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2/23 23:24:44수정됨
Name   뛰런
Subject   찌질하다고 욕해도 나는 지금도 군대에서 빼앗긴 그 시간이 너무 억울하고 아깝다
*회고, 회상 형식이라 편의상 존댓말은 생략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내가 있던 부대는 동기생활관이었다. 복무기간은 21개월에 핸드폰 사용은 허가되기 전이었다. 14년도 윤일병 사건이 터진 이후라 직접적인 구타나 폭력은 사라졌지만 쌍욕이나 내리갈굼, 속된 말로 짬때리기라고 하는 후임에게 근무 교대 등 해야 할 일을 떠넘기기 같은 부조리 등은 여전히 남아있던 시기였다. 이제 막 자대에 들어온 가장 계급이 낮은 일이병들이 생활하는 곳이 1생활관이었다. 취침시간이 되면 모든 생활관의 불은 꺼졌다. 하지만 1생활관은 취침시간 이후 선임들이 들어와 누군가를 털고 있는 게 그냥 익숙한 풍경이었다.

취침시간 불꺼진 생활관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상병장들은 그 날 뭔가를 잘못하거나 실수한 일이병들을 속된 말로 털고 있었고, 해당사항이 없는 다른 일이병들은 마치 늘상 있는 일인냥 메트리스에 깔고 누워 그저 모른 척 잠을 청할 뿐이었다. 누워 있으면 한 귀퉁이에선 욕을 뒤썩어가며 털고 있는 상병장의 목소리와 각잡은 자세로 앉아 혼나고 있는 일이병의 죄송합니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귀퉁이에 앉아 혼나고 있는 사람이 나일 때도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일이병일 때도 있었지만 이 풍경 자체는 1생활관에선 익숙한 풍경이었다. 자면서 잠꼬대로 죄송합니다 소리를 하는 생활관 동기놈도 있었다.

뭐 하나라도 실수하거나 깜빡해서 털리지 않을까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거 같았고 혼나고 털리는 것보다도 답답한 건 주말이나 쉬는 날에도 훈련이나 작업만 없을 뿐, 뭔가 할 게 없다는 지루함이었다. 핸드폰 사용은 허가되기 전이었고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사이버지식정보방, 흔히 싸지방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지만 수백명이 있는 부대에 컴퓨터는 고작 수십개였고 눈치가 보여서라도 일이병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못하는 분위기였다. 주말마저 한없이 지루했고 이 시간이 통째로 지나가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었다.

야간근무가 맨앞에 있거나 맨뒤에 있으면 좀 나은데 새벽 2시에 있으면 1시 반에 일어나 군복으로 갈아입고 2시부터 4시까지 근무를 서고 복귀했다가 다시 6시 반에 일어나면 그 전후로 한숨도 깊게 잠들지 못한 체 기상해 그 날 하루를 보내야 했다. 수면마저 끊김 없이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야간근무가 한주에 못해도 3, 4회 정도 있었고 일상적인 만성피로 상태였다. 아침에 기상소리를 듣고 눈 뜨는게 죽을 만큼 싫었고 하루가 시작되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물론 항상 거지같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재밌는 일화나 순간도 있었고 상병이 되고나서부터 꼴보기 싫던 인간들은 거의 전역했고 뭐라 할 사람도 없어지면서 몸도 그전보다 편해졌다. 나는 내 위의 선임들처럼 후임들 갈구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해야 할 것들은 후임에게 짬 때리지 않고 하면서 나머지 시간은 주로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후임들 입장에선 착한 선임도, 못된 선임도 아닌 뭘 하던 아예 관심이 없는 무관심한 선임에 가까웠을 거다. 그래도 마음 맞는 동기나 선후임도 몇몇 생겼고,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지낸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웃기거나 재밌는 일이 있었던 순간조차도 거기서 보낸 638일 가운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지나간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만약 어떤 직장에서 점심 한끼만 같이 먹는 게 아니라 퇴근을 하고 나서도 직장동료, 상사와 하루 세끼를 같이 먹고 단순히 밥을 같이 먹는 수준이 아니라 같이 티비를 보고, 씻고, 잠을 자고 그 모든 걸 같이 한다면? 혼자만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개인공간이나 개인적인 시간은 단 1도 없고 업무적으로 엮인 사람들과 24시간을 같이 지내야만 한다면? 얼마를 주면 그런 조건에서 일할 수 있을까? 근데 그런 일을 불과 15만원 주면서 시켰다.

