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3/17 15:50:03
Name   二ッキョウ니쿄
Subject   자박이는 길


열 개 짜리 짧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이내 보도블럭을 뒤덮은 모래알갱이들이 자박대며 반긴다.
모래밭을 걷는 것은 얼마만인가.
벌써 졸업한지도 10년이 지나 이 길을 다시 걷는다.

오래전 그 날이 생각난다.

우리 학교는 남학교와 여학교가 같이 있는 곳.
통학로는 같아도 통학시간은 달라서
남자아이들은 아침이 되면 여자아이들에게 창 밖으로 온갖 것들을 던진다.

휙휙 거리는 휘파람이나 종이비행기 정도라면 애교로 넘어갈 테지만
때때로 장난기 심한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 상처를 내는게 목적이라도 되는 듯
딱풀이나 지우개를 던지거나 침을 뱉기도 했다.

나는 숫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고
다만 저런 한심한 짓을 하는 아이들보다 내가 더 철이 들었다는 생각에
혀를 끌끌대며 찰 뿐인 평범한 아이였지만
어느 날 어떤 아이가 씹던 껌을 퉤, 하고 뱉은게
네 머리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어느날처럼 도서관에 갔을때, 예쁜 사서선생님 앞에는
한 여자아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의 그 아이는 또래의 여자아이들 보다도
훨씬 더 작았고, 나는 남학교의 도서부장으로서
사서 선생님께의 인사를 생략하고 대출석에 앉아있는
1학년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머리에 껌이 붙었대요.'

아. 아까 그 아이구나.

가슴 한 켠을 바늘이 찌르는 듯이 따끔거림을 느끼며
나는 부끄러워 도망치듯 도서관을 나왔다.
하지만 너는 내가 도망친 걸 알기라도 한 듯이
그 다음해에 여학교의 도서부장이 되어 내 앞에서 인사했다.

처음 너의 얼굴을 본 날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2학년의 마지막에 남은건 네 얼굴 뿐이다.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선생님에게 가당찮은 요구를 했다.
너는 가뜩이나 몸이 작아 낮은 층에 있는 남학교 아이들이
유독 등교길을 험난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숫기도 없던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담임선생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매일 0교시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오로지 너와 학교를 함께 오고 싶어서.
백미터가 되지 않을 그 험난한 등교길이
단 일년이라도 즐거운 등교길이 되기를 바래서

다행스럽게도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인문계 입시학교에서는 일종의 특혜와도 같아서
나는 매일 너와 함께 등교를 했다.
1,2학년들의 웅성거림도
3학년들의 놀림도 다 괜찮았다.
너만 있다면.

내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너의 머리를 보며 생각했다.
남자들 중에서도 키가 좀 작은 편인 나지만
네게는 충분히 커서 좋다고.

그로부터 벌써 10년.
어쩌다 보니 또 이 길을 걷는다.
보도블럭 사이에 끼인 모래알갱이를 밟으며
자박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 길 끝에는 점심시간마다 너와 만났던 도서관이 있고
철제로 된 조악한 문은 여전히 십년 째 그대로 있다
운동장에는 체육시간이라도 되었는지 아이들이 시끄럽게 공을 차고 있고
여기저기 흙먼지가 뽀얗게 올라온다.

혹시 지금 저 철제문을 열었을 때
네가 있더라도 별로 놀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나도모르게 쿡쿡대며 웃었다.

너와 헤어진지가 몇 년인데
고작 자박거리는 이 보도블럭의 모래알갱이 사이로
얼마나 많은 기억을 조금씩 뿌리며 지나다녔는지
얼굴도 이름도 이제는 잊어간다 생각했던 네가

그때 그 흰색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오는 회색 치마를 입고
까만색 낮은 구두와
흰 양말을 신은 채
책 한권을 양손으로 쥐어
배 앞에 살며시 포개고는
웃으며 내게 선배, 하고

아차차.

주머니에서 윙, 하고 핸드폰이 울린다.
커다란 액정에는 여자친구의 이름이 뜬다
전화를 받으려는 찰나에 끼이익 하는 쇳소리가
손가락을 잠시 멈추게한다.

굳게 닫혀있던 철문 사이로
한 예쁜 여인이
똑같이 자박이는 소리를 내며 걸어나오고
나는 이미 액정을 미끄러지는 손가락과
자연스럽게 귀쪽으로 올리는 전화기를 원망하며

커질래야 더 커질 수 없는 눈이 되어
너를 발견했다.

--------------------------------------------------------------------------------------------------------------------------

다음에 계속.



3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692 게임[LOL] 12월 29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5 발그레 아이네꼬 18/12/27 2691 0
    14484 육아/가정남편분들은 육아에 대해 잘 아나요..? feat.부부싸움 42 바방구 24/02/23 2691 1
    13048 IT/컴퓨터아이패드 액정보호용 강화유리를 갈아봅시다~~ 20 whenyouinRome... 22/08/04 2692 6
    14756 오프모임다음주에 조촐하게 모임을.. 82 먹이 24/06/20 2693 15
    13699 사회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나치게 높은 징집률이라고 생각합니다. 15 강세린 23/04/01 2694 0
    13027 기타세차용품 구입기(5) 김치찌개 22/07/26 2695 0
    13509 기타소고기 가격에 대한 생각 12 천하대장군 23/01/25 2695 3
    5181 기타드라마 보이스 4 김치찌개 17/03/14 2697 0
    9723 기타18호 태풍 미탁 3 다군 19/09/28 2697 0
    5186 기타SSL 2017 S1 Premier 개막전 예고.jpg 3 김치찌개 17/03/14 2698 0
    12543 정치푸틴 21일 대국민 연설문 2 인생호의 선장 22/02/24 2698 1
    12777 역사3.1 운동 직전 조선군사령관에게 밀고한 민족대표? 2 라싸 22/05/04 2698 3
    13876 문화/예술한국과 일본에서 인지도가 다른 애니메이션들 25 서포트벡터 23/05/18 2699 12
    5216 일상/생각자박이는 길 1 二ッキョウ니쿄 17/03/17 2701 3
    3531 영화이번 주 CGV 흥행 순위 2 AI홍차봇 16/08/18 2702 0
    7363 스포츠180407 오늘의 NBA(르브론 제임스 44득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 김치찌개 18/04/10 2702 1
    13295 도서/문학[독후감]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6 arch 22/11/02 2702 1
    5271 영화이번 주 CGV 흥행 순위 AI홍차봇 17/03/23 2703 0
    13742 정치미국의 판사가 낙태약을 금지시키다 - 위험사회의 징후들 4 코리몬테아스 23/04/11 2703 26
    4428 영화이번 주 CGV 흥행 순위 2 AI홍차봇 16/12/22 2704 0
    12672 음악문어박수 4 바나나코우 22/03/26 2705 5
    13314 게임[LOL] DRX는 어느정도의 역배로 다전제를 뚫고 우승했나? 13 Leeka 22/11/11 2705 0
    13735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3.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로맨스 6 서포트벡터 23/04/10 2707 7
    5698 스포츠170525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추신수 1타점 적시타) 김치찌개 17/05/25 2708 0
    4872 일상/생각옛기억, 반성, 기록 6 로오서 17/02/15 2708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