 둘은 계획대로 어필을 했는데, 결국에는 둘 다 떨어졌다. 무슨 제갈량의 10면방어책도 아니고 잘나가는 부는 역시 가드가 너무 단단했다. 물론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각기 다른 부를 찾아서 가입하긴 했다. 내가 가입한 곳은 애니메이션 감상반이었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그 부는 운영이 영 엉망이었다. 우선 학교 쪽에서 의욕적으로 운영을 하려고 해서 단순히 애니메이션만 보지 말고 일본어 학습도 같이 하라고 해서 일본어 강사를 붙여 주었다. 그런데, 학교 측이 어떻게 설명했는지 고용된 강사는 우리 부가 본격적인 일본어 학습반인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 강사는 일본어를 좀 빡세게 가르쳐 볼 의욕에 가득찼던 모양인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애니메이션 감상에 더 관심이 많은 덕후들 천지인 것을 보고 불만 내지는 의욕상실에 빠졌던 것 같다. 그렇게 부의 운영은 파행으로 갔고, 나중에는 강사가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부원들도 중학시절의 교지편집반과는 달리 영 콩가루 같은 분위기여서 서로간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다. 학교 축제 때 나름 학원물 코믹스 따라한답시고 금붕어잡기나 타코야끼 노점 같은 것을 시도하긴 했는데,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안오는 녀석도 있었고 2학년 선배들이 청소나 잡일을 모두 나에게 짬처리를 해서 타코야끼 냄새도 못 맡아보고 청소만 하고 끝났던 기억도 난다. 아무튼 총체적인 개판이었다.

2학년으로 올라가서는 그냥 다른 친구들처럼 나이롱 부에 들어서 시간이나 때우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당시 한국 고교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활동인 '영화감상반'이었다. 담당 선생님이 매시간 비디오를 틀어주면 한편씩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반이었다. (물론 선생이 그 감상문을 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차피 개판으로 운영될 바에야, 그렇게 마음이라도 편한게 낫다 싶었다. 그래도 덕분에 당시 괜찮은 영화를 많이 봤는데, "마이 빅 팻 그릭 웨딩"은 아직도 가끔씩 다시 보고 싶다.

3학년 때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학년초 당시 지리 선생님이 의욕을 가지고 '시사토론부'를 만들어, 대학교 논술시험에도 대비하는 좀 제대로 된 부활동을 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뭔가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가입을 하긴 했는데, 이미 그때쯤에는 학교 내에서의 사회생활에 완전히 의욕과 흥미를 잃은 나는 뭔가 나대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비쳐지는게 싫어서 입부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어딘가의 부에 들긴 했는데, 그게 어디였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부가 2개 존재했는데, 하나는 컴퓨터문화연구부였고, 다른 하나는 수학문제학습반이었다. 컴퓨터문화연구반은 와우 고안물로 유명했던 모 선생님이 담당하는 반으로(물론 당시에는 고인물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매주 PC방에서 '컴퓨터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주 목표였다. 교내의 서든어택, 와우, 스타에 빠진 녀석들이 줄줄이 그 반에 가입했었다. 역시 남학생 반이다보니 게임 실력으로 나대는 허세충이 제법 있었는데, 매주 특활이 끝나고 월요일 수업시간 그 고인물 담당 선생님이 허세충들의 실력을 까발리는 강평을 친히 실시하시곤 했다("생각보다 안 세던데?"). 반면 수학문제학습반은 무려 부활동 시간에 수능 수리영역 문제를 푸는 정말 경악스러운 반이었는데, 역시 그쪽에도 성적이 우수한 수능 고인물(?)들이 줄줄이 가입했다. 솔직히 이정도면 부활동을 하지 않고 차라리 집에 가서 게임을 하거나, 수학문제를 푸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원론적인 의문이 들긴 하지만, 아무튼 당시 학교는 그러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기나긴 수험생활에 들어갔다. 4수끝에 겨우 대학에 들어간 나는, 그래도 대학에서는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심기일전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은 대학의 모 학회였다. (이름 밝히면 금방 알기 때문에 특정 가능한 서술 지양합니다.) 그곳은 모범적인 운영으로 언론지상에도 몇차례 보도된 곳이어서, 수험생 시절부터 꼭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대학 학회는 고등학교와는 차원이 달랐다. 신입부원 모집절차가 무슨 대기업 신입사원 공개채용처럼 되어 있었다. A4용지로 몇장이나 되는 지원서를 빽빽하게 채워서 내면, 다시 반나절에 걸쳐서 온갖 종류의 압박면접을 받고, 집단토론을 했다. 웃기는 것이 우리 학교의 학회들은 항상 신입부원 선발을 '리크루팅'이라고 불렀다. 고용계약을 맺는 것도 아닌 마당에 리크루트라는 표현이 올바른가 하는 원론적인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튼 문화가 그랬다. 나는 그 리크루팅을 위해 거의 일주일간이나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면서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면접을 시작하자 진행자가 "매년 저희 학회는 우수한 지원자가 많아, 저희로서는 지원자 분들을 모두 합격시켜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하며.." 운운할 때 알아봤었어야 했는데, 아무튼 나는 그 빡센 '리크루팅'에 떨어졌다. 너무 억울해서 떨어진 이유를 물어봤지만 역시 기계적인 답변으로 "매년 저희 학회는 우수한 지원자가 많아, 저희로서는 지원자 분들을 모두 합격시켜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하며.."라고 대답이 돌아왔다.