지금 군대에 있는 군인들도 내가 그러했듯 마치 로또 1등 바라듯 전역을 바라고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특별한 게 아니다. 온전히 나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과 사생활이 보장되는 내 방이란 공간이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바로 사다 먹을 수 있고, 자기 전 폰으로 유튜브를 보다 잠들고, 자다가 중간에 억지로 깨서 2시간씩 나가서 추위에 떨면서 서있지 않아도 되는,그냥 가기 전에는 당연했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무려 638일이 지나서 21살, 22살이 삭제되고 23살이 되어야 특별한 것도 아닌, 그냥 끌려가기 이전의 살았던 삶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치 영화를 보다 중간에 일시정지를 누른 체 멈춰 있다가 2년 뒤에 다시 재생을 누르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맥락과 완전히 단절된 곳으로 강제로 끌려가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버티는 것이기에 그 시간동안 삶이 일시정지가 되었다가 전역을 하면서 그때서야 재생버튼이 눌리고 일시정지가 끝나면서 다시 인생이 이어져서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20살 성인이 되었을 땐 마치 내가 다 큰 거 처럼 느껴졌지만 20대 후반이 된 지금 20, 21살들을 보면 진짜 그냥 아직 애다. 이제 막 수능치고 고등학교 졸업한 그냥 애들이었다. 근데 그런 어린 애들을, 친구들끼리 있으면 실없는 농담 주고받으며 사소한 거에도 빵 터지고, 어쩌면 조금은 철이 없어도 되고, 자유로워야 할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20대 초의 나이에 강제로 끌고 가서 헐값에 부려먹으며, 하루하루 털리지 않을까 전정긍긍하고, 눈치보고, 죄송합니다란 소리를 꿈에서도 하게 만들고, 선임이 되면 그 갈굼을 대물림하면서 유지되는 이 시스템이 나는 지금도 역겹다.

입대를 앞두고 바리깡으로 머리 밀 때, 입대 하루 전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란 생각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밤새 뒤척이던 때, 6시 반에 기상소리를 듣고 눈을 떠서 훈련소에서 처음 아침을 맞았을 때, 어두컴컴한 복도에 서서 불침번을 하면서 이 짓을 2년동안 어떻게 하지란 생각이 들 때, 선임한테 욕먹으면서 전역날이 오기는 할까 막막하기만 할 때 그 순간들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제는 더 이상 내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거나 아끼는 후배나 동생이 군입대를 앞두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그 순간들마다 느꼈던 두려움, 막막함, 심란함, 현타 그런 감정들을 그저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고작 20대 초반 나이의 애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을 거란 게 너무 화가 난다. 좋아하는 동생이 밖에 있었으면 그냥 먹고 싶을 때 먹었을 음식들을, 휴가 나와서 먹으려고 빼곡히 먹고 싶은 음식들을 써가지고 나온 걸 보는데 그게 왜 그렇게 안쓰럽고 속상한지 모르겠었다.

분명 생각해보면 거기서 웃고 재밌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찌질하다고 해도 할 수 없지만 나는 지금도 거기서 보낸 2년 가까운 시간이, 삭제되버린 21살과 22살이 너무 아깝고 화가 나고 억울하다. 오히려 20대 후반이 되고 안 올 거 같은 30대가 다가오자 더 그렇다.

만약 누군가에게 20대로 2년 더 살 수 있게 해준다면 이를 거절할 사람은 헌명도 없을 거다. 아마 재벌이나 백만장자라면 수억 수십억을 주고서라도 그 시간을 샀을 수도 있다. 근데 어떤 합당한 보상조차 없이 그 시간이 그냥 소멸되었단 게 오히려 20대 후반이 되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20대 초가 정말 잠깐이고 인생에서 아무 걱정 없이 놀 수 있는 찰나의 순간있던 게 체감되면 될수록 속상하고 억울하다.

