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4/01 00:56:51
Name   Picard
Subject   줄을 선다. 라인을 탄다는 것은..
안녕하세요. 중견기업 라이프 중년회사원 아재입니다.

1.
제가 공장 엔지니어일때 어찌어찌 운빨이 닿아서 기획부서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쪽 부서에 결원이 생겼고 과장급으로 충원이 필요했거든요.
갑자기 인사발령이 나고, 사람들이 ‘어? 왜 P과장이??’ 하던 반응이었습니다.

눈치보니 이사가 공장장한테 ‘과장급으로 하나 주쇼’ 라고 했고, 공장장은 과장급중에 A급은 못주고 B급중에 빼도 안아까운 애가 누가 있나.. 하다가 저로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제가 지금은 꼰대 다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보수적이고 군대분위기의 공장에서는 이질적인 존재이기도 했고요. (자유로운 영혼 취급 받던 시절이.. )

그런데, 이사가 저랑 동문이라는 이유로 (저랑 동문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지만) 이사가 동문후배인 저를 줄세우려고 데려갔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2.
회사가 망하고 워크아웃중에 이 회사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실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윗분들 사이에서 치열한 눈치싸움, 줄서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제 상사인 이사님이 ‘P차장아.. 줄은 서지 마라. 줄을 서면 그 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하게 되고, 무리한 방향이더라도 가게 된다. 무리한 부탁을 받아도 할 수 밖에 없다’ 라고 하시더군요.
단순 무식한 공돌이 출신에게는 참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이사님은 결국 혼란기에 줄을 못서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셨죠


3.
예전에 한번 답답한 마음에  글을 썼다가 지워버린 적이 있는데, 제가 기술기획팀장이던 시절 갈등이 심하던 팀원이 있었습니다.
며칠전 뉴스 게시판에 올라온 회사원 타입중에 ‘불도저’타입이었는데, 자기가 일을 굉장히 잘하고 스마트한 사람이라는 자뻑이 강한 친구였습니다. 규칙과 법을 준수하며 일하는 사람을 답답하다고 하면서, 불법/탈법을 넘나 들면서 쉽고 빠르고 편하게 일하는걸 스마트하다고 하던 친구였죠.
그래서 고지식한 엔지니어 성격의 저랑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회사일을 하면서 불법/탈법을 저지르다가 걸리면 너나 내가 책임지는 선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회사가 망할수도 있다. 라고 해도 ‘안걸려요. 팀장님은 왜 걸릴 걱정부터 하십니까’ 라면서 반발하고, 제가 반대하니 저한테 보고 없이 불법을 저질러버리는 친구였죠.

제가 좌천 발령이 나고 마지막으로 팀원들이랑 저녁 먹는데 ‘팀장님이 너무 법과 규정을 내세워서 이렇게 된거다. 회사가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결국 팀장님 스타일 보다 내 스타일이 맞다고 하는거 아니겠느냐’ 라고 하더군요.

4.
사실 이 친구가 이런 사고방식을 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회사에 매출 비중이 적어서 경영진이 별로 신경 안쓰고 지원도 제대로 안해주는 사업부가 있었습니다. A사업부라고 하겠습니다.
이 친구가 본사 마케팅기획팀에 있다가 팀장이랑 마케팅실장한테 미운털 박혀서 (캐릭터가 워낙 건방진 캐릭터라) 방출당해 A사업부로 가게 됩니다. A사업부장은 이 친구의 캐릭터를 이용해서 불법적인 일을 시킵니다. 이런걸 하는데 거리낌이 없을 친구였다는걸 알아본거겠지요.
A사업부가 생산목표량 판매목표를 못 맞추는걸 숫자 장난 쳐서 맞추는척 하고 있었고(추정), 이걸 반복하고 있으니 숫자와 재고, 판매채권의 갭이 점덤 더 크게 벌어지고 있었죠. 그래서 이 친구가 2년 가까이 고생하면서 티 안나게 조금씩 재고와 채권, 숫자를 맞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2년동안은 인사고과가 매우 좋아요. 사업부장이 2년만 고생하면 너 원하는 부서로 보내줄게! 라고 했다고 해요. 그런데 사업부장이 짤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부장이 사실을 알고 그랬는지, 캐릭터가 싫어서 그랬는지 이 친구를 방출시켜서 고객서비스팀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또 사고를 쳐서 품질경영팀으로 갔다가 거기서 또 팀장 들이 받고 저희 팀으로 오게 된것이었죠. 저희팀 왔을때 이사님이나 다른 선배 팀장들이 저한테 직간접적으로 사고뭉치이니 잘 지켜보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 친구의 관점에서는 나는 회사를 위해 더러운 일을 했는데 사람 바뀌니 문제에 엮일까봐 다들 나를 경원시한다. 하지만 나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없지 않나? 라는 것이었고..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주임시절부터 정치한다고 사업부장에게 줄서서 무리한일까지 하다가 사업부장 짤리고 끈떨어진 친구인거고
잘 모르는 저같은 사람은 이 친구는 대체 왜 자꾸 사고치고 방출당해서 떠돌아다니지?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이죠. 직접 겪기전까진.

