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2/20 14:25:14
Name   이젠늙었어
Subject   담배 <2.9375>
포기하면 좋습니다.

저의 경우입니다. 어려서 별로 축복받은 환경이 아니었기에 포기하는데 익숙했습니다. 딱히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편이 아닙니다. 어차피 원하는 것을 많은 경우에 얻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의외의 효용이 있습니다.

첫째, 가열찬 노력끝에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환희보다는 지쳐버리는 성격입니다.
둘째, 원하는 목표는 어차피 이뤄지기 힘듭니다. 반 포기 상태에서 목표를 향해 가다 보면 결국 실패했을 때에도 그 데미지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셋째, 간혹 운이 좋아서 설렁설렁 하던게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투입, 즉 노력 대피 성과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더 큰 기쁨과 충만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젊었을때 부터 뭔가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고 3 때, 대입 학력고사를 마치고 단체미팅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이 때가 모친을 제외하고 처음 이성과 마주친 때입니다. 아주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도 여성분으로부터 경멸에 찬 시선을 몇 번 받고나서 제 자신을 살펴봤습니다. 160 센치 중반에도 못미치는 단신, 여드름에 뒤덮인 얼굴, 두꺼운 안경, 곱슬머리, 홀어머니에 외아들... 거울속의 제 자신이 추하더군요. 그럴만 했습니다. 그 때 부터 독신주의를 자처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관심을 끊었습니다. 과의 이성 동료나 후배 여자사람들에게 데면데면하게 굴기 시작했습니다.

뭔가를 포기하니 그 뭔가가 제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교 학창시절에 연애 경험이 꽤 됩니다. 갑자기 친구의 여친이 제게 고백했습니다. 후배가 손수 조끼를 떠서 제게 선물했고 저는 그 후배를 피해서 도망다녀야만 했습니다. 두 여자가 저를 두고 다투는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점점 책임질 일이 늘어갈 때 비슷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몇 개월간 공들인 프로젝트가 허사가 되었을때 참 허탈했습니다. 불쑥 찾아온 일본인에게 프로젝터도 아닌 A4 출력물로 건성건성 제품설명하고 헤어졌는데 4 년간 최고의 고객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큰 기대를 안하고 건들건들, 되던 말던, 건성건성, 그냥 면피 정도만의 노력을 하는게 제 삶의 지혜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될건 되고 안될건 안되더군요. 예상외로 되면 더 기쁘고, 역시 안되면 그럴줄 알았다~ 하며 소주 한잔에 금방 잊을 수 있고...

그래서 추석 연휴 첫날에 담배를 끊기로 했을 때, 사실 그리 심각하게 생각한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금방 금연을 포기할 예정이었으니까요. 제가 잘 될리가 없죠, 뭐. 그래서 아무에게도 제가 담배를 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저를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저는 궁지에 빠졌고 결국 금연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부에 계속)



5
  • 과연 3부는 올것인가
  • 다음은 2.96875부일 것을 믿으며 추천을 합니다.
  • 담담히 적은 에세이 형식의 글이 좋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511 창작일기 1 nickyo 16/03/31 5764 5
2486 일상/생각장미라는 이름 12 ORIFixation 16/03/28 5323 5
3000 일상/생각스탠포드 대학교 강간사건과 피해자의 편지 6 barable 16/06/11 6050 5
2427 일상/생각아빠와 알파고 6 nickyo 16/03/18 4924 5
2386 기타[SF단편] 펭귄 밀크 10 중년의 럴커 16/03/11 5059 5
2356 IT/컴퓨터알파고의 작동 원리 8 Toby 16/03/09 6532 5
2337 일상/생각알랭드보통의 잘못된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54 S 16/03/03 6332 5
2331 기타무료하버드를 추구하는 사람들 21 눈부심 16/03/02 5531 5
2317 기타[차TEA] 1. 널 잘 모르겠어 그래서 왠지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feat. 기문 4 펠트로우 16/02/29 5252 5
2265 일상/생각담배 <2.9375> 5 이젠늙었어 16/02/20 5703 5
2303 과학/기술맛없는 것 투성이었던 옛날 17 눈부심 16/02/28 6289 5
2246 문화/예술게임계의 절대적인 상징, 슈퍼마리오 6 커피최고 16/02/18 8769 5
2227 과학/기술모든 물리는 국소적이다. 22 눈부심 16/02/15 8625 5
2163 역사육두구 이야기 9 모모스 16/02/02 7792 5
2073 경제행복과 행복에 관한 생각들 21 Moira 16/01/21 7235 5
2070 IT/컴퓨터3주간의 개인 프로젝트 삽질기..(1/2) 11 칸나바롱 16/01/20 8959 5
1961 IT/컴퓨터CSS로 글씨에 불을 질러보자 10 Toby 16/01/06 11349 5
1864 도서/문학비극적 영웅의 조건 7 팟저 15/12/25 9275 5
1825 기타오늘 실시간 검색어 요약 정리 (12/20 오후) 4 또로 15/12/20 7153 5
1845 도서/문학루살카에 대한 기억, 하일지의 진술을 읽고 30 김나무 15/12/22 7793 5
1812 일상/생각잡아 주오 3 바코드 15/12/18 5635 5
2954 여행인도, 진짜 매력적인 여행지 11 이젠늙었어 16/06/06 7210 5
1776 일상/생각바보 크리스마스 8 OshiN 15/12/15 5883 5
1770 기타오늘 커뮤니티 베스트 & 실시간 검색어 요약 정리(12/14) 5 또로 15/12/14 7006 5
1755 정치프랑스 극우당의 승리에 대한 논평에 대한 이야기 15 nickyo 15/12/12 7217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