그 다음으로 내가 노리게 된 곳은 학교의 또 다른 모 학회였다. (이쪽도 활동내용 쓰면 특정되어서 언급 안하겠습니다.) 이 학회는 내가 A+를 받은 수업의 교수님이 지도를 하는 곳이었었는데, 교수님이 학기가 끝나고 나서 친히 나에게 메일을 보내 주셔서 해당 학회에 가입해보지 않겠냐고 제안까지 해 주셨다. 학기가 끝난 직후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원을 못 하다가, 다음 학기에야 지원을 하게 되었다. 교수님의 제안이 있었던 데다, 그 학회에는 지인들도 몇명 가입해 있었어서 어지간히 면접을 잘 보면 붙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또 떨어졌다. 내가 교수 제안 후 1턴을 쉬어서 그런지, 아니면 처음부터 교수는 나에게 '제안'만 했을 뿐인 것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학회 가입은 거절되었다. 교외의 학회 2군데에도 지원했는데 모두 떨어졌고, 교내의 학회 1군데는 너무 지원요건이 빡세서 마지막 순간에 내가 지원서를 내지 않고 스스로 포기했다. 그렇게 대학교 3학년이 되자, 동아리나 학회활동은 완전히 뜻을 접었다. 중간에 모 동아리에 들어 잠시 가볍게 활동을 한 적은 있었는데, 별로 친한 친구들이 안 생겨서 한학기 만에 흐지부지 그만두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본어 공부나 애니메이션이나 역사와 관련된 모임에 들어서 좀 더 활발히 활동을 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은 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또 그런 데 들었다고 한들 그 내부의 정치질과 친목질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의문도 든다. (사실 그런 부분이 싫어서 친목 위주 동아리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오니, 이곳은 전문대학원이라 그런지 한가로이 학회나 동아리 활동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나도 처음에는 사람들 얼굴이나 익혀볼까 하고 학회 1곳에 가입하긴 했는데, 연일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곤두박질치는 성적표를 보고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비싼 회비를 내 놓고도 점점 활동을 안 하게 되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나도 이제 어린아이도 아니고 케이온에 나오는 그런 동아리는 적어도 내 인생에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아마 현실세계의 동아리, 모임, 클럽은 대개 기존 회원의 텃세, 내부의 파벌다툼, 정치질, 친목질, 이성문제, 금전문제 등으로 치고박고 싸우는 또 하나의 사회에 불과할 것이다. 설령 그런 것들이 성공적으로 컨트롤 되는 분위기 좋은 모임이라 할지라도 그런 귀한 곳에 나같은 누추한 인간이 들어갈 수 있을 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나에게는 케이온이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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