이런 사람이 안 짤린다고? 라고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실텐데, 의외로 법 다 지키면 정직원 자르기 어렵습니다. 적당히(?) 큰 사고를 치면 징계를 하던, 권고사직을 하던, 해고를 하는데 아주 큰 사고를 치면 쉬쉬하느라 제대로 징계도 못합니다. 그래서 자존심 건들면서 스스로 나가게 만드는거죠. 이 친구도 사업부장 나가고 고과도 나쁘게 받고 진급누락도 몇번을 당했는데도 본인이 버티니 인사팀장이랑 부사장이 저한테 그 친구 잘 설득해서 나가게 해봐라. 라는 늬앙스로 압박을 주더라고요.
그래도 법 지키는 시늉은 하려는 좋견기업이니까 버틴거죠.

5.
그러던 친구가 어제 인사를 왔습니다. 31일까지만 나오고 그만둔다고요. 성격 더러운놈 만나서 고생하셨고, 그 동안 보살펴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버티던 친구가 왜 갑자기 그만두나 깜짝 놀랐는데.. 알아보니 예전에는 인사팀장이나 부사장이 저한테 압박을 줘도 제가 적당히 필터링 했는데, 제가 좌천되고 새로온 팀장은 그런 완충역할을 안해준 모양입니다. 작년까지는 부사장이 저만 불러다가 보고를 받고 까댔는데, 올해부터는 팀 전체를 모아놓고 부사장이나 되서 팀원들한테 다이렉트로 까댄 모양..

‘회사가 원하는건 팀장님이 아닌 저에요!’ 라던 호기로운 모습은 어디가고.. 이직 자리 결정도 안되었는데 일단 나가서 쉬겠다고 합니다.


6.
아마 윗분들이 저를 보는 시각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사한테 줄섰다가 이사 나가고 전)사장에게 줄섰는데, 사장도 나가고 끈 떨어진..
저는 그냥 내 일 열심히 하고, 내 윗사람이 원하는 일을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 열심히 한건데..

하긴 애초에 저 같은 아싸에 눈치 없고 고지식한 엔지니어를 기술기획팀장 시킨것 부터가 이상하긴 한거였죠. 기술기획이 영업, 공장, 연구소 등등 크고 작게 영향 끼치는 부서라서 포지션 애매해진 부장들중에 노리는 사람들이 좀 있던 자리였거든요. 그러니 제가 줄서서 팀장 된거라고 봤을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줄이라는건.. 내가 서고 싶다고 서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안섰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섰다고 보면 선것이고… 그런 것인 것입니다.





2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803 일상/생각청문회 통과 자신 있으십니까? 25 Picard 22/05/11 3718 0
    12794 일상/생각헬요일 화이팅입니다^^ 5 곧점심시간 22/05/09 2361 1
    12791 일상/생각내 안의 진보는 끝났는가? 15 moqq 22/05/08 3849 12
    12787 일상/생각용어의 재발견: 기갑, 장갑, 개갑 9 르혼 22/05/07 2992 5
    12770 일상/생각개인적인 이직 면접 꿀팁 6 nothing 22/05/03 4029 6
    12763 일상/생각나는 재택 근무에 반대합니다. 24 nothing 22/04/30 4430 23
    12761 일상/생각어쩌다가 홍차넷에 흘러들어왔는가. 17 파로돈탁스 22/04/29 3779 8
    12758 일상/생각아이들을 돕는 단체 "얀코"에 자원봉사 다녀왔습니다. 24 트린 22/04/28 3587 46
    12751 일상/생각엄마의 틀니 9 풀잎 22/04/23 3723 64
    12747 일상/생각아버지의 제자가 의사였습니다. 11 Regenbogen 22/04/21 4142 12
    12744 일상/생각요즘은 남자들도 육아휴직 쓴다던데.. 8 Picard 22/04/20 3771 7
    12731 일상/생각인천 학생들에게 삼성 노트북 지급 뉴스를 읽고 23 Alynna 22/04/17 4381 0
    12728 일상/생각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4편) 2 化神 22/04/15 2960 11
    12707 일상/생각농촌생활) 3월 중순 - 4월 초 18 천하대장군 22/04/08 3715 20
    12703 일상/생각글라이더 11 Regenbogen 22/04/07 2878 10
    12702 일상/생각신기하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란 존재 7 StrPepMint 22/04/07 3501 14
    12701 일상/생각이직 여행기 5 nothing 22/04/07 3650 6
    12686 일상/생각줄을 선다. 라인을 탄다는 것은.. 11 Picard 22/04/01 3728 20
    12671 일상/생각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3편) 10 化神 22/03/25 4542 19
    12668 일상/생각슈퍼을이 또 나타났습니다. 25 Picard 22/03/23 4339 5
    12665 일상/생각여러 사회쟁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 31 찐타님 22/03/22 4739 4
    12663 일상/생각농촌생활) 봄봄봄 봄이왔습니다 22 천하대장군 22/03/21 3580 29
    12654 일상/생각그럼에도 내가 보수인 것은 19 인생호의 선장 22/03/19 4234 19
    12647 일상/생각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2편) 5 化神 22/03/18 3400 16
    12639 일상/생각요즘 정치가 무섭네요. 4 그린티넷 22/03/17 4259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