그곳에서 유독 못되고 악랄한 선임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선임들 개개인에 대한 감정은 별로 안 든다. 대신 그 선임 개개인들 보다 20대 초반 나이에 2년 가까운 시간을 강제로 삭제시키고 언제든 헐값에 써먹을 수 있는 노예 정도로 생각하고 부리면서, 전역하고 나서도 지금도 심심하면 예비군으로 불러대고 안오면 처벌한다는 통지서를 보내대는 이 나라와 이 시스템이 나는 더 싫고 화가 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는 군인이 있다면 20대 가장 꽃다운 나이에 1년 6개월을 끌려와서 보내야 한단 것만으로도 거기서 특별히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훌륭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란 의미는 아니에요. 그냥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딱 해야 할 자기 업무 1인분만 한다면 굳이 그 이상 더 적극적으로 열심히 할 필요도 없고 최대한 꿀 빨 방법 찾으면서 다치지 않고 전역날 집에 돌아가면 됩니다. 군대에선 그래도 되고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어요. 보상 없이 의무만을 강요하는 국가의 가스라이팅에 넘어가지 않으셔도 되니 다른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을 지키고 꼭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1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145 일상/생각차밍한 그 형 14 열대어 17/03/11 3245 1
    6396 일상/생각차를 샀습니다. 인생 첫 새차. 10 luvnpce 17/10/10 5511 12
    2406 일상/생각차를 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8 soul 16/03/15 4657 0
    5409 경제차를 굴린지 1년, 비용을 계산해봤습니다. 10 토비 17/04/10 5635 2
    9086 사회차라리 그 악독한 자들이, 슬퍼하고 분노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2 The xian 19/04/17 4112 18
    9628 정치차기총선 본인의 등록지역 국회의원들 재선될 거 같으십니까? 27 알겠슘돠 19/09/05 3547 0
    11629 정치차기 대통령은 윤석열도, 이재명도 아닐까? 16 Picard 21/04/30 3489 1
    11880 정치차기 대권 윤석열-이재명-이낙연 3강 구도가 되는가? 40 구글 고랭이 21/07/13 4049 0
    2607 육아/가정차가 생겼습니다. 12 Toby 16/04/13 5780 1
    5291 일상/생각차 사자 마자 지옥의 (고속)도로연수 47 SCV 17/03/26 4788 3
    5695 기타찜질방 이야기 -1- 7 개마시는 술장수 17/05/24 4160 1
    13592 일상/생각찌질하다고 욕해도 나는 지금도 군대에서 빼앗긴 그 시간이 너무 억울하고 아깝다 33 뛰런 23/02/23 3781 16
    707 방송/연예찌질의 역사가 영화화 됩니다. 10 Leeka 15/08/03 5623 0
    6710 창작찌질남 12 살찐론도 17/12/05 4095 13
    3083 창작쯧, 하고 혀를 찼다. 4 nickyo 16/06/21 3791 2
    9959 일상/생각쭈글쭈글 1 사이시옷 19/11/08 3779 6
    5301 일상/생각쪽지가 도착했습니다. 36 tannenbaum 17/03/27 4586 24
    1317 일상/생각쪼그만 회사 일상 #2 4 Las Salinas 15/10/22 7126 0
    1151 일상/생각쪼그만 회사 일상 15 Las Salinas 15/10/01 7797 0
    3382 기타짱구는못말려 16기 오프닝 [부리부리 댄스 파티] HD ver. 1 자동더빙 16/07/28 5486 0
    12273 여행짧은 제주도 여행에 대한 짧은 글. 3 늘푸른하루 21/11/14 3703 4
    9706 일상/생각짧은 이야기 1 구름비 19/09/26 3609 5
    6666 육아/가정짧은 유치원 이야기 13 CONTAXS2 17/11/28 4661 7
    1255 일상/생각짧은 에피소드으.. 19 눈부심 15/10/14 8761 0
    3160 일상/생각짧은 소식들 23 기아트윈스 16/06/29 3730 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