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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5/04 20:30:57수정됨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brunch.co.kr/@crmn/15
Subject   재미있는 타자와 AI 감독
투수는 피식 하고 비웃음을 지었다. 대놓고 볼로 던진 공이었는데 타자는 방망이를 휘둘러서 파울을 만들어 버렸다. 이 정도로 선구안이 형편없는 타자는 처음이었다. 상대팀 감독이 어제 스포츠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신인 타자를 발견했다"라고 하길래 긴장했는데 이거 실력이 형편없구만. 2구도 몸 바깥쪽 볼로 던져 보았는데 타자는 또 방망이를 휘둘러서 파울을 만들었다. 3구도 마찬가지. 심지어 4구는 배팅볼 수준으로 한가운데로 느리게 던져 주었는데도 타자는 고작 1루 쪽 땅볼 파울만 만들어낼 뿐이었다. 투수는 한 번 더 비웃음을 지었다.

그 비웃음이 당혹감으로, 당혹감이 악몽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어떤 공을 던져도 이 타자는 파울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아웃도 못 시키게 땅볼 파울 혹은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파울이었다. 2회 초 9번 타자 하나를 못 잡아서 벌써 이 타석에서만 90구 넘게 공을 던지고 있었다. 팔은 점점 더 아파왔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타자가 갑자기 허공에 방망이를 휘둘러서 삼진 아웃이 되었다. 아니, 타자가 일부러 아웃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었다. 감독에게 교체를 요구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투수에게 팀 동료들이 말했다. "쟤 도대체 누구야? 너 지금 쟤한테 던진 공이 딱 100구 째였어."

리그가 진행되면서 점점 이 '재미있는' 선수에 대한 정보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이 선수는 어떤 공이 와도 파울을 쳐냈다. 칠 수 없을 정도로 몸에서 멀게 던진 공도 김재박 감독의 선수 시절 개구리 번트 비슷하게 어떻게든 쳐서 파울을 만들어냈다. 몸에 맞는 공을 던지려 해 봐도 요리조리 피하면서 번트든 뭐든 해서 또 파울을 만들었다. 그리고 꼭 99개까지 파울을 만든 뒤에 100번째에는 헛스윙을 해서 삼진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파훼법은 나오지 않았고, 평균 투구 수가 100구 넘게 증가하게 된 상대팀 투수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깨 부상을 입기 시작했다. 투수가 아니어도 100구 동안 쉬지도 못하고 수비를 봐야 하는 상대팀의 다른 선수들 역시 고역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른 구단들이 찾아낸 해결책은 이 선수를 메이저리그로 보내는 것이었다. 더 이상 이 선수가 우리 리그에 있으면 투수가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에 다른 구단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메이저리그 구단들에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터와 감독은 거의 다 AI로 대체되어 있었다. 스카우팅 회사들은 전 세계 야구 경기의 데이터를 매일 받아서 선수의 몸값을 계산해냈다. 사람이 아예 없이 컴퓨터가 모든 계산과 협상을 진행했다.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데이터화가 쉽기에 여러 AI 회사들이 AI 감독을 만들어서 구단에 팔았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여기에서 난감한 일이 발생했다. 메이저리그의 AI 스카우터와 AI 감독들에게 이 선수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데이터상으로는 타율, 출루율, 장타율이 모두 0이고 항상 삼진만 당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관계자들이 "이 선수를 뽑기만 하면 상대팀의 투수진을 초토화 시킬 수 있다니까요!"라고 설명하려 해도 AI 스카우터, AI 감독에게는 이메일도, 전화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들, 아니 그 프로그램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데이터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AI가 투수를 분석할 때에는 총 투구 수가 데이터에 포함되었지만 타자를 분석할 때에는 타자가 투수에게 공을 몇 개 던지게 했는지가 데이터에 포함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중 이 선수는 극적으로 당시 전년도 메이저리그 꼴찌 팀이었던 모 팀으로 스카우트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당시 그 팀이 열악한 재정 상황 때문에 AI 감독 대신 사람 감독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 감독은 경기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이 재미있는 선수를 영입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전년도 꼴찌 팀은 리그가 시작되자마자 계속해서 1위를 지켜 나갔다. 당연히 상대 팀 선수들은 문제점을 바로 알아차렸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AI 감독은 데이터에 기반해서 선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선수들은 마이너리그로 강등이 되었다. 그렇게 전년도 꼴찌 팀은 너무나도 쉽게 그 해 메이저리그 우승팀이 되었다. 뻔한 경기 내용과 결과 때문에 관중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게 결승전이 끝난 후 상대팀의 구단주가 우승팀의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이야기 좀 합시다. 당신네가 갑자기 어떻게 이렇게 잘하게 된 겁니까? 어떻게 해야 당신네를 이길 수 있소?"

"AI 감독에게 피처를 잘 뽑아 주세요."

"피처(pitcher)? 난 이미 가장 몸값이 비싼 투수들만 뽑고 있어요."

"난 어차피 내년에 은퇴할 거니까 말씀드릴게요. 투수 피처(pitcher) 말고, 경기 내용의 어떤 부분을 데이터로 추출할지를 뜻하는 피처(feature) 말이에요. 출루율, 장타율이 다가 아니에요. 그거 말고도 중요한 게 있어요."

"지금 데이터에 뭔가 중요한 게 빠졌단 말이구만. 도대체 뭐가 빠진 건지... 그래, 좋은 피처(feature)가 뭔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쉬워요. 당신 야구 구단주죠?"

"당연하지. 몰라서 묻소?"

"올해에 야구장 몇 번 갔어요?"

"한 번도 안 갔지. 나는 구단 운영하느라 바빠요. 투자결정 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직접 야구장 가서 경기 한 번만 봐 보세요. 뭐가 중요한 피처인지, 뭐가 문제인지 바로 알게 될 겁니다. 좋은 야구 데이터는 결국에는 야구장에 있어요. 야구단을 잘 운영하고 싶으면 야구를 보세요. 할 말 다 했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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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군요. 좋은 글 간사합니다.
  •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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